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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서민들이 즐기는 오락으로 압도적 인기를 누리던 로쿄쿠(浪曲, 일본의 전통 연예)의 특별 공연을 시작으로 흥행업계에 진출한 야마구치구미. 그러나 단체등규정령 제정이 큰 변곡점이 된다. 야마구치구미는 해산 단체 지정은 면했으나 특별감시단체로 지정되어 버렸다. 타오카는 단속 당국에 보여주듯 야마구치구미 해산식을 치르고 자신은 피신 삼아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의 훌륭함은 속수무책으로 몸을 감추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발전을 위한 착착 준비할 수 있는 선견지명과 실행력이 있다. 여행을 간 것으로 보인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 타오카의 “흥행업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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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 히데코

 

조직을 위장 해산하고 코베를 떠난 타오카. 그가 향한 곳은 여성 로쿄쿠시(로쿄쿠 소리꾼)로 인기를 누리던 이타미 히데코(伊丹秀子)가 꾸리는 로쿄쿠시단이었다. 유명 로쿄쿠시가 인기가 없거나 새내기인 로쿄쿠시와 팀을 구성해서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대, 타오카는 이타미 히데코가 이끄는 로쿄쿠시단에 대동하기로 한다. 이타미 히데코는 타오카가 로쿄쿠 흥행업에 진출하기 위해 먼저 접근한 나가타 사다오(永田貞雄)의 아내였다. 아마도 그런 인연이 있어서 이타미 히데코에게 간 것으로 여겨진다.

 

이타미 히데코와 같이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지방의 오야붕들과 인맥을 맺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의의가 있었다. 그는 이타미 히데코가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중개인한테 로쿄쿠 공연을 제안하고, 출연료 교섭, 공연 일정의 조절, 집객, 공연 관리, 출연료 확보 등등 로쿄쿠 공연을 치르기 위한 일련의 흐름을 행하는 걸 직접 눈으로 봤던 것이다.

 

타오카가 이러한 지방 순행의 현장을 직접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연예를 둘러싼 미디어 상황, 즉 일반 서민들이 어떤 식으로 연예를 접했는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타오카가 이타미 히데코의 지방 순행에 수행하기 시작할 당시에는 아직 티비 방송이 시작되지 않아서 대중이 오락을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오로지 라디오뿐이었다(일본의 티비 방송은 1953년부터 시작). 물론 라디오를 통해 로쿄쿠를 비롯한 각종 오락이 서민들에게 닿기는 했었다. 하지만 오락에 대한 서민들의 갈망을 메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로쿄쿠를 직접 듣고 보고 싶어했다. 도쿄나 오사카에서 오는 스타 로쿄쿠시의 공연에 관객이 안 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극장에서 치러지는 공연에 출연해서 받는 출연료는 라디오 출연료보다 훨씬 많았다. 연예인 입장에서도 “리이브” 공연은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단 말이다. 그만큼 극장이나 가설 무대에서 치러지는 공연은 공급자, 수요자 양쪽 입장에서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타오카가 이타미 히데코의 지방 순행에 동행하면서 연예 흥행의 현장을 직접 보는 기회를 가진 것은 훗날 야마구치구미 흥행부 성장의 바탕을 이룬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 관례를 깨고 “종합” 흥행업체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흥행의 리얼한 현장을 보는 타오카의 눈에는 흥행 업체를 자칭하는 각 지방의 야쿠자의 실태가 어설프게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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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했듯이 야쿠자는 일반 사회와 연예를 매개해주는 중개인 역할을 해왔었다. 특이한 능력을 갖고 일반인과 다른 삶을 사는 “이질”적인 인간과 사람 냄새나는 일상적 공간의 매개체가 야쿠자였기 때문이다. 로쿄쿠시나 가수, 배우를 고용한 (오늘날 말로) 연예기획사는 자체적으로 소속 연예인을 라디오나 티비에 출연시킬 수는 있어도 흥행은 할 수 없었다. 공연을 실시하려면 극장이나 무대가 있는 지역을 나와바리로 한 야쿠자한테 가서 오야붕한테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러면 아예 공연을 위한 장소를 확보하지 못 하게 하거나 공연 중에 난동을 부리는 등 온갖 수단을 써서 방해했다. 대신 공연의 입장권을 들고 동네 야쿠자한테 가서 인사를 하고 수익의 일부를 주었다.

 

이 과정을 통틀어 “인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주 중요했다. 야쿠자 입장에서는 공연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경비를 해주기만 하면 일정 금액의 돈을 벌 수 있다. 반드시 나쁜 장사는 아니다. 하지만 공연이 성사되기까지의 흐름을 전제하면 어디까지나 “하류”의 일이다. 게다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건 내가 관리하는 나와바리 안에서 공연이 치러질 경우 밖에 없다. 타오카는 이런 구조를 피부로 느꼈다. “하류”에 머무는 한 야쿠자의 흥행업은 사업성이 떨어졌다. 조직 차원의 시노기(돈벌이 수단)로서는 너무나 한정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또 하나 타오카가 본 연예 공연의 문제점이 있다. 야쿠자는 연예인을 공연에 출연시키려고 하는 회사하고 각 지방의 극장 등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개인 역할이었다. 중개인으로 야쿠자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연예인 및 그들의 소속 회사에는 리스크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당초 출연료로 15만 엔 지불할 것으로 약속했고, 야쿠자가 선불금 5만 엔을 가져와서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 나머지 출연료 10만 엔을 요구하자 “남은 금액은 꼬붕이 훔쳐 도망갔다”고 하면서 지급을 거부했다. 야쿠자들의 나와바리를 둘러싼 싸움에 휘말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또한 관객이 적으면 아예 출연료를 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공연을 기획해서 연예인 소속 회사에 출연을 의뢰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동네 야쿠자의 횡포를 억누를 수 있는 코디네이터가 있으면 더 안정적으로 공연을 운영할 수 있었다.

 

타오카는 이들과 같은 전통적 야쿠자 사회가 유지해온 '나와바리에 기인한 구조적 문제'를 타파하려고 한다. 요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야마구치구미가 자체적으로 연예인을 고용하며, 공연을 기획・관리・실시하는 종합 연예 기획사로 성장할 것, 또 하나는 특히 야쿠자가 운영하는 다른 (자칭) 흥행업체가 관여하는 공연의 코디네이트. 당시에는 나와바리에 얽매이지 않는, 프로페셔널한 야쿠자계 흥행업체가 하나도 없었다. 야쿠자 사회의 관습도 중시하면서도 사업가로서의 눈도 가진 타오카의 선견지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3. 코베예능사(神戸芸能社)의 출범

 

1959년, 타오카는 야마구치구미 연예부를 해산시키며, 야마구치구미와 다른 독립된 법인 조직으로 드디어 “종합” 연예기획사를 설립한다. '코베예능사(神戸芸能社)'다. 타오카가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운영은 물론 야마구치구미 연예부를 만들 때에 영입한 흥행 기획・관리의 프로, 야마오키 카즈오(山沖一雄)한테 맡겼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처럼 타오카는 코베예능사에서 “야쿠자성”을 철저히 배제했다. 훗날 코베예능사는 3명의 신입사원을 고용했는데 다 야쿠자와 하나도 관계가 없는 일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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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난바야구장의 타오카

 

설립된 익년, 코베예능사는 출범 기념 공연으로 “노래의 홈런”이라는 가요쇼를 기획했다. 오사카 난바야구장이라는 큰 무대에 당시의 톱스타 가수들을 대거 출연시켰다. 당연히 성공했다. 그것은 타오카 카즈오 야마구치구미 쿠미쵸가 일약 일본 유수의 흥행사(興行師, 흥행을 기획・통솔하는 이)라는 얼굴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흥행사를 주제로 한 책을 보면 타오카 카즈오가 흥행사로서 얼마나 훌륭한 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일본에는 “당대 흥행 오인방”이라 부를 만한 흥행사들이 있었다. 먼저 “흥행계의 챔피언” 나가타 사다오. 타오카가 흥행업에 본격 진입할 문을 열어 준 흥행사다. 둘째는 “클래식 30년” 요시다 노보루(吉田昇). 클래식 공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요시다 음악사무소의 우두머리다. 다음으로 “북일본의 왕” 혼마 세이이치(本間誠一). 북해도를 중심으로 흥행사로 활약했다. 네 번째로 “서커스와 영화의 제일인자” 시바타 타카히데(柴田隆英). 시바타 서커스단을 주재하는 서커스인이다. 그리고 “실력 넘버원”이라는 형용의 타오카 카즈오가 있다.

 

또 하나 흥행사 타오카 카즈오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전반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약 2,000개의 흥행업체 및 연예 기획사가 있었는데 그 중 약 70%가 야쿠자계였다고 한다(그만큼 연예와 야쿠자는 밀접한 괸계에 있었단 말이다). 단, 그들은 자기 동네에서 치러지는 흥행 수익에서 극히 일부만 “경비 수당”으로 받는, 간판만 있는 흥행업체였다. 나머지 30%의 회사도 그 8할이 한 해에 한두 번만 공연을 실시하는 영세 비즈니스였다. 안정적으로 수익을 거두고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는 수십 개 회사 정도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형” 기획사하고 부를 만한, 비교적 넓은 지역을 활동 범위로 한 회사는 일곱 개 정도였다고 한다. 위에도 나온 혼마 세이이치(혼마흥행)가 북해도를 중심으로, 또 시바타 타카히데(시바타흥행)가 동북・죠싱에츠(上信越, 군마・니이가타・나가노의 총칭)를 중심으로 활약했었다. 또한 동북지방에는 야쿠자계 흥행업체로서는 후진이지만 마츠바카이(松葉会) 부회장 키즈 마사오(木津政雄)가 설립한 자유예능사가 있었다. 이들에 더해 나고야를 포함한 츄쿄(中京) 지역의 우카이흥행(鵜飼興行), 교토・나라・와카야마의 칸사이예능(関西芸能), 시코쿠(四国)의 시코쿠예능 등이 있었다.

 

타오카가 이끄는 코베예능사는 코베를 본거지로 서일본 일대(오사카~큐슈)에서 흥행업을 영위하며 그들 대규모 기획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츠바카이 산하 자유예능사를 빼고 모두 다 2차대전 전부터 영업을 이어온 대선배 기획사들이다. 타오카는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코베예능사를 유력 연예 기획사로 키울 수 있었을까.

 

 

4. 코베예능사 성장의 요인

 

어떻게 코베예능사는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인가?

 

중요한 요인으로 뒷배인 야마구치구미가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기획사가 공연을 실시하려면 공연 장소가 있는동네의 야쿠자한테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야쿠자들은 이른바 근대적 계약 개념을 갖추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을 안 지키려는 동네 야쿠자들한테 대항할 수 있는 힘, 약속을 어기거나 부당한 출연 조건을 강요해오는 동네 야쿠자를,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제압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춘 코베예능사는 영세 공연자들에게 있어 얼마나 든든한 존재였을까.

 

또 하나 코베예능사가 급성장할 수 있던 중요한 요인이 있다. 타오카 카즈오는 흥행업계의 “하류” 일-공연 장소의 경비가 그 중심인데-만을 기꺼이 하며 흥행업체를 자칭하는 동네 야쿠자들을 답답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으로 야쿠자가 해왔던 “중개” 역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했었을 것이다. 타오카에게 있어서 연예 기획사란 스타를 발굴, 육성하고 인기를 부추기며 팬을 만들고 공연 장소에 많은 관객을 동원한다는, 일련의 과정에 관여하는 “종합” 기획사였다.

 

여기서도 타오카 카즈오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한다. 강력한 야쿠자 조직이 뒷배로 있으면 소속 연예인이나 거래처를 상대할 때 조금이라도 회사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출연료의 분배 비율을 깎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고, 거래처에 대해서도 무리하게 만들 수 있겠다. 말하자면 폭력을 배경으로 한 “갑”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코베예능사의 방침은 정반대였다. 연예인에게 출연료를 제대로 지급해주는 것은 물론 예상보다 많은 관객이 왔을 경우 처음 합의한 출연료에 돈을 더 얹어주었다. “예상 이상의 동원분”에서 얻은 수익을 기획사가 다 가져간다고 해도 그 기획사가 악랄하거나 착취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코베예능사는 당초 합의했던 출연료 10만 엔에다 3만 엔을 더해 아무 말 없이 13만 엔을 주었다고 한다.

 

코베예능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야마오키 카즈오는 아래와 같이 증언한 바가 있다.

 

“처음 출연시키는 연예인들은 야마구치구미가 뒷배라서 걱정하기도 하는데 막상 같이 일하다 보면 신용해 주더라고요. 돈은 돈대로 제대로 주고, 약속도 지키고, 지방 공연도 장기간 계속되므로 연예인 입장에서는 고마운 거죠. 게다가 야마구치구미의 인원들도 착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준 것이 그 신용도를 더 높였는지, 연예인들은 안심해서 따라와 줬어요.”

 

그런 연예인들 중에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 있었다. 고등학생용 일본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일본 가요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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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는 미소라 히바리와 코베예능사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부터 이야기하기로 한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 (13) ~진기오 키루(仁義を切る)】

 

“진기오 키루(仁義を切る)”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진기(仁義)는 한국어 식으로 읽으면 “인의”. 원래 공자가 말한 박애(博愛) 정신을 뜻하는 “인(仁)”에다가 정의를 뜻하는 “의(義)”를 붙여 최고의 “덕(德)”을 의미한다고 맹자가 이야기했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에요. 어쨌든 '인의'하면 인간으로서 꼭 지켜야 될 도덕, 윤리, 덕목, 이런 개념인 것 같죠.

 

한국에서 “의리 없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화가 있는데 그 일본어 제목은 “진기나키 타타카이(なきい, 인의 없는 싸움)”입니다. 그 영화가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본에서 인의 하면 “야쿠자가 지킬 도리" 정도로 통하는 것 같아요. “키루(切る)”는 무슨 뜻일까요? 일어 공부를 한 분이면 “자르다” 아니면 “끊다”에 상응하는 동사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 “인의를 끊다”가 무슨 뜻이 될까요? 신세 진 사람에 대한 은혜를 갚기는커녕 배신하거나 인연을 끊는,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못하는 행위 정도?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진기오 키루”의 “키루”는 자르거나 끊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게 (뭔가를) 한다” 정도의 뜻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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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부키(歌舞伎)라는 일본의 전통 연극에서 등장 인물이 관객석을 쳐다보고 얼굴을 과시하는 듯한 포즈를 하는데, 이를 “미에오 키루(見得を切る)”라고 합니다. “미에(見得)”라는 동작을 눈에 띄게 한다는 거죠. 이게 어느새 일반 용어가 되면서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언행을 한다”는 뜻으로 쓰이죠.

 

“진기오 키루”에서의 “키루(切る)”도 이렇게 사용됩니다. “인의를 눈에 띄게, 당당하게 한다”는 의미가 되는 거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의는 도덕이나 도리 자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야쿠자끼리 처음 만났을 때에 자기소개 겸 야쿠자로써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야쿠자계의) 첫인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는 야쿠자에게 있어서 “진기오 키루”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는 상당히 중요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연예인이 공연을 실시하려면 극장이나 무대가 있는 지역을 나와바리로 한 야쿠자한테 “인사”를 하러 가야된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공연이 그 야쿠자한테 방해 받을 것을 막기 위해 매출의 일부를 주는 건데요. 타오카는 아마 동네동네의 오야붕들한테 “진기오 키루”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진기오 키루”가 일반화되었어요. 뭔가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게 된 상대방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하는 것을 “진기오 키루”라고 하기도 하죠. 거래처에 신입 사원을 데리고 가는 과장이 “코죠쵸니 진기데모 키또쿠카(工場長に仁義でも切っとくか)”하면 “공장장에게 인사나 해놓을까”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