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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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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이 미선이 사건(미군 장갑차에 의해 중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있고, 1년 후 쯤이었을 것이다. 진보계열 잡지인 <아웃사이더>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청탁이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글의 주제는 ‘자이툰 부대’에 관한 거였다(‘자이툰 부대’란 부대명이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자이툰 부대가 2004년도에 파병됐는데, 2003년 내내 이라크에 부대를 파병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갑론을박했던 상황이었다).

 

자이툰 부대 파병을 전후로 해서 다시 한 번 주한미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불과 1년 전 효순이 미선이가 그런 참변을 겪었고, 이번에는 미군의 전쟁에 애꿎은 한국 병사들이 끌려간다며 한국 사회가 들끓었던 시기였다. 

 

내가 쓴 글은 ‘용미론’이었다. 이승만이 말했던 그 ‘용미론(用美論)’과는 결이 달랐지만, 어쩔 수 없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미군을 활용한다, 이용한다란 개념이었으니까, 이게 단순한 말장난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은 용미론을 펼쳤던 기억이 난다).

 

 

1.

‘주한미군 철수’란 주제는 미국을 이 땅에 주둔하게 한 한국과 이 땅에 주둔한 미국 측 모두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그동안 미국 측은 자신들의 전략변화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주한미군 제7사단의 철수가 대표적인 예다. 제7사단의 철수는 당시로서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7사단 철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와중에 미국은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과 수교를 발표했고, 뒤이어 월남이 패망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해야 할까? 한국과 미국의 외교관계 역사 중 한국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였다. 바로 월남파병이었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던 시기 한국은 대미외교에서 큰소리를 치며 대등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남 패망 이후 외교관계는 예전의 그 시절, 아니, 그보다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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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시절 발표된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병력 2만여 명이 철수했다.

 

"아시아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 져야 하고,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닉슨 독트린은 한국 정부를 패닉 상태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선택적이고, 제한적이란 말은 여차하면 한국을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설사 도와준다 해도 지금처럼 대규모 육상병력 지원이 아니라 해공군의 지원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남아있는 미군들을 붙잡기 위해 <기지촌 정화사업>을 펼쳐야 했고, 미군 위안부들은 페니실린 쇼크로 죽어나가야 했다. 너무도 명백한 인권침해인 ‘낙검자 수용소’란 곳으로 끌려가 강제 수용을 당해야 했던 것도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나비효과였다.

 

좋은 면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외치며 율곡사업에 뛰어든 게 이 시점이었다. 결정적으로 한국의 핵개발 결정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2.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을 결심했다. 1974년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에서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계약을 완료했다. (한국은 연간 20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그러니까 리틀보이급 핵폭탄을 2개 씩 생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1974년 5월 인도의 핵실험에 놀란 미국이 전 세계 핵무기 개발 동향을 조사하다 덜컥 한국이 나왔고, 엄청난 압력을 가하게 됐다. 1975년 미국은 한국에 대해 군사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외교적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압박했었다. 주한미군 철수가 가져온 나비효과였다)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물러나자 한국 정부는 한숨 돌리는 것 같더니, 박정희가 그렇게 싫어했던 ‘땅콩농장 농장주’가 대통령이 됐다. 바로 지미 카터다. 박정희와 카터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이었다.

 

“주한미군 철군을 중단해 줘.”

 

“내가 왜? 그리고 이런 요구를 하려면 너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너 툭하면 긴급조치 날리고, 민주인사 때려잡잖아? 인권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너네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그럼 민주주의를 해!”

 

“야! 민주주의가 미국식만 있냐? 한국식도 있어! 한국에선 이게 국룰이야! 국제적 인권 기준이랍시고, 한국에 들이미는데, 한국엔 한국 기준이 있어!”

 

“그래? 너네 기준은 그럼 뭔데?”

 

“북한이랑 맞서 싸우려면, 우리 사회를 어느 정도는 통제해야 해!”

 

“말 잘했네! 북한은 국민총생산(GNP)의 20%를 국방비로 쓰지만 한국은 5%를 쓴다.”

 

“북한은 그렇게 할 수 있어도 우리는 할 수 없어. 그랬다간 나라가 뒤집어진다!”

 

이후 옥신각신 설전이 오갔지만, 지미카터는 한국이 국민총생산의 20%를 쓰지 못하는 이유에 납득했다. 트럼프가 했던 짓을 지미 카터도 했던 거였다. 그때의 논리나 트럼프의 논리도 비슷비슷 했는데, 핵심은

 

'안보 무임승차론'

 

이었다. 하긴 이 부분은 이해를 해야하는 게 지미 카터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주한미군의 지상군 3만 2천 명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 했던 것 뿐이었다.

 

한국의 입장은 좀 남달랐다. 당시 분위기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너희 망해봐라.”

 

란 의미였다. 이미 한 번 당했고, 한 번 당하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이미 20여 년 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애치슨라인'이라는 걸 선언했던 바 있다.

 

"우리는 일본, 필리핀만 커버칠 거다. 나머지는 알아서 자력갱생해라!“

 

이때가 1950년 1월 12일이었고, 다섯 달 뒤에 북한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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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라인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애치슨라인이 '미국이 아시아에서 손 턴다'란 의미는 아니었다. 상황 발생 시 미국이 판단해서 선별적으로 도와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애치슨라인을 그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2번에 걸쳐 벌어진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미국은,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아냐? 큰 일 치르느라 지쳤다. 당분간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니 좀 쉬자.”

 

가 됐던 거였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너무 순진하게 접근했다고 해야 할까? 김일성의 야심을 너무 가볍게 봤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웅진반도에서는 한국군과 북한군의 충돌이 계속 있었고, 105미리 곡사포와 박격포가 동원돼 포격전을 치를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주한미군이 철수한 지 1년 만에 전쟁이 터진 거였다)

 

애치스라인을 그은 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월남에서 철수한 뒤 베트남은 공산화됐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게 이 시절이다. 상상해보라. 광화문 앞에 북한 특수부대가 나타나 기관단총을 난사하던 시절이다(전두환이 청와대에서 박격포를 쏘던 시절이었다. 청와대 경비를 위해 박격포를 준비하고, 북한 특수부대 왔다고 조명탄 날리던 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이때 기준으로 주한미군 철수는 곧 나라가 망하는 거였다).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외치며 핵개발에 뛰어든 이유가 여기 있었고, 주한미군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기지촌 정화사업을 펼쳤던 배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은 강경하게 '주한미군 철수'를 말했다.

 

그러나 철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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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