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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라 해도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세이닌(渡世人)"으로, 도박 외에 생계를 유지하는 방도를 갖지 않은 야쿠자다. 또 하나는 "가교닌(稼業人)"이다. 가업(稼業), 즉 생업을 따로 가진 야쿠자다.

 

야마구치구미 3대째 쿠미쵸, 타오카 카즈오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야쿠자" 이미지는 후자였다. 전시체제 하에서 산산조각이 난 조직을 부활시켜 전국 항만 노동계의 가오로 성장한 것도 그의 "야쿠자는 제대로 된 시노기(먹고 살기 위한 수단)를 가져야 되고, 그것은 조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는 철학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기사 링크).

 

거칠고 사나운 항만 노동자를 통솔하는 일 외에도 야쿠자가 잘 할 만한 일이 있었다. 연예 흥행 사업이다. 타오카는 그 세계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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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라디오 방송 '로쿄쿠 텐쿠 도죠'

 

 

1. 나가타 사다오와 쇼무라 키치노스케

 

1945년 12월, 아직 3대째 쿠미쵸를 뽑지 못하던 야마구치구미의 와카슈(若衆, 젊은이), 타오카 카즈오가 도쿄・긴자(銀座)에 있는 한 사무실을 찾아간다. 2차대전 전부터 로쿄쿠시(浪曲師, 일본 전통 예능인 로쿄쿠(浪曲)를 부르는 소리꾼)로 활약했던 나가타 사다오(永田貞雄)라는 남자가 운영하는 나가타 흥행사(永田興行社)다. 나가타는 카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郎), 타카하시 코레키요(高橋是清) 등 유력 정치인, 스즈키 츄지(鈴木忠治) 아지노모토(味の素) 사장 등 재계인과 인맥을 갖고 있으며 로쿄쿠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인물이자, 야마구치구미 2대째 구미쵸 야마구치 노보루의 의형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붕괴 상태에 있는 야마구치구미의 와카슈에 불과한 젊은이가 쉽사리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타오카가 나가타를 만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인물의 중개가 있었다. “로쿄쿠계의 픽서(fixer, 정규의 절차 바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맥이나 수단을 가진 이)”라는 이명을 가진 쇼무라 키치노스케(庄村吉之助)다. 그는 2차대전 전부터 야마구치구미 와카슈인 류 타네츠구(笠種次)를 도와주는 차원에서 야마구치구미의 연예흥행부에 몸을 담은 적이 있다. 2대 쿠미쵸 야마구치 노보루가 아사쿠사에서 카고토라구미(籠寅組)의 와카슈들에게 습격당한 사건의 계기가 된 나니와야 긴죠(浪花家金蔵)와의 회담을 실현시킨 것도 쇼무라였다.

 

전시체제에 따른 통제로 인해 일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연예가 다 죽어버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나 야쿠자와 로쿄쿠계의 인적 네트워크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 에도시대에 예능이 상품화된 이래 예능 흥행은 야쿠자의 영역이었다. 연예라는 상품을 제공하는 피차별민으로서의 예능민과 그 상품을 구매하는 일반 서민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해온 것이 야쿠자였단 말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그 전통은 남아있어 야마구치구미의 경우에는 초대 야마구치 노보루 시대부터 로쿄쿠나 스모(相撲) 흥행을 챙기기 시작했다. 2대째 노보루 시절에는 로쿄쿠 붐을 타서 성행했고, 특히 관서지방에서는 요시모토(吉本)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지방 극장의 흥행권을 한껏 쥐고 있었다(기사 링크).

 

전시체제 하에서는 오락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마음에 오락에 대한 욕구를 쌓이게 했었다. 타오카 카즈오는 그런 일반 대중의 욕구를 야마구치구미의 시노기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2. 야마구치구미, 흥행업계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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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난 지 2달도 안 된 10월 11일. 전후 첫 영화 “소요카제(そよかぜ, 솔솔바람)”가 공개되었고, 얼마 후에는 “링고노 우타(リンゴの唄, 사과 노래)”가 큰 히트를 쳤다. 매체다운 매체는 신문과 라디오 밖에 없었으나 대중이 오락을 원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특히 로쿄쿠와 가요에 대한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타오카가 로쿄쿠계의 중진인 나가타를 만난 것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쇼무라의 중개로 나가타와의 인연을 맺은 타오카는 선물인 쿠로마츠 하쿠시카(黒松白鹿)를 손에 들고 도쿄 소재 유명 로쿄쿠시들한테 인사를 돌았다. 타오카의 대단함은 만나는 사람을 전부 팬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그는 당시 로쿄쿠계의 거물급인 2대째 타마가와 카츠타로(玉川勝太郎)를 비롯, 미카도 히로시(三門博), 초대 카스가이 바이오우(春日井梅鶯) 등등 당대의 스타들과 인연을 맺고 출연 교섭을 성공시켰다.

 

물론 당시 로쿄쿠계가 놓인 상황을 감안하면 타오카의 제안은 로쿄쿠시들 입장에서도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로쿄쿠'로 불리는 것들을 GHQ가 금지하고 있었던 탓이다. 료코쿠에는 “아이즈의 코테츠(会津の小鉄)”, “시미즈 지로쵸(清水次郎長)” 등 협객물이나 “쿠니사다 츄지(国定忠治)” 같은 타비마타(旅股)물(인의(人義)를 굳게 지키는 바람에 주변의 사도(邪道) 야쿠자들과 갈등을 빚는 야쿠자의 스토리) 등 오야붕・꼬붕 관계나 의리나 정을 주제로 한 대목이 많았기 때문이다. 온 로쿄쿠계의 십팔번이 봉쇄된 상황에서 '흥행을 실현하자'는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타오카는 로쿄쿠시들에게 구세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1946년 4월. 야마구치구미는 코베 소재 야치요자(八千代座)에서 꽃흥행(花興行, 정기 공연과 별도로 치러지는 특별 공연)을 치른다. 위에 나온 일선급 로쿄쿠시에다 슈퍼스타인 히로사와 토라죠(広沢虎造)까지 출연하는 공연에 관객이 안 모일 리 없다. 타오카 카즈오의 노림수는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오카가 야치요자 꽃흥행을 성공시킨 당시에는 로쿄쿠의 꽃흥행을 하자는 생각을 가진 흥행업체나 야쿠자가 하나도 없었단 점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는 바로는 흥행계 전체가 활기를 되찾은 계기가 된 것은 1947년 11월 도쿄・아사쿠사 쇼치쿠자(松竹座)에서 치러진 아즈마야 가쿠엔(東家楽燕) 은퇴 로쿄쿠 대회였다. 종전의 스타급 로쿄쿠시를 중심으로 중견, 새내기까지 골고루 출연시키는 방식과 달리 스타급 로쿄쿠시를 대거 출연시켜 경연(競演)하게 하는 “대회” 방식이 로쿄쿠 붐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오카는 그보다 1년 반 일찍 로쿄쿠 공연에 “대회” 방식을 도입해서 성공시켰다. 타오카의 선견에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참고로 당시 연예인 고액납세자 탑5는 미카도 히로시, 히로사와 토라죠, 타마가와 카츠타로, 스즈키 요네와카(寿々木米若), 카스가이 바이오우였다. 다 로쿄쿠시).

 

타오카 카즈오가 야마구치구미 3대째 쿠미쵸로 발탁된 것은 야치요자 공연을 성공시킨 반년 후인 1946년 10월이었다. 쿠미쵸 부재의 야마구치구미를 지켜온 장로들의 인물을 보는 눈 역시 만만찮았던 것 같다.

 

 

3. 단체등규정령을 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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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사와 토라죠

 

1948년 10월, 타오카 카즈오는 '야마구치 노보루 7주기 추모 흥행'으로 꽃흥행을 치렀다. 그때 역시 히로사와 토라죠, 스즈키 요네와카, 이타미 히데코(伊丹秀子) 등 스타를 아낌없이 기용해서 성공시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성공으로 야마구치구미는 흥행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야쿠자가 연예계와 친화적인 만큼, 야마구치구미 외에도 〇〇예능사나 〇〇흥행사라는 간판을 내세운 야쿠자 조직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연예사 행세를 하며 하는 일이라면 조직의 나와바리 안에서 치러지는 공연수익의 일부를 삥땅치는 것에 불과했다.

 

타오카 야마구치구미는 달랐다. 흥행을 기획하고, 출연자와 출연비를 비롯한 여러 조건을 교섭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극장을 확보하고 공연 스케줄을 조정하고, 공연 당일에는 회장 정리도 했다. 흥행의 기획 단계부터 공연의 실시까지, 일련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사무를 다 하는 “종합 연예사”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클라스가 달랐다. 야쿠자는 '생업을 가진 가업인(稼業人)이어야 된다'고 외쳤던 타오카다웠다고 할 수 있겠다.

 

 

4. 단체등규정령(団体等規正令)

 

순조롭게 연예기획사로서의 야마구치구미를 키우고 있던 타오카 카즈오였으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가 하나 생긴다. 1949년에 제정된 '단체등규정령(団体等規正令)'이다. 2차대전 직후에 선포된 포츠담 명령 “정당, 협회 기타 단체 결성의 금지 등에 관한 건”의 취지를 물려 받은 규정령으로, GHQ에 의한 시책을 반대하는 단체를 비롯해서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단체, 일본 정부를 반대하는 우・좌익 단체 등을 지정해서 해산시킬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야쿠자 조직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무려 65개 단체가 해산 처분을 당했다.

 

야마구치구미는 해산 지정은 면했으나 특별감시단체로 지정되어 야쿠자 조직으로서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타오카는 야마구치구미의 방패 기업으로 설립했던 '야마구치 건설'을 해산한 것에 이어 고베 미나토가와 신사(湊川神社)에서 야마구치구미 해산식을 거행했다.

 

타오카 본인은 고베를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난다. 물론 일차적 목적은 단체등규정령에 의한 점령군이나 일본 정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주목할 것은 여행을 떠난 타오카 카즈오가 피신을 위해 뛰어든 여행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 (12) ~바이(売)】

 

야쿠자에는 오로지 도박만을 하고 다니는 토세이닌(渡世人)하고 야쿠자이면서도 생업을 가진 가교인(稼業人)이 있다는 점은 본문에서 언급했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면 토세이(渡世)도 가교(稼業)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업”이라는 뜻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사람 인(人)'자가 붙으면 뜻이 달라지더군요.

 

토세이닌/가교인의 구분은 바쿠토(博徒, 노름꾼)계 야쿠자와 테키야(的屋, 노점상)계 야쿠자의 구분하고 사실상 겹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토세이닌'은 노름판을 열고 도박을 치는 야쿠자를, '테키야'은 노점상을 운영하며 특히 계절마다 지역마다 열리는 축제 자리에 노점을 내는 (그런 뜻으로 생업을 가진) 야쿠자를 가리킨다는 말이죠.

 

일상적으로 바쿠토계 야쿠자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지만 테키야계 야쿠자를 만날 기회는 의외로 많아요. 비교적 규모가 큰 공원에 가면 일상적으로 노점상들이 가게를 열고 있고, 신사나 사찰에서 축제(일본어로 “엔니치(縁日)”라고 하기도 하죠)가 열릴 때에는 참배길 양쪽에 노점상들이 쭉 가게를 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야끼소바나 오코노미야끼, 프랭크푸르트 소시지 꼬치, 옥수수 구이, 오징어 구이, 초콜릿 바나나, 캔디 애플, 팥빙수, 솜사탕 등등 음식을 파는 노점이 있는가 하면 금붕어 떠내기(金魚すくい)나 물풍선 낚시 등 엔터테인먼트계 노점도 많죠. 이런 식으로 엔니치는 종합 오락 공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런 다양한 노점상들은 거의 다 테키야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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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야쿠자 용어인 “바이(売)”는 그런 테키야계 야쿠자가 자주 쓰는 말입니다. 독자 분들 중에 “오토코와 츠라이요(男はつらいよ/남자는 괴롭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총 48작을 선보인 시리즈 영화인데요. 세상 살기는 참으로 어려운데(특히 사랑을 성취하기!!)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쿠루마 토라지로(車寅次郎), 애칭 '도라상(寅さん)'이 바로 테키야입니다. 작품 안에서 그가 종종 하는 말 중에 “バイ”가 있죠. 한자로 쓰면 아마 판매할 매(売). 한국에서는 “賣”로 쓸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일본어로 장사를 뜻하는 “쇼바이(商売)”를 줄어 말한 것이 “바이”입니다. 즉, 테키야가 노점을 열어 장사하는 것. 이게 바로 “바이”입니다. 타오카 쿠미쵸가 여행을 떠나 뭘 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인데, 여행을 떠나는 도라상한테 뭐하러 가냐 물어보면 “ちょっとバイにね(좀 “바이”하려고)” 정도 답하지 않을까 싶네요. 참고로 “오토코와 츠라이요” 제1작의 예고편 링크(공식)를 달아놓을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