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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가격

2010-04-0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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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추천0 비추천0

2010.04.07.수요일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1. 그들과 우리


 


군 생활이 조금 편해질 만 했던 무렵, 친하게 지내던(아직 친하게 지낸다)후임 하나와 막사 앞 벤치에 앉았다. 녀석은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를 그 즈음 다시 피기 시작해 연신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평생 담배라곤 한 대도 피우지 않은 나는 포도쥬스를 홀짝이고 있었다.


 


 '야, 일본 자위대는 이라크서 죽으면 보상금 빵빵하더라?'


 


 '그렇습니까?'


 


우리 부대는 흔히 말하는 '말입니다'체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말투가 살짝 사회인 비스무리하긴 했지만. 난 특히 그런거 거의 신경 안쓰는 선임이기도 했고.


 


 '어. 얼마전에 봤는데, 보자, 환율이… 됐다 그냥 열배라고 생각하고, 지금 6억인걸 3억 더 얹어서 9억으로 해준데'


 


 '9억?'


 


 '응. 9천만엔. 근데, 여기에 내각 총리대신 특별보상금이 최대 1억(1천만엔)이 붙거든? 걔들이 딴건 몰라도 이런데 돈 아낄 넘들은 아니니까, 맥시멈 주겠지. 그럼 다 합쳐서 1억엔이니까… 10억은 충분히 넘네'


 



두둥~ 이 안엔 10억 짜리들이 타고 있지.


 


http://www2.asahi.com/special/iraqrecovery/TKY200310250333.html


(상향조정의 이유에 대해 당시 방위청 관계자는 <정치적 외교적 판단으로 비전투지역이라고는 하나 위험지역에 파견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처우를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 말을 들은 후임 녀석은 깊게 빨았던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조용히 말했다.


 


 '씨바, 현해탄 이쪽에서 태어난 거랑 저쪽에서 태어난 거 가지고 목숨값 되게 차이나네'.


 



2. 그리고 그


 


전역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침, 일직을 서고 피곤해 돌아가실거 같은 몸을 가누며 멍하게 티비를 보고 있는데, 일직실에 그 후임녀석이 들어왔다.


 


배고플테니 아침에 이거나 처먹으라고 나 좋아하는 스니커즈랑 과자 몇 개를 사 온거였다. 짬으로 시킨 일이 아니라 녀석이 좋아서 가져온 거니 감사할 밖에. 그래서 짬 염치 불구하고 넙죽 받아 먹으려고 하는데, 녀석이 티비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티비를 돌아보니 뉴스 캐스터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희생된 하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저 친구… 제 훈련소 동깁니다'


 


 '누구? 저 사람? 하사라는데?'


 


 '일계급 특진 된 겁니다'


 


 '그래? 병장이었어?'


 


 그리고 우리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 새끼… '


 


녀석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독백을 남기고, 대충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일직실을 나섰다. 녀석과 동기였다면,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93891.html
<한명숙 당시 총리께서 조문을 가신 사진도 남아있다>


 


그 날 오후, 녀석은 다시 막사 앞에서 줄담배를 피워댔고, 나는 포도쥬스도 없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3. 성금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view.html?cateid=1068&newsid=20100406155024206&p=khan



천안함의 실종자 가족들에게 지급할 보상금이 적은데, 법이 그래서 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사병들의 월금에서 원천징수를 하던 성금 형식이던(거부할 놈 잘도 있겠다) 걷고, 국민성금을 모으자고 한다. 강을 파기 위해서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법도 만들고 예산도 편성할 수 있어도, 나라를 위해 자기 자리를 지키다 희생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법개정에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언제 개정이 될까. 아프간에 증파한다며. 증파된 병력들 중에서 희생자 나오면 그때 검토 시작할 셈인가.


 


내 기억이 만약 정확하다면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법을 만드는 기관은 국회고, 그 말은 국회의원이 발안해서 동의하면 법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즉 그 '법을 만들 권한'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장병들에 대한 보상금 상향조정하는 법률 만들겠다는데 반대할 국민이 어디 있고 반대할 국회의원은 또 어디에 있나. 무슨 시간이 어떻게 걸리나.


 


법을 만들어도 편성할 예산이 없다는 말은 차마 하지 않겠지. 4대강 예산이 얼마 규모더라?


 


그래, 이건 국회의 고유 권한이니 군이 입을 댈 수 없어 저런 두리뭉실한 발언을 한 거라 치자. 사병 월급이야기를 지절대는 건 도대체 무슨 염치인가.


 


함의 구조가 어떻고 원래 주어진 임무가 어떻고 하는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결과를 한 번 보자. 장교는 살고 하사관과 사병은 희생됐다. 군이 만약 정상적인 수준의 염치를 가지고 있다면 '위관급과 영관급, 그리고 장성의 월급에서' 모금을 한다고 해야하지 않나? 너희는 직업 군인이니 이걸로 가족을 먹여야 하고, 그러니 한 푼도 낼 수 없다. 사병 월급이야 원래 PX에서 냉동 먹으라고 있는 거니 이번 달 과자 좀 덜 먹으면 되지 않냐는 발상인가.


 



찾아봐라. 간이 어딨는지.



군의 명령체계가 유지되는 것은 '충성심'에 기반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도 그렇지만, 나를 지휘하는 지휘관이 '중요한 순간에 합당한 판단을 할 것이고, 만약의 경우 내 대신 책임을 져 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를 따라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냥 예비역 병장이지만 '전쟁이 나면 내 후임들이 나를 먼저 쏘는 일이 없도록'하는 것이 선임의 최소한의 도리이고 '내가 대신 책임 져 줄 테니 내 명령에 따르고 나를 믿어라'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한 군인이라 생각하며 2년을 살았다. 근데 그건 병사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원리였나 보다.


 


이제 군에 신병이 들어오면 이렇게 교육하면 되겠다.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라. 뭐, 그러다 죽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살아남은 니 동료들 월급에서 십시일반 모아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마'.


 


좋은 군대의 표본이군.


 



4. 목숨의 가격


 


죽은 자에게 돈이 필요할리 없다. 위로금과 보상금은 가족에게 지급되는 것이며, 이것은 국가가 당연히 가족의 품에 있어야 했고 가족들 사이에서 인간답게 생을 마감할 권리를 가졌던 개인의 인생을 '국가의 이름으로 가져다 쓴' 댓가이다. 그들은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주는 가운데, 지금이 아닌 어느 시점에서 편안히 생을 마감할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삶을 '국가를 위하여'라는 명목 아래 가져다 썼다면, 최소한 멀쩡히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줬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가족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이것으로 보상이 될 리 만무하지만, 최소한의 성의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부끄러워 하며 드려야 하는 것이 보상금 아닌가.


 


그런데 그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정말 마지막 염치마저 이렇게 말장난으로 벗어나 볼 심산인 걸까.


 


그들이 그 곳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어둡고 무서웠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를 생각할 인간적인 감성 따위 저들에게 바라면 내가 병신인 거겠지. 이 판에 전쟁을 벌이자는 비루한 자들이 넘치는 나라에서.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쓰고 세상을 산다면 최소한의 염치와 예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아직 이런 걸 기대하는 내가 정말 어리석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