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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점 VS 불도장

2010-02-24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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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9.화요일


충용무쌍


 


 


 


 


삼부점(三不粘)불도장(佛跳檣)


 



삼부점(三不粘)


 


개인적으로 골방 생활에서 벗어나면 맛보고 싶은 중국 요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삼부점(三不粘)이라는 이름의 과자인데 실물 구경부터 어려운 귀한 녀석이지요. 금으로 반죽한 것도 아닐 텐데 그냥 사먹지 엄살이 심하다 하실 수 도 있겠습니다만 저 삼부점 라는 요리, 대한민국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요리랍니다. (혹 삼부점을 다루는 음식점을 아시는 분은 제보 주세요. 후사는 어렵겠지만 맛있게 먹고 와서 후기 하나 성실히 쓸 자신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구하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삼부점을 빚는데 들어가는 재료는 단 네 가지. 계란 노른자, 녹두전분, 돼지기름인 라드, 그리고 간을 맞추기 위한 약간의 설탕. 그런데 이 재료들을 오묘한 비율로 배합하여 숙련된 기술을 가진 요리사가 수십 분간 약한 불에 아주 천천히 지져내면 놀라운 녀석이 탄생한답니다.


 


얼핏 보면 매끈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게 캬라멜 같습니다만, 분명 다르답니다.


 


끈끈해서 점(粘), 그러나....


 



 


사진에서 보이듯 마치 잘 녹은 모짜렐라 치즈마냥 쭉쭉 늘어납니다. 요 녀석을 한입 떼어다 입안에 넣으면 달콤한 맛과 향이 입 안 가득 퍼지고 부드러운 계란의 식감과 쫀득함이 조화를 이룬다니 신기할 따름이죠. 그런데 막상 담아낸 접시에는 눌러 붙지 않으니 이것이 일부점(一不粘), 입에 가져가는 사이 젓가락에도 눌러 붙지 않으니 그것은 이부점(二不粘), 마지막으로 입안에도 눌러 붙지 않으니 도합 삼부점(三不粘)이라 부른다지요. 이 신기한 디저트는 일단 까다로운 배합비율을 알아야하고 수십 분간 재료를 섞고, 약한 불에 지져내는 과정에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중국본토에서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몇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맛이라도 보려면 해외 원정이 필요한 '꿈의 요리'인 겁니다. 


 


 


 



불도장(佛跳檣)


 


골방청산을 꿈꾸는 본 기자의 또 다른 요리는 익히 유명한 불도장(佛跳檣)입니다. 참선하던 스님마저 멀리서 풍겨오는 기막힌 향을 참지 못하고 담장을 넘게 만든다는 요리. 전복, 해삼, 상어지느러미, 송이버섯, 오골계 등 몸에 좋고 귀하다는 재료는 다 들어갔다는 요리. 그래서 기력 보충에 그렇게 좋다는 그 요리! 때에 따라선 국내에서 유통조차 어려운 상어입술, 비둘기 알, 잉어부레 같은 재료도 들어간다는 명품 요리! 그러다보니 동네 중국집에선 어림도 없고 없고 호텔 중식당에서 부가세다 봉사료다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한 그릇 먹기 위해 수십 만 원은 각오해야 한다는 무서운 요리.


 


이토록 거창한 요리지만 불도장의 레시피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냥 푹, 건더기들이 반쯤 녹아 젤리처럼 될 때까지 한나절이건 하룻밤이건 찌고 끓이는 게 전부. 그러나 육수를 끓이는 밑 준비부터 계산하면 한 그릇의 불도장이 나오기 까지 밤마다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야하는 요리라니, 이 정도면 '언젠간 먹고 말 꺼야!' 하고 인생의 목표로 삼아볼만 하지요?


 


호사스러운 식도락 이야기가 다소 뜬금없다 싶으실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삼부점과 불도장은 둘 다 중국 요리 중에서도 손꼽히는 대단한 음식들 입니다. 그러나 둘의 성격은 서로 요철처럼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재미있는 게임, 팔리는 게임, 명작이라 불리는 게임들의 성격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삼부점 같은 게임이 있는가 하면 불도장 같은 게임도 있는 법이죠. 한국 게임의 어두운 역사를 짚어온 골방취재. 그 마무리는 과연 좋은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하는 제언으로 짓겠습니다.


 


 


 


천재의 게임 


 


소박하고 흔한 재료들이 빚어내는 화려한 마법 삼부점. 따라서 삼부점은 요리사의 기량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요리 입니다. 이처럼 막대한 시간과 자본 없이도 걸출한 기획자(혹은 제작자)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세계를 뒤흔든 게임들은 삼부점을 닮았습니다. 어느 날 리처드 게리엇의 골방에서 툭 튀어나온 울티마와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만들어낸 테트리스가 여기에 속하겠지요. 흥행 면에서 결과는 달랐지만 국내에선 당시 고교생 신분의 남인환씨가 혼자 개발한 애플용 신검의전설I과 훗날 판타그램에서 개발을 맡게 된 이현기씨의 초기작 디어사이드3가 이와 같은 게임입니다.


 


 



 화면만 봐도 귓가에 BGM이 맴도는 이 기분


 


이들을 [천재가 만든 게임]이라 부르고 싶군요. 아무도 하지 못했던 생각을 맨 처음 떠올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람들. 창조성에 바탕을 둔 혁신은 '천재적이다' 는 수식어로 밖에 설명이 불가능 합니다. 리처드 게리엇, 존 카멕, 존 로메로, 시드마이어, 이이노 겐지 같은 이름들이 떠오릅니다. 위대한 게임의 아버지 들이며 아예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이름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게임은 화려한 화면 연출이나 복잡한 프로그래밍 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창의력이라는 놈은 자본과 기술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녀석 같습니다.


 


 


범재들의 게임


 


특별한 기술 없이 잘 준비된 재료들을 푹 고아서 만든 불도장. 따라서 불도장은 풍부한 재료와 정성이 생명입니다. 다양한 재료를 성심 성의껏 골라 묵묵히 땀 흘려 졸여내는 불도장. 이를 닮은 게임들을 만들어내는 제작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블리자드. 전략시뮬레이션(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롤플레잉(디아블로), 온라인게임(WOW)에 이르기까지 이제 세계 최대의 게임 개발사로 입지를 굳힌 게임계의 공룡 입니다. 올해 차기작으로 디아블로3와 스타크래프트2를 내놓겠다는 그들의 행보에 전 세계가 숨죽이고 있습니다. 게임계의 슈퍼파워이며 게임계의 블록버스터를 찍어내는 막강한 제작사 블리자드. 그러나 그들의 게임은 앞서 말한 '천재들의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합니다. 여기서 블리자드사의 게임들을 한번 '범재(혹은 범인)들이 만든 게임' 이라 불러 봅니다.


 


 



                      블리자드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방의 초석위에 세운 창조의 제국, 블리자드


 


블리자드의 게임들은 참 익숙합니다. 그들의 출세작인 워크래프트I부터 그들의 게임은 창조보다는 모방에 발 담그고 있었지요. 웨스트우드사의 듄II가 일으킨 RTS혁명 위에 보드게임 '워해머 판타지'의 세계관을 이식한 워크래프트I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진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워크래프트I을 시대적 혁신을 이룩한 흥행작에 묻어가려드는 아류작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워크래프트I이 듄II보다 진일보한 게임이었다는 것 입니다. 


보다 개성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해낸 유닛들. 음성 지원되는 대사. 볼거리와 즐길 거리는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드래그를 통한 다중 선택 등 이용자 편의를 돕는 인터페이스도 강화 됐습니다. 채굴 하는 자원의 종류를 추가해 전략적 요소도 첨가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워크래프트I은 듄II를 베낀게 아닌 '듄II의 영향을 받았다' 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웨스트우드의 듄II(위) 와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I(아래)


 


이후로도 C&C와 워해머 판타지를 떼어내고 생각할 수 없는 워크래프트2,  게임 내적으로 토탈애니힐레이션과 다크레인에게서 도움을 받았고 게임 외적으로는 워해머40K의 그늘아래 놓인 스타크래프트,  킹덤 언더 파이어의 영웅 시스템이 생각나는 워크래프트3,  울티마 온라인, 에버퀘스트, 다옼등 기존의 북미형 MMORPG를 집대성한 WOW까지, 블리자드의 역사는 오마쥬와 모방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표절이 아닌 재창조로 거듭나게 만든 것이 바로 블리자드의 저력입니다. 그리고 그 저력은 인력과 자본,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성실함에서 나온 게지요. 어떻게 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486에서도 구동되는 스타크래프트(DX4급이긴 하지만 윈도 95가 깔린 486에서 기동되는 스타를 직접 목격하고 입을 다물지 못한 기억이 있습니다.)는 경탄을 넘어서 경악에 가깝습니다. 먼저 나온 RTS들도 화려한 그래픽 효과와 늘어나는 유닛들을 처리하기 위해 펜티엄급의 최소사양을 고수했던 시절에 486에서도 돌아갈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내는 능력. 발매 이후에도 유저들의 피드백을 수용해 1.0X식의 패치를 계속해가면서 잡아놓은 게임 밸런스와 배틀넷이라는 최고의 멀티플레이를 지원하는 확실한 AS. 이런 면모가 블리자드의 게임을 '불도장을 닮은 범재들의 명작' 이라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이렇듯 블리자드는 모방이라는 초석위에 세운 창조의 제국입니다.


 



 


모방을 허하라


 


저는 이미 지난 시간을 통해 '모방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모방했느냐가 관건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는 창조의 일환으로서 모방을 인정하자는 뜻입니다. 원전을 따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범해온 인류 문화의 역사 또한 이미 지난 시간 언급했습니다.


 


신화와 설화의 시대부터 인물과 사건, 플롯을 서로 빌려오고 베껴 온 역사들.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새의 세 악인이 헐리웃으로 건너가 스타워즈가 되고 스타워즈의 라이트 세이버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건담의 빔샤벨이 된 이야기들. 탄탄한 모방작들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원형이 되거나 때로 모방작이 원전에 영향력을 미치기까지 하는(워해머40K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스타크래프트의 3종족이 태어났지만 스타크래프트의 대 흥행 이후 워해머40K의 일부 종족의 설정과 디자인이 스타를 따라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창작의 세계. 만인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천재가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기에 모방에 대해서 무조건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의와 도리를 아는 모방' 이 빚어낸 결과물들을 또 하나의 창작으로서 인정해왔습니다.


 


 




천국의 유령(Phantom Of The Paradise)과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


 


 



갓핸드 유빅(베르세르크)의 원형격인 지옥의 수도사 버터볼(헬레이저)


 


 



베르세르크의 플롯에 영향을 받은 프리스트와 신암행어사


 


특히 예술인 동시에 기술인 게임은 모방을 통한 재창조에 있어서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습니다. 다독을 한 작가가 반드시 좋은 작품을 써낸다는 기약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게임의 장점을 취합한 게임들이 명작까지는 힘들어도 수작은 능히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서 확인했습니다. 하나의 게임을 베끼면 표절이 되지만 수십, 수 백 가지의 게임을 집대성 하면 걸작이 됩니다. 덧붙여 3차 산업이지만 2차 산업적 성격이 짙은 국내 게임 업체들의 상황은 이것을 더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천재를 키우지 않는(정확히 말하자면 천재를 죽이는)대한민국에서 파지노프의 테트리스나 리처드 게리엇의 울티마같은 혁신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꿈 대신 우리,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따라 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카트라이더나 BnB같은 낯 뜨거운 표절작을 계속 양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창조적 모방과 성실한 노력으로 기존의 것들을 잘 소화시켜 다듬어낸 수작들을 만들어 내도록 노력하자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게임 산업이 따라가야 할 길은 ‘천재들의 삼부점’ 이 아닌 ‘범재들의 불도장’, 즉 블리자드와 같은 길인 것입니다. 근 5년 전만해도 우리는 감히 이런 이야기를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범재들의 명작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모방을 재창조로 녹여내는데 필요한 막대한 시간과 인력그리고 자본이 요구되는 탓입니다. 그러나 이제 리처드 게리엇에게 스톡옵션으로 200억씩 쥐어줄 수 있는 제작사가 존재 할 정도로 우리의 게임시장은 외형적으로 팽창한 상태입니다. 이것의 내실로 채워나가기 위해서 우리도 블리자드와 같은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내 게임업계를 선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넥슨과 NC소프트 같은 대형업체들을 통해서 시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니 그 정도 규모를 가진 업체들 밖에 시도할 수 없는 선택지입니다.



 


 


다시, 차이나 조이를 생각하며


 






                            Chinajoy 2009, 上海, 2009.7


 


다시 차이나조이를 생각해 봅니다. 베끼기와 벗기기로 가득 차 있던 외화내빈의 행사. 그리고 이들을 꾸짖을 도덕적 권위 따윌 내세울 수 없었던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렇다고 내일을 포기할 것 입니까? 이제 기반을 갖춘 한국 게임계의 내일은 예의와 도리를 아는 창조적 모방에서 찾아야 합니다. 오래전의 흥행작을 슬쩍 포장만 바꿔 베끼고 앞트임과 쌍꺼풀로 치장한 늘씬한 도우미들을 벗기는 짓은 우리 그만 합시다.


 


그 정도는, 우리보다 더 무례한 이웃에서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제 한국에서 끓여낸 불도장이 먹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