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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샤프란 혁명, 출처 - <엠네스티>

 

“대덕 승가여, 내 말을 들으시오. 저 난폭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무도하고 무자비한 장군들, 나라의 재물을 훔쳐 살아가는 큰 도둑들은 빠코꾸에서 한 스님을 죽였고, 여러 스님들을 밧줄로 묶었습니다. 때리고 매질하고 비방하고 협박했습니다. 승가는 저들을 거부해야 합니다.”

 

2007년, 이른바 ‘샤프란 혁명’이라 불리는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버마승려총연맹 의장 우 감비라 스님들은 이렇게 말하며, 군부를 향해 ‘복발(覆鉢)’을 선언한다. 복발이란, 간단히 말하면 밥그릇을 엎겠다는 의미다. ‘느그들에게는 공양을 받지 않겠다’는 승가의 집단 선언은 미얀마 사회에서는 일종의 파문과 같은 권위를 가졌으며, 그 덕분에 민주화에 대한 전 국민적 지지가 모이는 계기를 제공했다.

 

2021년, 정보 통제가 불가능해진 21세기, 미얀마의 청년들은 백주대낮에 군부의 총탄을 맞고 있다. 군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수녀님의 사진이 커뮤니티를 강타했다. 그런데 전 국민의 85%가 믿는 불교의 수행자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궁금해졌다. 그 많던 스님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미얀마를 이해하는 네 가지 키워드 : 불교, 국가, 승가, 국민

 

“버마족이 되는 것은 불교도가 되는 것이다”라는 미얀마의 속담이 있다. 불교 경전과 미얀마의 전설들에 의하면, 미얀마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 경이라 한다. 그렇지만,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기원후 10세기경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불교는 미얀마 역사의 핵심이었으며, 정치에서 경제까지 사회의 모든 부분에 영향력을 뿌리 깊이 내렸다. 그 결과, 미얀마는 불교, 국가, 승가(僧伽 : 승려들의 집단), 국민으로 구성된 4가지 요소가 긴밀하게 상호작용 해왔다.

 

(여담. 여전히 동북아시아의 불교는 사이즈가 졸라 쩌는 대승불교이고,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밴댕이 소갈딱지의 소승불교라는 인식이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불교가 쌓아왔던 프레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결과지만,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테라와다(Teraveda) 불교, 또는 상좌부 불교라 지칭해야 적절하다)

 

미얀마의 역대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정치 철학과 통치 이념을 모두 불교에서 찾았다. 자연히 역대 왕조와 정부는 모두 불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자연히 사회적으로 승가의 영향력도 지대해졌다. 정치는 물론이요, 교육(미얀마는 성인식으로 단기출가를 한다), 심지어 불교와는 영 관련 없어 보이는 경제 분야에서까지 영향을 발휘했다. 단적으로, “군부를 제외하면, 미얀마에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승가밖에 없다”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였다.

 

승가는 울타리 밖에 있는 청정한 영역으로 받아들여졌고, 미얀마 역사에서 특수적인 위치를 고수해왔다. 예컨대, 정부에서 세금이 잘 안 걷힌다고 지방관을 갈구면, 지방관은 동네의 명성 있는 스님에게 하소연을 한다. 하소연을 받은 스님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자연스럽게 세금 문제는 해소된다. 이러한 매커니즘은 지역민들의 세금 감면 청원 시에는 역순으로 돌아간다. 즉, 정부와 국민 간에 특수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승가는 언터쳐블한 권위를 통해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다. 이 정도면 진짜 ‘관습헌법’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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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승려들 (BTN)

 

이러한 양상은 미얀마 근현대사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824년,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지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영국은 하나의 실수를 저지르는데, 미얀마인들에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영국은 기존 정치 시스템에서 작동하던 불교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19세기 후반, 미얀마 전역에서 반란이 발생하는데, 반란의 중심에는 늘 승가가 있었다. 물론 영국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차례차례 진압당하지만, 이 시기, 영국의 공문서는 이러한 기록을 남긴다. ‘노란 가사(승려들의 예복)를 입은 사람들만큼 끈질기고 고집불통인 세력은 없으며, 그들만 없으면 버마의 통합이 한결 쉬웠을 것이다.’

 

웃기는 녀석들이다. 들어가지를 말지.

 

승려들의 민족주의적 저항운동

 

어쨌든 영국이 미얀마 전역을 점령하면서, 기존까지 작동하던 미얀마 불교의 시스템은 무너졌다. 승가를 통합하고 이들을 관리하면서 정부와 대등하게 협상하던 인물인 ‘국사(왕이랑 맞다이하던 나라의 대빵 스님)’의 권위가 상실된 것이다. 영국 정부는 조금 기다리면 저항 운동이 사그라질 것 같았겠지만, 천만의 말씀. 1920년대로 접어들자, 승려들은 ‘참참못’을 시전하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이들이 기치로 삼은 것은 민족주의였다. 교육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면, 영국이 실시한 서구식 교육정책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친화적이다. 자식의 출세를 바라는 부모들은 선교사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켰고, 영국 정부는 선교사 학교 출신을 우선 임용했다. 소수 민족들은 빠르게 기독교로 개종했고, 버마족과 승려들의 자존심엔 심한 스크래치가 난다. 그들은 미얀마 불교의 승원을 주변 불교 국가를 포함하여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철학과 나와서 밥 벌어먹고 살수나 있겠냐?’는 반문을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세속화·서구화가 진행되자, 불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는 지속해서 뜨거워진다.

 

불교인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20세기 초반의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신발 사건’이다. 1918년, 미얀마에 싱글벙글 관광 온 유럽인들이 신발을 벗지 않고 사원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공식적인 항의가 시작됐다. 이들에게는 신발을 신고 사원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땅 밟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식민지 치하에서 영국을 극혐하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대외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다. 미얀마인들이 갖고 있던 여러 불만이 ‘불교’라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영국 내각이 인도 자치정부 수립에서 미얀마를 빼 버리면서 발생한 1920년대의 민족주의적 저항 역시 그 중심에 승려가 있었다. 우 오타마(U Ottama)는 옥사할 때까지 줄곧 감옥을 들락날락하면서도, “자유가 없는 노예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로 미얀마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심지어 1930년대에는, 타야와디 지역에서 승려 우 야 쪼(U Yar Kyaw)가 비밀결사를 조직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농민군들을 모아 ‘수제 엽총’으로 루이스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에 맞선 것이다. 비록 핸드메이드 딱총이었지만, 이들은 게릴라 전술을 활용해 18개월이나 활동하며 역사에 강렬한 한 페이지를 남긴다. 농민군 1만 명이 사살당하고 우 야 쪼를 포함한 128명이 교수형 당하며 항쟁은 마무리된다.

 

잠깐 교리적으로 보자면, 관심법 드립을 치던 궁예의 한국이나 그리고 아예 사병 집단이나 다름없던 일본의 일부 불교사적 맥락과 동남아시아의 불교 맥락은 굉장히 다르다. 대승불교에서는 방편, 그러니까 목적을 위한 수단이 상당히 정당화되는 맥락이 있다. 상좌부 계열에서는 명문화된 윤리에 좀 더 엄격하다. 그러니까, 상좌부 불교권인 미얀마에서 승려가 직접 총을 들었다는 것은 이단이 될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그 ‘이단 승려’가 상당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윤리로는 가둘 수 없는 시대적 압력이 절정에 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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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야 쪼. 그는 왕을 자칭하며 사야 산이라 불린다.

 

영국의 악명 높은 분할통치, 미얀마의 역사를 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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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적 항쟁이 격해지는 것에 부담을 느낀 영국은 결국, 1937년, 버마를 인도와 대등한 권한을 가지는 직할 식민지로 지위를 격상시키고, 식민지 자치 정부에 적잖은 권한을 이양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식민주의 국가들이 써먹었던 전략, 이른바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문제가 터져 나온다.

 

소수 민족인 까렌족, 까친족 등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앞장서서 도왔으며, 심지어 사야 산 항쟁 진압군으로 참여했다. 소수 민족뿐만 아니었다. 미얀마의 경제 분야에서도 인도인과 중국인의 점유율이 50% 이상으로 상승한다. 버마족에게 이러한 모든 것들은 ‘침탈’이라는 용어로 정리되었고, 침탈을 받은 정체성은 ‘불교’에 있었다. 민족주의에 ‘배타성’이라는 간판이 걸리게 된다.

 

1938년, 붓다를 욕하는 무슬림 측의 책이 퍼지면서 ‘소장승려연합’이 결성되는데, 반 무슬림 정서가 확산되면서 “무슬림을 불교를 모욕한 제 1 공적으로 삼아 모든 무슬림을 죽이고 그들의 종교와 언어를 말살하겠다”는 경고를 정부에 던진다. 이러한 소요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승려들은 어딜 가나 대중들에게 연설하고 그들을 지휘했으며, 어떤 승려는 직접 무기를 들기도 한다. 반정부, 반인도, 반힌두, 반무슬림 등 강력한 배외주의적 성향의 이 운동은 200여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었다.

 

후술하겠지만, 승복을 입고 시위대의 차를 때려 부수는 ‘극우’ 승려들을 보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듯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갑툭튀한 것이 아니라, 지난한 역사적 맥락이 낳은 산물이다. 미얀마 불교와 배타적 민족주의는 일종의 정치적 리스크였다. 이후의 모든 정치인은 이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고, 설득하며, 이용할 것인지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고 로힝야족 사태, 그리고 2021년의 군부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웅 산, 우 누, 그리고 만악의 근원 네 윈 군부와 불교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 산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뿐만 아니라, 종족과 종교를 초월한 민족주의를 이야기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언급한 대로, 영국과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승가는 깊숙이 개입했는데, 기독교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맥락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종족, 우리 종교, 우리 언어’를 이야기했다. 아웅 산은 이에 반대하며, 정치와 종교(특히 불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다양성 안의 통합정책’을 주장한다.

 

잠시 일제가 미얀마를 식민지로 삼았을 때,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은 민족주의 불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불교 교단에 상당히 협력하면서도, 승려를 철도 건설 사업에 동원하면서 사찰의 보물을 도굴하는 일제를 ‘서양을 공격하기 위해 총대 메준 형들’이라는 느낌으로 긍정했다. 소수 민족의 기독교화를 우려했던 그들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했기에 소수 민족들은 아웅 산이 이끄는 따킨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웅 산의 사망으로, 배타적 민족주의와 패권주의적인 불교 집단의 폭주를 막을 사람이 사라져 버린다.

 

그 뒤를 이은 우 누 총리는 ‘불교 국교화’를 선거 공약으로 걸 정도로(불교 국교화는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소수 민족은 반대했다) 대놓고 불교를 지지하면서, 희대의 걸작, ‘불교 사회주의’를 주창한다. 불교 교리가 바로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이며, 한발 더 나아가 ‘불교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구상한다. 즉, ‘최상의 복지 = 열반’이라는 도식의 성립이다. 여기에 자기가 끌어다 쓰고 싶을 때마다 민주주의를 끼얹으면서, 결국 군부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한다.

 

만악의 근원 네 윈 군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정교분리’를 선언하면서 승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때부터 불교는 과거 독립투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소규모로 진행된 민주화 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90년까지 오래도록 해 먹는 과정에서 승가의 조직은 많이 무너졌고, 70년대 중반, 승가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며 ‘당근’을 제시한다. 오랜 불화에 지친 미얀마 승가는 이에 응했고, 민주화는 물 건너가는 듯 보였다.

 

(버마식 사회주의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역사에는 두 가지 좋은 사례가 있다. 짤방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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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참고 문헌

 

이중남, 「버마 승가의 저항 역할에 관한 역사적 연구」, 성공회대학교 석사논문

정기선, 「미얀마 불교의 역사와 사회적 위상」,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미얀마뉴스 애드쇼파르 news.myantrade.com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번엔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이 나왔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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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