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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태국에서 100년 전 포르투갈이 보였다

 

태국 시위.png

2020년 2월 촉발된 태국 민주화 운동.

 

군사쿠데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염증을 느낀 국민들, 기회를 틈탄 헌법 개정 시도, 국민투표 후 개헌 성공, 반정부 인사에 대한 구금과 고문 그리고 의문사.

 

위의 5개 어구는 1세기 전인 1926년 혜성처럼 등장해 재무장관을 거치고 1932년 총리가 된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이하 살라자르)의 집권 과정을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경제학자였던 살라자르는 1926년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에 발탁되어 재무장관으로 취임(1928)한 후 세계 대공황 속 포르투갈 경제를 부흥시키며 국민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취임 후 단 1년 만에 국가 예산을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군사 정권의 신임과 국민의 인기를 등에 업고 1932년 총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총리 취임 1년 만에 다소 무리해 보이는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

 

노조 활동 금지, 사회활동에 대한 국가의 관리 등 납득하기 힘든 개헌안의 주요 내용에도 불구하고 국민 과반 이상의 찬성과 절반 가까운 기권으로 개헌은 성공했다. 당시 국민들은 20여 년 간 계속된 정쟁으로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살라자르는 이 상황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개헌에 성공한 후 30년을 훌쩍 넘는 집권기 내내 3F(Futebol(축구), Fatima(성녀 파티마, 즉 종교), Fado(음악 ‘파두’, 즉 예술))로 대표되는 우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살라자르1.JPG

 

“교육”

 

우매한 국민을 다스리는 ‘철인’ 정치인이 되기를 바랐던 그는 정치에 진절머리를 느낀 국민들을 계속해서 우민화하는 한편,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정부에 저항하는 정치범은 비밀경찰을 동원해 외딴 섬에 위치한 감옥에 구금해 고문하거나 죽였다. 

 

오랜 기간 태국 사회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최근 몇 년 동안 태국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향후 어떠한 역사적 장면이 연출될지 예단할 순 없지만, 그 과정은 흡사 약 100년 전 포르투갈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나는 왜 태국을 보며 100년 전의 포르투갈을 떠올렸을까.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2020년 초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태국 민주주의 시위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봐야한다. 

 

 

현 태국 정권,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다

 

태국 민주화 시위의 배경을 말하기 위해선 최소 2014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4년 태국의 총리는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이었다. 그녀는 친오빠인 탁씬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의 포괄적 사면을 추진했고, 반대 진영의 반발로 퇴진 압박을 받았다. 그러던 중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 혐의 등에 연루되어 헌법재판소 판결까지 받게 되었다. 결국 실각했다.

 

그로부터 15일 후, 총리가 실각된 어지러운 정국에서 태국 육군 총사령관 쁘라윳 짠오차(Prayut Chan-o-cha)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국왕의 공식 승인을 거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태국에서 왕실의 지위는 상상 이상이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도 국왕이 최종적으로 승인을 하지 않으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쁘라윳은 정치적 안정 회복 이후 선거를 통한 정권 이양을 약속했다. 물론 약속된 기간이 돼도 정치적 불안정 등을 이유로 선거 연기를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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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씬과 잉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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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윳(현 총리)과 라마 9세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가져온 입헌혁명(1932년) 이후 총 21번의 쿠데타 시도, 그 중 13번의 쿠데타 성공을 경험한 태국 국민들은 ‘쿠데타-선거-쿠데타-선거’ 패턴의 반복으로 인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세기가 바뀌어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2006년의 쿠데타와 이후 레드 셔츠옐로우 셔츠로 대표되는 양 진영 간 정쟁으로 인해 상당수의 국민들이 정치에 혐오를 느끼거나 무관심해진 상황이었다. 

 

한편, 21세기 이후 (민주적으로) 선거만 치르면 친탁씬 진영이 승리하는 형국이 반복되면서 왕실과 왕당파, 군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비관적 전망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2014년 쿠데타는 국왕의 승인 하에 성공하였다. 

 

(21세기 태국 정치는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의 갈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친탁신 진영은 프아타이당을 위시로 한 범탁신계 정당 및 레드셔츠이며, 반탁신 진영은 군부 및 군부계 정당, 민주당, 그리고 옐로셔츠가 속해 있다. 탁신 친나왓은 왕실의 간섭을 줄이고 영국이나 일본처럼 왕실이 정치적 권력을 전혀 갖지 않는 순수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려 했기에 국왕과는 불편한 관계였다)

 

 

군부, 개헌으로 장기적 정권 연장의 틀을 마련하다

 

군부 정권의 다음 플랜은 헌법 개정을 통한 안정적인 정권 장악이었다. 모범(?) 사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의회 의석 25%를 군부가 지정하도록 정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합법화한 2008년 미얀마 헌법이었다. 

 

태국 군부도 정권 연장과 안정적 지위 확보를 합법화하기 위해 고심하면서 개헌 카드를 꺼내 들었다. 쿠데타와 선거 패턴의 반복에 지친 국민들을 달래며 2016년 8월 7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 61%의 찬성을 얻어 20번째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2017년 4월, 와치라롱껀(Vajiralongkorn) 현 국왕이 인준함으로써 신헌법이 공포되었다. 

 

현 국왕.jpg

와치라롱껀(Vajiralongkorn) 현 국왕 (라마 10세)

 

신헌법에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상원의원 250명을 군부가 임명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개정된 헌법에 의하면 총리는 상원(250명)과 하원(500명)을 합쳐 750명의 투표로 선출되는데, 상원 250명을 군부가 임명할 수 있게 되면서 하원 500석 중 126석만 확보해도 군부 정권의 집권 연장이 가능해졌다. 

 

다른 중요 내용으로는 군 출신 인사의 총리 선출 가능성을 개방한 것, 국가 비상상태 발생 시에 군 수뇌부가 주축이 된 위기관리위원회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있다. 

 

 

쿠데타 후 첫 선거에서 군부를 택한 국민들, 왜?

 

개헌 이후에도 선거는 계속 연기되었다. ‘선거-쿠데타-선거-쿠데타’ 패턴의 반복에 더해, 이젠 선거 지연에 대한 피로감 및 선거 실시에 대한 의구심까지 더해졌다. 결국 선거는 쿠데타 이후 5년 후, 신헌법 공포 이후 2년 후인 2019년 3월 실시되었다. 

 

그런데 선거 하루 전, 국왕은 갑작스런 성명 발표를 하여 ‘좋은 사람을 지지하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던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쿠데타를 승인한 국왕이 지지하라는 것이 군부의 지지를 받는 팔랑쁘라차랏당(Palang Pracharat Party)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분히 국왕의 정치 개입으로 읽힐 수 있는 이 성명 발표 덕분(?)인지, 선거 결과는 이랬다.

 

-팔랑쁘라차랏당 (군부 지지): 116석 

-프어타이당 (친탁신계 정당): 136석  

-민주당 (기존 거대 양당의 한 축이자 반탁신 계열의 중심이었음): 53석 

-아나콧마이당 (친탁신과 반탁신 구도에 지친 국민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신생 정당): 80석

-이 외에 군소정당들 (태국은 의회에 입성한 군소정당이 엄청 많다)

 

태국 하원현황.JPG

 

팔랑쁘라차랏당의 승리였다. 앞서 말했듯 군부는 신헌법으로 인해 하원에서 126석만 얻어도 안정적 집권 연장이 가능한 상황. 팔랑쁘라차랏당이 단독으로 116석을 얻었으니 친군부 성향의 군소정당과 연정만 해도 126석은 가볍게 넘는 상황이다. 

 

2019년 총선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①군부 중심의 팔랑쁘라차랏당과 친군부 세력의 연정 구성과 그로 인한 군부 통치의 제도화 및 합법화

②친탁씬 계열의 패배

③거대 양당의 한 축이자 반탁씬 계열의 수장이었던 민주당의 참패

④신생 정당 아나콧마이당과 정당 대표 ‘타나턴 쯩룽르엉낏’의 부상

 

이런 선거 결과가 나온 이유로는 ‘선거-쿠데타-선거-쿠데타’ 패턴의 연속으로 정치에 지치고 무감각해진 국민들이 불안 대신 군부가 주축이 되더라도 정권의 ‘안정’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안정이 ‘누구를 위한 안정’이 될 것이냐이다. 

 

 

태국인들 세 손가락을 들기 시작하다

 

우려는 오래지 않아 가시화되었다. 선거 후, 국왕의 승인을 거쳐 출범한 쁘아윳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악수를 둔다. 군부 세력은 아나콧마이당에 정당해산 심판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2020년 2월 헌재에선 해산 명령을 선고했다.

 

아나콧마이당은 신생 정당으로 군부 중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기존 태국 정치에 지친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집권 이후 군부는 이를 위험으로 인식하였고, 총선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보복을 했다.

 

그럼에도 2019년 말, 여론조사에서 아나콧마이당이 정당 지지도 1위를 차지하고, 당 대표 ‘타나턴’이 차기 총리 선호도 1위를 차지했다. 이에 군부의 공격이 명분없는 정당 해산까지 이어지며 곪아있던 불만을 톡! 터뜨리자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세손가락을 폈다.

 

태국 세손가락.jpg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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