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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요약

 

코로나로 거리상의 시위는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작년 초부터 일어난 태국의 민주화 운동은 현재 진행 중이다. 아세안 국가 중 미얀마보다 먼저 세 손가락을 치켜올렸던 곳이 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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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France24>

 

그렇다면 태국에선 왜 이런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나.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최소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1세기 태국 정치는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의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2014년엔 ‘잉락 친나왓’이 총리였다.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이다. 그런데 이 잉락이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 혐의 등에 연루되어 탄핵을 당한다. 

 

15일 후,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육군 총사령관 ‘쁘라윳 짠오차’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했다. (쁘라윳은 태국의 현 총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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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윳 짠오차. 태국의 현 총리.

 

한 가지 알아둬야 할 점은 태국의 입헌군주제는 다른 나라의 입헌군주제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왕이 상징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쿠데타가 일어났어도 최종적으로 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그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은 2014년 쿠데타를 승인한다. 그렇게 군부는 정권을 장악했다. 다음 목표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정권 장악이었다. 군부는 안정적으로 군부의 기득권이 마련되어 있는 미얀마의 제도를 본받아(?) 개헌작업에 착수했다. 1932년부터 총 21번이나 일어난 쿠데타와 이어지는 선거에 지친 국민들을 달래며, 개헌을 완료했다.

 

태국에서 군부는 막강한 제도적 권력을 손에 넣었다. 쿠데타 이후 첫 총선은 5년이나 지나 2019년에 실시되었다. 군부 정당(팔랑쁘라차랏당)의 승리였다.

 

(국왕이 쿠데타를 왜 승인했는지, 태국 국민은 왜 총선에서 군부 정당을 선택했는지 더욱 자세한 내용은 1편 링크

 

 

왜 태국인들은 세 손가락을 들기 시작했나

 

총선 후, 국왕의 승인을 거쳐 새롭게 내각을 꾸린 군부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악수를 둔다. 아나콧마이당에 정당해산 심판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2020년 2월 해산 명령을 선고했다.

 

아나콧마이당은 신생 정당으로 군부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친탁신 VS 반탁신’ 구도에 지친 국민들의 대안으로 떠오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에 군부는 아나콧마이당과 대표 ‘타나턴 쯩룽르엉낏’을 위험 세력으로 인식하여, 타나턴의 하원의원직을 박탈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정치보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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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턴 쯩룽르엉낏

 

(타나턴은 헌법재판소 판결로 2019년 11월 의원직을 잃었다. 명목상의 이유는 선거법 위반이지만, 사실상 정치적 탄압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2019년 말 여론조사에서 타나턴이 차기 총리 선호도 1위를, 아나콧마이당이 정당 지지도 1위(31.42%)를 차지하였다. 아나콧마이당이 무서운 기세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기세가 꺾일 줄 모르자, 군부는 정당해산 심판 청구 소송까지 했고, 앞서 말한대로 해산이 명령되었다.  

 

유력 정치인의 의원 자격 상실에 이어 군부 정권의 공격이 명분 없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대안 정당의) 정당 해산까지 이어지자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세 손가락을 폈다. 아나콧마이당에 관한 것 외에도 국민들은 2014년부터 집권해 온 현 정권과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치러졌던 선거에 대해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다. 

 

아나콧마이당의 해체로 거리에 나온 국민들의 요구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하에서 선출된 권력에 의한 국가 통치 열망으로 승화되었다. 그렇게 태국은 과거의 사례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태국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1차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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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콧마이당의 해산 명령이 내려진 다음 날 탐마쌋, 쭐라룽껀, 까쎄쌋, 씨나카린위롯 등 방콕 소재 대학의 대학생들과 일부 고등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곧이어 코로나로 인해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대학과 중고등학교가 휴교했고, 시위도 중단되었다. 

 

뭔가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코로나라는 명분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연기했다. 하지만 시위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리 위에서 제약이 생긴 시위의 물결은 트위터, 페이스북, 틱톡, 인스타그램 등 SNS와 온라인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의회 해산, 헌법 개정, 국민에 대한 탄압 중단” 

 

몇 달이 지나 7월 18일. 지속된 연기로 아직도 비상사태 중인 상황. 2차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장소는 방콕의 민주주의 기념탑이었다.  

 

약 2,500여 명이 모인 이 시위에는 ‘Free Youth(자유 청년)’라는 청년 조직이 등장하였다. 앞서 이번 시위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다. 몇 가지 분명히 다른 점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기존 민주화 관련 시위는 탁신의 지지자들인 ‘레드 셔츠’가 시위를 주도했는데, 이번 시위는 ‘Free Youth’가 주축이 되어 각 지역 학생 연합들이 이끌고 있다. 이번 시위의 주도층은 젊은 세대이다. 현재 미얀마의 시위와도 비슷한 부분이다.

 

정부는 계속해서 지도부들을 체포하여 시위를 막으려 했지만, 이들은 ‘우리 모두가 지도부이다’라고 하며 모두가 주체가 되어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7월 19일 치앙마이(북부)와 우본랏차타니(동북부)의 시민들까지 합세했다. 며칠 뒤엔 20개 이상의 지방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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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화선이 터지며, 더욱 다양한 요구로 시위가 확대되다

 

2차 시위의 물결이 일던 중 민심을 더욱 열 받게 할 도화선이 터졌다. 

 

세계적인 스포츠음료 기업인 ‘레드불’의 재벌 3세 ‘오라윳 유위타야’(Vorayuth Yoovidhya) 의 유전무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2012년 9월 오라윳이 시속 177km로 과속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 중이던 경찰관을 차로 치어 사망하게 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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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약물 복용 의혹, 뺑소니, 속도위반 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된 수사도 하지 않다가 8년 만에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민심은 폭발했다.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이 결정은 태국 국민들의 감정선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무너진 사회적 공정에 대한 분노를 시작으로, 경제난(코로나 사태 등, -10% 성장률), 인권 침해(LGBT, 두발 제한 등 권위주의적 교육 지침), 반정부 활동가의 납치 사건 등에도 분노의 불길이 옮겨붙었다. 여러 불만들이 중첩되면서 거리를 점령하는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쎄리 타이’라는 이름으로 LGBT 연합(성소수자 단체)도 가세하였고, 시위대는 일본 애니메이션 ‘톳토코 햄타로’의 주제가 가사를 개사해 ‘뛰어, 햄타로’라는 노래를 불러 외쳤다. 국민의 세금만 먹는 현 정부와 의회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국민들은 햄타로가 쳇바퀴를 돌 듯 민주주의 기념탑을 돌면서 ‘뛰어, 햄타로’를 부르며 정부를 비판했다. 시위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번 시위에서 과거와 다른 또 다른 점으로 역사상 최초로 왕실에 대한 공개 비판이 나왔다는 것이다(8월 3일). 탐마쌋 대학교 랑씻 캠퍼스에서는 “탐마쌋-짜-마이-톤”(탐마쌋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이라는 이름의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왕실 개혁에 대한 10대 요구 선언과 함께 “우리는 개혁이 아닌 혁명을 원한다”라는 슬로건도 등장하였다(8월 10일). 

 

 

무섭게 퍼져가는 시위 그리고 코로나

 

시위는 멈출 줄 모르며 전국 49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8월 14일). 이에 맞서 친정부 단체도 11개 지방에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8월 16일 시위는 2만~2만 5천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개혁을 요구를 주축으로 하는 중고생, 빈민 단체 등도 가세했다. 

 

9월 19일, 쿠데타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방콕에서 이틀간 열렸다. 경찰 추산 2만 5천 명, 주최 측 추산 10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각 지방에서 합류한 대규모 시위대도 가세하였으며 투입된 경찰 병력도 최대 규모였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태국은 국민의 것”이라는 명판을 설치하였으나 이틀 뒤 누군가에 의해 명판이 제거되었다. 시위대는 명판의 제거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명판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0월 14일 1973년 학생 혁명(태국 역사상 첫 대규모 시위였다)을 기념해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우파 단체들을 주축으로 친정부 세력은 맞불 집회를 열었다. 시위대는 지속적으로 총리 퇴진과 왕실 개혁 등을 요구했다. 이에 태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이유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많은 집단의 사람들이 방콕 시내 불법 집회에 참석했으며 왕실 차량 행렬을 방해하고 국가 안보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행위를 했다.”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종식하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긴급 조처가 필요했다.”  

 

시위대는 멈추지 않았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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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감염자 증가 등으로 인해 이전의 시위만큼 대규모 집회는 열리지 않고 있다. 한편 정부는 긴급 명령을 통한 형사 고발, 임의 구금, 경찰력을 동원한 위협, 언론 검열 및 통제, 친정부/애국 단체 동원 및 그들을 통한 회유, 왕실모독죄 적용 및 기소 등을 통하여 대응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현재까지 6명의 반정부 인사가 실종되었고 적어도 39명 이상이 왕실모독죄가 적용되어 기소되었으며, 732명이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이미 말했듯 태국에서 왕실의 지위는 상상 이상이다. 감히 태국 왕실을 비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공개 비판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것이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번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왔다. 어떻게 왕실 비판이 나올 수 있었고, 왜 비판을 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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