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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찰청법 제1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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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에이사쿠 자유당 간사장

 

1954년 4월 19일, 사토 토스케(佐藤藤佐) 검찰총장이 이누카이 법무대신에게 '사토 에이사쿠 자유당 간사장의 체포 허락'을 요청한다. 외항선박건조융자이자보급법(外航船舶建造融資利子補給法) 제정을 위해 움직여준 대가로 선주협회로부터 2,000만 엔을 받은 혐의 때문이다. 

 

이 돈은 사토 간사장 당이 진 빚을 갚기 위해 받은 돈이므로 당이 그를 지켜줘야지 마땅한 대목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를 억누를 열쇠를 쥔 같은 당 소속 법무대신은 좀처럼 검찰 수사를 억제하려는 실질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이누카이의 유임을 결정해버린다. 당연한 귀결로 당 내부에서는 '이누카이 경질론'이 분출, 사토 간사장은 스승격인 요시다한테 이의를 제기한다. 

 

“(이누카이 법무대신의 유임을 결정한 요시다 수상에게) 나는 단호히 반대하며, 이제 이누카이를 잘라야 된다고 논함. 이미 부총리에게 사표를 내밀었음에도 유임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그 인격(이누카이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됨-필자 주)에서부터 누누히 설명함. 하지만 결국에는 노(老)수상의 마음도 헤아려서 드디어 (이누카이 유임) 안은 받아들임. 그러나 반드시 뉘우칠 것임…”

(4월 19일 사토 간사장 일기)

 

요시다 수상을 비롯, 정권 중추가 사토 간사장 체포를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 결정적 극면에서 뽑을 귀한 칼)가 있었다. 

 

'검찰청법 제14조'

 

정권의 일익을 맡는 법무대신이 개별・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함에도 검찰총장에게 지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문이다. 정치 권력이 수사 기관의 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하면 권력의 횡포를 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며, 반대로 검찰이 아무 견제도 받지 않는다면 검찰의 권력화가 우려되기에 마련된 조문이다. 자유당 요시다 정권은 이 조문에 근거해서 이누카이를 시켜 검찰의 수사를 억누르려고 한 것이다. 

 

 

2. 흔들리는 이누카이 법무대신

 

이누카이 법무대신의 유임이 결정된 다음 날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 힘든 하루가 되었다. 아침에 있었던 요시다 총리, 오가타 부총리와의 회담에서 사토 간사장 체포를 막도록 압박을 받았다. 특히 오가타 부총리는 요시다 내각의 각료로서의 자각까지 거론하며 '사토 간사장 체포가 원인이 돼서 내각이 무너지는 사태는 절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사토 검찰총장은 세 번째 검찰수뇌회의를 소집한 데다 그와 전후해서 이누카이 법무대신한테 사토 간사장 체포를 지시해달라고 몇 차례에 걸쳐 요청하고 있었다. 

 

이누카이는 흔들렸다. 조선의혹이 널리 국민들이 알게 된 상황에서 지휘권을 발동해서 사토 간사장을 지켜주면 정권 차원의 부정비리를 덮는 격이 된다. 그렇다고 내각의 압박에 맞서 특수부의 수사를 진행시킬 만큼의 정의감, 아니면 검찰 수사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없었다. 고뇌 끝에 이누카이는 지휘권을 행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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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의 결론을 앞두고 오가타 부총리를 방문한

이누카이(좌), 쿠니카츠 법무차관(우)

 

 

 

3. 지휘권 발동

 

4월 21일자 조간은 지휘권이 발동될 것이라 보도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이누카이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내각의 의도가 엿보이는 듯하다. 이누카이는 수상 공저에서 요시다, 오가타와 아침식사를 하며 협의에 임했다. 그 자리에서 이누카이 유임, 그리고 내각 불신임 결의안(국회가 내각에 대해 신임하지 않음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 특히 중의원이 가결하면 내각은 존립하지 못함(일본국헌법 69조 참조))이 제출될 가능성도 있으나 당의 운명을 걸 국면임을 확인했다. 이제 정부와 여당이 각오를 할 차례였다. 

 

같은 날 낮, 이누카이 법무대신이 사토 토스케 검찰총장을 부른 뒤 문서 하나를 들이민다. 

 

“사토 에이사쿠 간사장 체포를 잠시 연기할 것”

 

사상 처음 지휘권이 발동된 순간이다. 

 

이누카이 법무대신은 즉시 기자회견에 임해서 “사건의 법적 성격과 중요 법안(이자보급법) 심의의 상황에 비추어 특수・예외적인 것으로서 국제적・국가적 중요 법안이 통과될 전망을 얻을 때까지 잠시 체포 청구를 미루어 임의 수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뇌물을 받고 제정시키려는 법률이 성립될 때까지 뇌물 사건의 핵심 인물에 대한 구속 조사를 막겠다는 이야기다. 

 

수사를 이어오던 검찰이 얼마나 분했을까. 사토 검찰총장의 담화가 그것을 추측케한다. 

 

“전례가 없는 법무대신 권한의 발동이므로 앞으로 검찰이 수사를 계속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검사들의 사기(士氣)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하면 지휘권 발동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형사소송법에서 허용된 절차나 방법을 활용해서 수사진을 독려하며 소기의 목적은 이루고 싶다”

 

이미 체포한 해운사・조선사 사장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던 도쿄구치소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조선의혹 사건 “최대의 인물” 체포를 앞두고 있었던 만큼 충격은 컸다. 지휘권 발동의 소식을 접한 특수부 검사들은 조사를 걷어치우며 아무 말 없이 휴게실에 물러갔다. 밤에 들어 도쿄구치소를 찾은 바바 요시츠구(馬場義続) 검사정(検事正, 지금의 장)은 사건 조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검사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4.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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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대신의 지휘권발동을 발표하는 사토 토스케 검사총장

 

지휘권이 발동됨에 따라 조선의혹에 대한 수사는 잠시 멈췄지만, 정치적 후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휘권이 발동된 4월 21일 오후 2시, 이누카이 법무대신이 오가타 부총리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시발점이다. 법무대신이 지휘권을 발동해놓고 즉시 사직하면 내각이 법무대신을 희생양 삼아 억지로 지휘권을 행사한 것이 뚜렷해진다. 사직서를 받은 오가타 부총리는 “자네는 ‘국무대신’이잖아!!”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때 오가타가 “법무대신” 아니라 “국무대신”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누카이도 “내각의 일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수상인 요시다 시게루 역시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누카이는 단호했다. 이누카이 법무대신은 '지휘권 발동을 강제당한 법무대신'으로 내각을 떠났다. 

 

익일, 참의원 본회의장이 거칠어졌다. “(지휘권을 발동시킨) 요시다군은 이제 상식을 잃어버렸다. 요시다군은 이 자리에서 제정신인지 아닌지 밝혀야 한다!!” 야당 측은 요시다를 추궁했다. 법무대신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규정한 검찰청법 제14조는 정권 여당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조문이 아니라는 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요시다 수상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2차대전 전에는 일선의 외교관으로 험한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고 2차대전 후에는 GHQ에 의한 간접 통치 체제하에서 전후 일본의 주춧돌을 구축하며 장기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데서 “완만 재상(ワンマン宰相, 원맨 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또한 희대의 애견가로서도 유명해서 처음 수상에 취임할 때에는 “완완 재상(ワンワン宰相, 멍멍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검찰청에 대한 지휘권은 법률(검찰청법)에서 확실히 규정되어 있으며, 법에 따라 발동한 것이다… 나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라는 답변을 하며, 요시다는 거취를 운운할 생각은 없음을 뚜렷이 밝혔다.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전년(1953년) 요시다 수상에 의한 이른바 “빠가야로 해산”(중의원에서 요시다 수상에 대한 질문을 하던 의원에게 “빠가야로!!”라고 응한 것이 발단이 돼서 국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요시다가 중의원을 해산시킨 사건) 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많은 의석을 잃어버리고, 정수 466석 중 199석으로 과반수를 하회해 버린 직후였다. 당시 요시다 내각은 자신이 소속하는 자유당에 더해 보수계 정당인 개진당(改進党)의 협력을 받아 겨우 국회운영을 진행했었는데, 자유당 하토야마파(정당 내 반・요시다 세력)와 개진당은 반드시 요시다를 지지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교적 보수 성향이 강한 일부 사회당 의원들이나 기타 좌파 정당과 짜기만 하면 언제든 요시다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정권 기반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야당 세력은 24일에 요시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한다. 웬만하면 의결될 지경이었으나 개진당 소속 의원 24명이 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바람에 불신임안은 부결되었다. 개진당 내부의 좌・우 분열이 결과적으로 요시다 내각을 연명시킨 셈이다. 

 

 

5. 수사 종결

 

지휘권이 발동되고 검찰수사가 좌절됨에 따라 증회(뇌물을 줌) 측의 핵심이었던 해운・조선 업계 간부들이 잇따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사토 간사장에 대해서는 3차례에 걸쳐 조사가 계속되었다. 특수부는 사토가 받은 2,000만 엔이 당의 회계장부에 기입되지 않은 점을 가지고 정치자금규제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말이다. 6월 15일, 국회가 폐회되자 이누카이의 후임으로 법무대신이 된 카토 료고로(加藤鐐五郎)가 사토 검찰총장에게 “사토 에이스케 간사장 체포의 연기 지시는 자연 소멸”되었다고 통지한다. 그러나 사토 검찰총장은 '이제 와서 사토 에이스케 간사장을 체포해봤자 기소를 할 만한 증거 수집이 기대하기 어렵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이제 사토 간사장은 마음을 놓고 안도할 판이었지만, 청천벽력, 검찰총장이 수사 종결을 선언한 바로 그 날에 검찰이 사토 간사장을 전격 기소한다. 요시다 내각의 지지율 저하의 원인이 자신에 있다는 것을 통감하던 사토 간사장은 드디어 간사장 자리에서 물러섰다. 

 

일선 검사들로서는 사토 간사장 기소에 이어 역시 의혹의 중심인물이던 이케다 하야토 의원, 도코 토시오 이시카와지마중공 사장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서 기소까지 끌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케다도 도코도 둘 다 불기소 처분이 되어버렸다. 일선 검사들의 심중을 헤아릴 방도는 없으나 사토 토스케 검찰총장의 “수사 종결” 의지가 굳건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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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혹의 최종결론을 발표하는 사토 토스케 검사총장

 

 

6. 정치판

 

이케다 하야토 불기소는 그것만으로도 일반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결말이었다. 그런데 “원맨 재상”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 감각은 국민 감각에서의 거리가 더 멀었던 것 같다. 이케다 하야토에 대한 불기소가 결정되기 직전에 이케다를 사토 간사장의 후임으로 임명했었던 것이다(요시다는 자유당 총재이기 때문에 총리가 되었고, 당내 인사도 그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민적 반감을 사는 가운데 요시다 수상은 또 물의를 빚는다. 8월 자유당 지부장 회의 자리에서 사토 간사장을 체포하려고 했던 검찰을 비판하며 “정부로서는 유언비어를 고려하지 않고 법률이 명하는 바에 따라 지휘권을 발동한 것”이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보도기관들은 이 발언을 “요시다 수상, 조선의혹은 유언비어”라는 제목으로 전했고, 항간은 소란스러워졌다. 이제 조선의혹은 법정에서 국회로 무대를 옮겨 다시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국민적 지지를 잃고 있다 해도 수상의 발언은 무시할 수 없다. 9월, 중의원 결산위는 요시다 수상이 한 발언의 진위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검찰총장, 도쿄지검 검사정(지검의 장), 주임검사를 환문(소환하여 신문)하기로 결정한다. 그 자리에서 사토 검찰총장은 “유언비어나 소문에 기초해서 수사를 진행할 것은 있을 수 없”고, “검찰청법에 지휘권 규정이 있는 이상 그 발동을 위법이라 생각치 않는다. 다만 지휘권을 지금 발동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법무대신에게 진언을 했다”고 원론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 

 

아마 야당 세력이 우세가 되었던 중의원의 노림수는 검찰총장에 대한 추궁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검찰의 입장을 환문하는 이상 다른 당사자인 요시다 수상도 환문할 필요가 있다는 정당성 구비에 무게를 실렸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중의원은 요시다에 대한 증인 환문을 결정한다. 

 

 

7. 원맨 재상의 말로

 

혹시나 싶었더니 역시나. 요시다는 중의원의 환문을 거부한다. 구미 7개국 방문이 그 이유였다. 기간은 9월 26일부터 11월 17일, 무려 53일 간에 이르는 외유다. 당연히 격한 국민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정치계의 반・요시다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요시다가 출국하기 직전인 9월 24일, 자유당을 떠났던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일본민주당이 창립되었다. 보수계인 개진당, 원리・원칙을 굽히지 못한 바람에 자유당을 제명되었던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후일에 수상),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 간사장의 친형. 후일에 수상) 등 반・요시다 세력이 결집했다. 한편 자유당은 차기 국회까지는 요시다 수상을 유지하되 차기 당 총재는 오가타로 결정, 요시다 시게루의 은퇴를 기정사실화했다. 

 

민주당이 결성된 결과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면 가결될 것이 확실해졌다. 이러한 국면에서 내각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각을 지지하는지 중의원을 지지하는지 “국민에게 신(信, 믿음)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중의원을 해산시키는 것, 즉, 중의원 소속 의원의 의원 자격을 빼앗고 새로운 중의원 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수상 역시 중의원 의원이며, 또 수상은 국회의원이어야 되기 때문에 수상이 중의원을 해산시키면 자신도 수상직을 잃지만 해산 후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이 다수파를 차지하게 되면 다시 수상으로 지명될 수 있다). 또 하나는 내각 총사직(内閣総辞職). 중의원 선거(이른바 총선거)를 해도 이길 전망이 없을 경우에는 중의원 해산을 거치지 않고 내각 전체가 사직을 한다. 

 

당초 요시다 수상은 중의원 해산을 주장했으나 측근인 오가타 부총리가 반대했고 새 간사장이자 제자인 이케다 하야토는 울며 말렸다고 한다. 1954년 12월 10일, 패전 직후 일본을 이끌어온 장기 정권은 막을 내리며 차기 내각은 반・요시다 세력의 급선봉,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가 꾸리게 되었다. 자유당은 익년 2월에 치러진 총선거(중의원의원 선거)에서 무려 68석이나 잃었다. 장기 정권에 안주하여 부정 행위에 가담한 간사장을 감싼 내각 그리고 정권 여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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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약 1년이 지난 1955년 11월 15일,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병해서 거대 보수 정당을 탄생시킨다. '자유민주당(자민당)'이다. 이에 앞선 10월 13일에 좌우로 분열이 되던 사회당이 재통일된 것에 대한 보수 진영의 위기감이 가져온 대규모 “보수합동”이다.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일본 정치는 자민당 단독 정권 하에서 겨우 사회당만이 대항세력으로 존재한다는 “55년 체제”가 계속된다. 요시다 시게루는 신당(자민당)에는 합류하지 않았고 사토 에이사쿠 역시 참가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싸 준 스승에 대한 의리에서였다. 

 

사토 에이사쿠가 피고인이 된 재판은 진행이 되고 있었으나 일본의 유엔 가맹을 이유로 실시된 특사로 사토에 대한 죄는 면소(공소권을 소멸시켜 법원이 유무죄를 따지지 않게 함)되었다. 하토야마 수상이 성사시킨 유엔 가맹이 사토를 도운 것이다.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요시다와 사토가 자민당에 합류한 것은 하토야마 이치로가 총재직에서 물러선 익년인 1957년. 훗날 사토 에이사쿠는 자민당 사상 유일 4기 연속으로 총재직을 맡으며, 2798일이라는, 쇼와(昭和) 시대에서는 가장 긴 연속 재임 일수를 기록했다.

 

 

8. 이누카이의 수기(手記)

 

조선의혹 사건에는 후일담이 있다. 사토 에이사쿠 간사장(당시)에 대한 재판이 면소가 되고 그 외에도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던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이 잇따랐다. 실은 검찰 내부에서도 당시 수집한 증거를 가지고서는 유죄 입증이 어렵다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액셀을 밟으면서 브레이크를 거는 듯한 뒤죽박죽 알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휘권 발동 문제의 중심에 있던 이누카이 전 법무대신이 수기를 발표한다. 

 

“당시 검찰청에 큰 영향력을 가지던 모 국회의원이 법무대신인 나나 검찰총장을 넘어 검찰청 내 한 유력자를 요시다 수상에게 다가가게 했다. ‘제(해당 국회의원)가 추천하는 자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해주면은 지휘권 발동 따위는 꼭 단행시킨다’고 장담하며 수상 주변에게 지휘권 발동을 일러줬다”

 

“다른 한편으로 검찰청의 어떤 상급 간부에게도 접근해서 회의 자리에서 ‘사토 에이사쿠를 기소해야 한다’고 정반대의 강경론을 뱉게 했다”

 

수상과 검찰 사이를 몰래 오가던 그 국회의원의 노림수는 무엇이었을까. 이누카이는 “지휘권 발동을 실현시킴으로써 법무대신, 차관은 물론 검찰총장 등 검찰청의 주된 책임자에게 책임을 지워 사직시킨다. 대신 그가 미는 이를 검찰총장에 앉히고, 후임 법무대신으로는 수상 주변과 친분이 있는 중의원 의원을 데려온다는 원대한 시나리오다”라고 말한다. 

 

당시 요시다 수상이 비밀리에 검찰 간부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이누카이가 오가타 부총리한테 “수상 관저 뒷문 앞에 서있던 자동차의 정체(검찰 간부의 차임)를 알아냈다”고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누카이의 수기에는 해당 검찰 간부의 실명이 안 나온다. 다만 조선의혹 수사가 진행되었을 때 최고검찰청 차장검사였던 키시모토 요시히로(岸本義広)가 해당 검찰 간부라는 인물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며 이누카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적이 있다. 그 직후 이누카이 타케루 전 법무대신이 사망해서 명예훼손 재판은 중단된다. 그 이후에도 조선의혹을 둘러싼 검찰 및 정치계의 수상한 움직임을 지적하는 소문이 돌기는 했으나 진상은 아직 안갯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