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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내 이방인

 

그들은 말 그대로 골칫거리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TV에서 그들은 강력 범죄의 유력한 용의자이자 앞으로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한 잠재적 범죄자로 등장하곤 했다. 각종 SNS와 미디어 속에서 그들은 불법 월경을 통해 태국으로 들어온 자들로 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이자, 국적 없는 아이들을 생산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사실 그들은 태국인들이 꺼리는 3D 업종에 종사하는 저임금 비숙련 이주노동자가 대부분이다. 상당수는 정치안보적 이유로 난민이 된 사람들이며, 어떤 국적도 소유하지 못한 무국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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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태국으로 넘어온 카렌족 엄마와 아들(태국 내 이방인)이 쓰레기 청소장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오래전부터 태국 땅에 살던 ‘비슷한’ 사람들(고산족)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과 별반 구분할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이주노동자, 난민, 무국적자, 고산족 등으로 불렀다. 그들이 어떠한 지위와 처지이건 상관없이 그저 그들은 다른 땅에서 온 환대 받지 못하는 이방인, 즉 나쁜 타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태국 내에서 '그들'의 대상은 주로 미얀마인들이었다.

 

 

태국 내 이방인이 관심을 받게 된 사연

 

이처럼 태국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만 여겨지던 이방인들에게 태국 국민들과 국제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금부터 그 사건 속으로 시간을 되돌려보자. 

 

2018년 6월 23일, 태국 최북단에 위치한 치앙라이(Chiang Rai)도에서는 전 국민(태국 국민)의 주목을 끄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명 ‘태국 동굴 소년들’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은 태국-미얀마 국경 검문소가 있는 매싸이(Mae Sai)군 소재 도이 낭넌(Doi Nang Non) 산에 위치한 탐 루앙(Tham Luang) 동굴에서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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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YTN>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무빠’(Moo Pa, 야생멧돼지) 유소년 축구단 소속 12명의 아이들과 코치가 오후 훈련을 마친 후 담력을 키우기 위해 동굴로 현장학습을 갔다가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태국 언론과 외신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며 현장 상황을 전했고, 전국의 태국인들은 이들이 무사히 구조되기를 기도했다. 

 

열흘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면서 희망이 점점 사그라들던 7월 2일, 영국 잠수부들에 의해 아이들과 코치 전원 생존 소식이 확인되었다. 열흘간의 굶주림과 동굴 생활로 인해 아이들과 코치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후 비상식량과 구급약이 공급되었고 안전한 구조를 위해 잠수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태국 네이비씰 출신 구조대원 한 명이 사망하였지만, 이 고귀한 희생과 태국 국민의 관심, 국제 사회의 협력 등으로 고립된 아이들과 코치 전원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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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태국 동굴 소년들 구조 계획. / 이미지 출처-<경향신문>

 

7월 10일, 코치와 아이들 전원이 무사히 구출되었다. 이 기적적인 생환 소식은 전 세계에 퍼져 나갔고, 당시 개최 중이던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에 이들을 초대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코치와 아이들은 건강 회복을 이유로 월드컵 결승전을 참관하지는 못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코치와 축구단 소년 세 명이 무국적자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무국적 상태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코치 엑까폰 짠타웡(Ekapol Chanthawong)과 몽콘 분삐얌(Mongkol Boonpium)은 따이-르족(Tai Lue) 출신, 아둔 쌈언(Adul Sam-on)은 와족(Wa) 출신., 폰차이 캄루엉(Pornchai Khamluang)은 따이-야이족(Tai Yai)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미얀마 소수종족 출신으로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태국 땅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들에게 태국 국적을 부여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약 한 달 후인 8월 9월, 태국 정부는 이들에게 태국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였다. 13명의 생명이 무사 귀환한 ‘동굴의 기적’은 4명의 무국적자에게 정치적 생명 또한 부여했다. 

 

두 번의 기적으로 귀결된 ‘동굴 소년들’ 사건은 약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차츰차츰 잊혀져가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태국에는 50만 명에 가까운 난민들이 존재하며, 무국적자를 비롯한 불법적인 상태의 미얀마 출신 이주민들이 최소 2백만 명 이상 존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6년 아웅산 수찌 미얀마 국가자문과 태국 정부, UN 3자 협의로 공식적인 미얀마 난민의 자발적 귀환 프로그램이 합의되었고, 같은 해 10월 제1호 미얀마 자발적 귀환 난민들이 공식 절차를 통해 미얀마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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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웅산 수치와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그러나 고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여전한 미얀마군의 횡포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귀환을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미얀마 출신 타자들, 즉 난민, 무국적자, 고산족,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은 여전히 풀기 힘든 사회적 난제로 여겨지고 있다. 

 

(2021년 2월 1일 발생한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현재는 오히려 미얀마 국적의 피난민들이 태국-미얀마 국경 지역으로 몰려들고 있으며, 태국 정부는 내정 불간섭 원칙을 강조하면서 이들의 태국 영토 내 유입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이 글은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전 태국 내 미얀마 출신 타자들에 주목하는 글이므로 쿠데타로 인한 영향은 포함하지 않았다) 

 

 

미얀마인에 대한 태국인의 인식 : 그들은 악마여야만 했다 

 

잠시 태국과 미얀마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태국과 미얀마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역사적 앙숙 관계였다. 

 

두 국가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오랜 기간 동안 상대 국가를 ‘적’이라 생각해왔다. 이처럼 근거리에 위치한 ‘적’으로서의 타자인 미얀마는 태국의 민족의식 확립에 있어서 대립항으로 이용되었다. 이를 아래 짧은 에세이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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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민족국가 건설 시기 태국은 미얀마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공고히 하였다. 애초부터 진정한 태국다운 실체(authentic Thainess)가 없었기에 외부에서 태국답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정치, 역사, 지리,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태국의 민족성을 재구성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본래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좋고, 올바르며, 선(善)한 가치에 준하는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 존재자로서 나라는 주체가 나라는 대상을 스스로 끊임없이 탐색하고 탐색해도 나로서의 특성을 쉽게 인지할 수 없었다. 본래 좋음, 올바름, 선함은 존재론적 탐구만으로는 인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자체로 좋고, 올바르고, 선한 것은 없었다. 

 

이 가치들은 나쁘고, 그릇되며, 악한 것과의 이항대립적 관계 속에서 파악 가능했다. 이제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방향은 나쁘고, 그릇되며, 악한 존재로서의 타자를 만들어 그 반대 항에 자신들을 위치 짓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나’(태국)와 다른 그 타자는 가장 지척에 살고 있었다. 온갖 부정한 오명을 뒤집어쓴 악의 화신이자 적(敵)으로서 나와 대립쌍을 이루고 있는 이름하야 ‘미얀마’라는 존재였다. 그들은 옛 수도를 침공한 침략자이자 정복자였으며, 국경지대에서 끊임없이 분란과 반란을 조장하는 골치 아픈 존재들이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태국과 달리 군부 독재와 위험한 사회주의로 얼룩진 국가였으며, 대륙부 동남아 일대 마약의 대다수를 생산하는 마약 공급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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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태국의 지도. 화질이 좋진 않으나 위 지도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는 태국 그 위에는 미얀마인데, 태국은 천사의 이미지가 미얀마는 악마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위 지도는 태국이 미얀마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지도이다.  

 

나와 다른 타자, 아니 적은 내부에도 있었다. 이들은 변경 지역에 주로 집단 형태로 정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태국 북부에서는 그들이 주로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기에 고산족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미얀마에서 왔거나 미얀마와 연관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문명화된 나, 즉 태국인과는 사뭇 다른 사람들로서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었다. 자비롭고 자애로운 태국 왕실과 정부는 고산족이 같은 영토 안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같은 태국인이 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면에서 나와 달랐다. 언어가 달랐고, 문화와 풍습이 달랐다. 생김새도 달랐고 무엇보다도 나보다 열등해 보였다. 나와 완전히 동일시하기에는 훈육과 교도가 필요한 대상이었다.  

 

1980년대 후반 ‘찻차이 춘하완’(Chatichai Choonhavan) (태국) 총리 이후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전장에서 시장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시장 지향적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다양한 종류의 적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이들이 이주노동자인지, 고산족인지, 버마인인지 혼동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로서 미얀마에서 산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더니 이들에게 여러 종류의 신분증을 발급했다. 다행히 나와 완전히 같은 신분의 증명서는 아니었다. 이들은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요주의 인물들이었다. 그래도 가끔 사고가 터졌다. 

 

관광객들을 죽이고, 누군가를 강간했으며, 도둑질을 일삼고 돈이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했다. 이들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는 소문 또한 들려왔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건 순전히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지 이들이 절대 좋아서는 아니다. 

 

나는 그들이 카친족이건, 카렌족이건, 버마족이건 관심 없다. 그들은 나와 다른 가난하고 불결하며 게으르고 문명화되지 않은 오염된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이방인이라 부른다. 나와 같은 온전한 태국인이 될 수 없는 이방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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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나’라는 태국인 화자를 등장 시켜 태국과 미얀마의 관계와 태국인들의 미얀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에세이식 글쓰기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전히 태국인들의 미얀마와 미얀마 출신 인구에 관한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 단어들로 가득 차 있다. 

 

인류학자인 필자는 태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얀마 출신 이주민들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학생들의 답변 중 상당수에는 그들에 대한 공포와 편견이 담겨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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