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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JPG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 사진

 

1991년 1월 18일 이라크에서 7발의 스커드 미사일이 이스라엘로 발사됐다. 

 

미사일의 전과는 별로 크지 않았다. 7발 중 3발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에, 4발 중 1발은 하이파에, 1발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 떨어졌다. 하이파는 이스라엘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 하이파항구로 유명했다. 텔아비브 역시 수도를 노린 공격이었다. 

 

텔아비브에 떨어진 미사일은 외곽 달동네에 떨어졌고, 직접적인 인명피해는 없어보였다. 이 공격으로 3명의 할머니가 사망했는데, 미사일로 인한 직접 피해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커드 미사일에 화학 탄두가 달려 있는 줄 알고, 가스 마스크를 썼다가 가스 마스크 뚜껑을 열지 않아서 질식사 했다. 

 

이 별거 아닌 미사일에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이 발칵 뒤집혀졌다. 후세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유는 뻔했다. 이스라엘을 전쟁에 끌어들여 전쟁 구도를 ‘아랍 대 이스라엘’로 끌고 가고, 다국적군에 참여한 아랍 군들을 와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전화통을 붙잡고 이스라엘을 설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못하는 게 있다면 말하시오 무엇이든 해 주겠소!”

 

만약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 뛰어든다면 걸프전은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거 같았다. 원래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눈에 티끌 하나만 들어가면, 상대 눈을 뽑아버리는 식으로 나라를 지켜왔던 나라이다. 이들은 당장 보복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당시 이스라엘 각료회의에서 국방장관은 대놓고 후세인 대통령에 대한 참수작전을 언급 했고, 총리 샤미르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게, 당신들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우리도 참여하겠다. 정 안 된다면 몇 시간만이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요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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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미르와 ‘아버지’ 부시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탄도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이스라엘은 비공식적인 핵보유국이고, 이 탄도 미사일에는 ‘핵’이 탑재 돼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의도는 뻔했다(제리코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거였다).

 

“우리는 핵 공격도 염두에 두고 있다.”

 

다급했던 미국은 이스라엘을 달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당장 패트리어트 미사일 부대를 증파했고, 이스라엘이 그 동안 요청했던 F-15 추가 구매도 바로 수락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을 달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썼다. 

 

1차 걸프전 내내 39발의 스커드 미사일이 이스라엘로 날아왔고, 수백명의 이스라엘 국민들의 죽거나 다쳤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외신들에겐 이스라엘이 언제까지 이라크의 공격을 참을 것인지, 언제 보복 공격을 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당시 미군 지휘관들은 CNN에 대해 저주와 같은 욕설들을 퍼부었다. CNN의 생중계가 스커드에 대한 공포감. 즉, 심리병기로서의 효과를 극대화 해줬고, 이들의 방송이 이라크군에게 탄착점을 알려준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각종 추측과 논란은 이라크의 5번째 스커드 공격 이후에 결론이 났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부 대변인은 방송에 나와 국방부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전했다.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함정이 말려들어 보복공격을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참았고, 걸프전은 무난히 끝이 났다.

 

 

1. 

2003년 3월 중순 아들 부시가 ‘제2차 걸프전’을 일으킬 거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던 그때 이스라엘의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1차 걸프전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또다시 목표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이스라엘 국민들은 자구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방독면을 챙겼고, 텔아비브를 빠져 나온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덕에 제2차 걸프전 개전 전후로 예루살렘의 숙박업소는 때 아닌 호황을 누려야 했다.

 

텔아비브는 공격을 해도 예루살렘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이스라엘 국민들의 판단이었다. 이스라엘은 2차 걸프전 때에도 그렇게 스커드에 대한 걱정을 해야 했다.

 

충격과 공포.jpg

미국은 이라크를 결국 공격했다. 사진은 2003년 3월 21일, 미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이라크 대통령 궁의 모습. 작전명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2.

이스라엘은 경상도보다 약간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촘촘한 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한 나라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미군과 이스라엘군은 합동으로 미사일 방어 훈련을 한다. 실제로 미국 방산업체와 이스라엘 방산업체들끼는 요격미사일 데이터를 서로 공유하며 공동 개발을 하는 상황이다. 매년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방위지원금을 생각한다면, 미국이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망을 만들어주고, 그 운영비용까지 건넨다고 봐도 될 거다)

 

언론에 나오는 아이언 돔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언 돔 밖에 없는 줄 아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하늘을 방어할 미사일 개발에 집착 했었다. 

 

이런 집착과 염원은 1, 2차 걸프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제3차 중동전 때 아랍 국가들을 6일 만에 쓸어버린 이스라엘이었지만, 4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개전 이틀 만에 이스라엘에서는 핵 공격 옵션을 만지작거릴 정도였다. 이 와중에 이집트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 시리아의 프로그 로켓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탄도 미사일, 로켓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중동에서의 탄도미사일은 ‘생필품’같다는 느낌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들은 초반 국경에서의 밀고 밀리는 열전 뒤에는 서로의 도시를 향해 스커드 미사일들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 재미를 본 게 북한이다. 북한은 4차 중동전 이후 이집트로부터 넘겨받은 스커드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다음 ‘데드카피판’을 만들어서 중동의 여러 나라에 팔았다. 돈 많은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제 동풍 미사일을 샀다)

 

 

3.

이라크가 무너진 지금 이스라엘의 가상적국은 이란이다. 문제는 이란은 핵을 개발하고 있고, 덩달아 탄도 미사일도 보유하고 있다는 거다. 이집트의 샤하브-3(Shahab-3) 미사일은 사거리가 2,000km로 이스라엘 전역을 넉넉하게 타격범위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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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하브-3 미사일 사거리

 

(이란의 미사일 기술의 뿌리는 북한이다. 이럴 때보면 한민족의 손재주와 ‘빨리빨리’에 대한 집착을 확인할 수 있는데, 4차 중동전(1973) 당시 이집트로부터 넘겨받은 스커드를 분해해서 곧바로 중동에 미사일을 팔아먹다니...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은 남한에서도 군사물자를 수입하고, 북한에서도 스커드와 같은 미사일을 수입해 갔으니 한반도의 두 국가는 이란에게는 형제국가가 아닐까? 하긴, 테헤란로와 서울로가 있는 사이이니. 어쨌든 샤하브-3는 북한의 노동 미사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란이 쏘아올린 인공위성 발사체. 즉, 샤프리 로켓도 북한의 광명성 4호 로켓 기술이 섞여 들어갔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해 악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거다) 

 

이란이 ‘커다란’ 미사일을 들고 날린다면, 위아래에는 더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툭하면 단거리 미사일과 로켓, 박격포 등을 쏘아 올리는 거다. 한 마디로 탄도탄부터 시작해, 단거리 미사일, 로켓, 박격포까지 수많은 ‘돌팔매질’에 직면한 것이 이스라엘이란 거다. 

 

지난 4번에 걸친 중동전과 레바논 분쟁처럼, 수틀리면 탱크를 몰고 치고 들어가서 해결하면 좋겠지만 국제사회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 더구나 하마스와 헤즈볼라 같은 경우에는 게릴라처럼 치고 빠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해법을 찾아야 했다. 

 

“적이 날린 미사일을 우리 미사일로 막아낸다.”

 

미국의 MD 체계가 약간은 ‘과시적인’ 느낌이 든다면,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 체계는 절박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1차 걸프전 당시 밤마다 수 십 발의 스커드가 떨어지던 공포는 2차 걸프전 직전 이스라엘에 있던 학교들의 출석률이 40%에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의 국민들은 남다른 애국심과 시오니즘을 생각할 수 있는데,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에도 잘 나와 있지만, 레바논 분쟁에 개입한 이후 이스라엘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3~4차 중동전을 겪은 세대들은 자식들의 군 입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국가를 위한 당연한 복무라고 생각하지만, 레바논 분쟁에 개입한 세대들을 중심으로 그 자식들에게는 군 복무를 면탈하거나 회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군 복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군역 회피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서 이스라엘 군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1차 걸프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가를 위해 전장에 나가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2차 걸프전 때는 미사일을 피해서 예루살렘으로 몰려간 게 현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사일 방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스라엘은 미사일과 로켓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리고 1차 걸프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로켓과 박격포탄이 수시로 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걸 막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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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가 발사한 로켓포를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 '아이언 돔(Iron Dome)'의 요격 미사일이 막아내는 모습. 이스라엘군은 "90% 이상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고 밝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