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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4.수요일


미쉬파트


 


 


 


안녕하세요, 미쉬파트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좀 바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거의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버렸네요. 원고마감시간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생각했던 일련의 연재를 마치려면 아직 몇개의 꼭지를 더 써야 하는데 중간에 쓰다 말아버려서 그동안 (저 혼자만) 찜찜했습니다. 행여라도 다음 글을 기다리셨던 분이 있으셨다면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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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지난 번에 말씀드린대로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의 정치적 우경화에 대한 부분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시작하기전에 한계와 범위를 일단 설정하고 갔으면 좋겠군요. 우선, 이 부분은 미국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에게 있어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육 등 거의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입니다. 종교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개신교에 있어 미국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한국선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제시대를 지나 광복이후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민주화운동 시대를 거치면서 내내 미국교회와 신학은 한국교회에 계속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우경화 이야기를 하려면 미국과의 문제를 반드시 언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교회와 신학이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미친 영향은 다음 번 이야기로 미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번 글은 신학적인 부분에서의 접근보다는 한국교회의 현상적인 부분에서의 문제를 다루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더 언급하겠습니다만 한국 개신교는 매우 정치적이고(그것도 파시즘에 가까운 보수주의) 현실 중심적인 교회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교회관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차이를 중심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글은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적 모습(정치적 우경화)과 성경 속에 나타난 교회관과의 차이점을 다루고 그 문제 및 원인을 확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따라서 미국 이야기가 조금은 언급되겠습니다만 신학 및 교회론적 관계는 다음 시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1. 한국개신교회의 [정치적] 모습


 


얼마전이 부활절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게 문자가 몇 개 왔습니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내용인즉, [부활의 영광과 생명이 함께 하시길...]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발신자가 한나라당 도의원 예비후보(저는 경기도에 삽니다)더군요. 비슷한 것으로 기초단체장 예비후보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알고 보냈더군요.


 


또 작년 부활절때는 지역교회들이 연합해서 한 곳에서 모여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하게 되었는데 예배가 끝나고 광고시간에 시장, 지역기초 단체장, 지역구 국회위원 등이 줄줄이 나와 축사(?)를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다들 기독교인이 아닌데 원고 내용은 매우 기독교적이었습니다.(아마 비서진들이 써 주었겠지요) 이런 일들이 교회 내에서는 이제 매우 일상적인 일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잘 아는 내용도 있습니다. 지난 대선때 가카를 찍지않으면 내가 직접 생명책에서 이름 파버리겠다고 협박(?)했던 목사의 에피소드는 교계 내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분


 


특히 대선직전에 이런 일들이 많았는데 당시 유별나게 설교시간에 가카 지지투표를 격려했던 목사들은 교계 내에서도 매우 정치색이 강한 사람들로 평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답대신 당시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 인수위원회 쪽에서 일을 맡은 사람들 중 목사들도 여럿이 있었다는 말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대선직전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카를 향한 충성을 외치는 목사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이런 퍼포먼스를 통해서(그래서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눈도장을 찍어 한자리 해 보려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자는 이미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본인의 신념에 따른 사람들인데 어떤 의미로는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서운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한 티비 시사프로그램에서 목회자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들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시작으로 언론 광고를 통해 항의를 하고 심지어는 방송국까지 쳐들어가 폭력행사까지 했던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때 교회들이 보여 준 반응은 제가 보기에는 매우 정치적인 행동들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교회 관련 대형 비리가 터질 때마다 관련 교회들은 자숙과 반성보다는 변명과 물타기 등 매우 익숙한 정치적 행동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사학법 개정 때나 다빈치 코드 상영 때에도 보면 교회들이 똘똘뭉쳐(이럴 때에는 정말 교회들이 단합이 잘 됩니다) 이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만 터지면 교회들이 시청광장 같은데 모여 깃발 흔들며 단체 행동 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지요.


 



 


현재 한국개신교회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는 [정치적]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이미 익숙해 있는 교인들에게는 문제점이 잘 인식이 되지 않겠지만 실은 이는 매우 비성경적인 단어입니다. 교회는 사실 (현실)정치에 관여하거나 거기에 관련되어서는 안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것이 나타나서는 안되는 교회가 오히려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에 대해 교인들도,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왜 (현실)정치적인 곳이 되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결론 부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개신교회의 일반적인 정치적 성향이 극단적 보수주의, 전체주의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부작용들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설교단상에서 목회자들이 공공연하게 좌파, 빨갱이 운운하는 일입니다. 특히 교회가 대형교회거나 목사가 대형교단의 지도자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럼 왜 개신교회들에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이 공산주의자들은 다 죽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지금이 아닌 과거에서부터 찾아와야 할 것입니다.


 


 


2. 해방이후와 한국전쟁


 


이 부분을 다루려면 또 많은 부분을 언급해야겠지만 저는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적 우경화 문제는 지난 번 말씀드린 일제시대 이후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 당시 어떤 이유가 되었던지 실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협조한 친일파 목사들은 엄연히 현존했고(그것도 상당수였습니다) 해방이후 이 문제가 전혀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친일파 목사들에게는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과거를 되돌릴수는 없겠습니다만 한국전쟁이 10년만 늦게 터지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았다면 분명 한국교회는 또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는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겠군요. 정치나 기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친일청산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진행중이니까요)


 


어쨌든 친일파 목회자들은 대부분 고스란히 교계로 복귀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을 치루는 동안 북한군은 적어도 당시 남한의 사람들에게는 악마같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문제를 다시 도마위에 올리고 싶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은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 그것도 강력하게 -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당시 사람들에게 친일파의 청산이라는 주제보다 때려잡자 공산당 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시각을 다른 데로 돌린 것이죠.


 


이때부터 한국개신교회는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입니다. 특히 이것은 기성세대에게는 더욱 강력하게 먹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고 이것을 이용하면 아주 큰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기사 평화기도회는 반공집회?


 


이제 한국교회의 적은 다름 아닌 북한 공산당이고 이런 반공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한나라당에서 자주 써먹는 것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한국교회들이 친 한나라당 성향을 갖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실 친일파 목사들의 자기보신 차원에서의 문제도 문제거니와 현재 원로 목사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한국전쟁이후 남한사회의 재건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이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장로의 신분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장로'


 


따라서 전쟁이후의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많은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교회지도자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호의적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이 당이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듯이 이 때 교회들에게 주인 없는 땅이나 혹은 일제 시대때 귀속되었던 민족종교의 토지와 재산이 상당 수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 정권이 교회에 호의적인 것과는 별도로 올바르고 도덕적인 정권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지 않아도 모두 다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교회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발생했습니다. 당시 정권이 교회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정의롭지 못하고 부도덕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 교회들은 여기에 침묵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현실적 이익 앞에서 눈앞의 불의를 외면한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친일의 잔재보다 이 부분을 더 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일제시대는 죽고사는 문제가 걸린 것이었지만 이 때는 사실 단순히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야 하나 밖에 없으니 고민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때문에 불의에 눈을 감았다는 것은 더욱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한국교회와 정권과의 야합은 자유당 시대를 넘어 박정희 정권, 노태우, 전두환 정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번 맛들인 권력과 이익의 달콤함은 더욱 커져갔지요. 그래서 이승만의 하야, 4.19 혁명, 각종 민주화 운동 등에 한국교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각 정권들이 득세할 때에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축복하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노태우와 전두환 정권때 청와대 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며 그들을 축복했던 목사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들이고 여전히 한국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국가조찬기도회 모습


 


이런 태생적인 한국교계의 근대사에서의 문제점들은 21세기 시작된 지금까지도 전혀 회개되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덮기 위해 더욱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정당성을 하나님까지 들먹이며 강요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또한 여기에 대해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구요.


 


좀 옆길로 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요즘 한국교회에 왜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을까요? 물론 많은 원인들이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는 이런 정치적인 편향성과 강요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겪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젊은세대는 더이상 반공이데올로기가 진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포장하여 강요하는 목사들과 교계의 지도자들의 주장을 그들이 결코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에 남아 있고 싶어도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가 적어도 성경의 공의와 정의에 입각한 세상보기를 시도할 수만 있어도 신앙의 정체성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젊은 세대가 교회를 등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개신교의 우경화는 바로 해방이후와 한국전쟁이후부터 시작된 정치권과의 야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보수주의와 정치적 우익, 민주주의가 마치 성경과 하나님의 뜻처럼 말하고 있고 진보와 사회주의는 마치 악마의 산물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매우 잘못되고 개혁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경석 목사


 


다음 시간에 더 언급하겠지만 저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소위 정통신학은 상당수가 성경위에 있다기 보다는 이 반공 이데올로기와 우익적 정치적 성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교회에 만연해 있는 정치에 대한 가르침과 주장들의 상당수는 성경과는 상관없거나 심지어는 반대의 입장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개혁해 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건강함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 한국교회의 정치에 대한 견해와 성경적 비판


 


지금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인의 비율은 대충 12-15%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권을 가만히 보시면 정치인들의 개신교인의 비율은 이보다 몇배는 높습니다. 이것은 정치인들이 신앙이 독실하다기 보다는 그들이 종교를 그들의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선거때만 되면 정치인들은 교회에 몰려다닙니다. 그 이유는 가장 표의 결속력이 높은 종교가 기독교, 특히 개신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대놓고 선거운동까지 해주고 교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지지후보를 말해주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이러다보니 정치인들과 대형교회와 교단지도자들은 가까울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온갖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교계 지도자들은 기독교계의 이권을 정치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문하고 있고 정치인들은 또 들어 줄 수 밖에 없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동안 교회는 점점 정치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 되다보니 이런 일들이 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의 교회의 정치적 모습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우선 성경은 어떤 특정한 정당의 손을 들어 주고 있지 않습니다.(제발 정치적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말에 집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대신 성경은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서는 중요한 강조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대표적 성품들이기도 합니다)


 


첫번째로 정의(체다카) 입니다. 히브리어 에메트는 사전적 의미가 [곧다, 똑바르다]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성경의 용례에서 재판과 윤리적 문제와 함께 등장합니다. 즉,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뇌물을 받거나 왜곡하지 않고 올바르고 정직하게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정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정의는 늘 공의(미쉬파트: 제 아이디이기도 합니다)와 짝을 이루어서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원래의 사전적 의미는 [저울추의 균형을 맞추다]입니다. 이는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고 정확하게 판단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가재는 게편이나 초록은 동색이다라는 말과 반대에 있는 단어가 바로 이 공의입니다.


 


성경에서 정의와 공의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이 정신은 성경을 지탱하는 중요한 윤리적 지침이자 신앙적 지침입니다. 이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적용해 본다면 바른 정치인은 올바르고 바른 길을 왜곡하지 말고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릴 때 뇌물을 받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고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게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완전한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교회와 성도는 이런 기준에 분명히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진실(에메트)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이성적인 측면이라면 진실이라는 단어는 감성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에메트는 [꾸미지 않은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을 대할 때 이리저리 기분따라 상황따라 말을 바꾸거나 자기 편한대로 변명하지 않고 늘 진심을 가지고 정의와 공의의 기준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에메트는 항상 또 하나의 단어와 짝을 지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인애(헤세드)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변하지 않는, 일관된 사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성경에서는 긍휼과 자비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그 본래적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진실함이 변하지 않고(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진실과 인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중요한 윤리적 지침입니다. 즉, 교회와 성도는 상황이나 이익에 따라 말을 바꾸거나 타협하지 않고 늘 사람을 대할 때 가식을 버리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되 그것이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를 정치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바른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지역구나 국민들을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자신을 선택해 준 사람들을 위해서 변하지 않고 일관되게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교회가 지지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평화)은 바로 이 정의와 공의, 진실과 인애가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는 이상적 상황을 말합니다. 물론 인간사회가 지속되는 동안 완전한 샬롬은 아마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와 성도는 이런 방향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나타나는 기준입니다. 구약은 시내산 율법에서 신약은 산상수훈에서 이 주제가 분명히 부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개신교회는 이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서 과연 지금 하고 있는 교회에서의 정치적 주장과 행동들이 합당한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의 이익에 눈이 멀어 기득권을 쥔 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밑에서 떨어지는 이익을 받아 먹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정의와 공의에 합당한 것인지, 강한 자들의 이익을 위해 약한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에 눈감고 있는 것이 과연 성경과 부합되는 것인지 스스로 되물어 보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이익과 이권이 조금이라도 공격받거나 위협받으면 온갖 단체행동을 통해서라도 - 심지어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 이를 공격하고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시도들이 과연 진실과 인애를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합당한지, 천박한 돈의 논리에 붙잡혀 교회에서마저 돈있는 사람들을 우대하고 사람을 돈과 경제적인 지표로 인식하고 대우하여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천대하며 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세계관과 일치하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기를 바랍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고 있는 성도들 스스로가 목사들의 말이 아닌 성경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지도자가 무슨 짓을 해도 덮어놓고 충성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온갖 불의와 불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거기서 나오는 이익을 특정한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어도 그것이 옳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붙어서 그들에게 아첨하여 그것을 대대손손 누리고 살라고,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세상의 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았습니까? 기독교인의 세상은 손바닥만한 교회 예배당이 전부입니까?


 



이것들을 확 그냥...


 


한국 개신교회는 그동안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 적어도 한국사회 공동체에 정직하게 회개하고 사죄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잘못된 일에 입을 닫고 눈을 닫고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 회개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그랬던 것처럼 불의하게 얻은 이익을 네배까지라도(율법에서 네배의 보상은 최고치를 의미합니다)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교회와 성도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세상에서의 윤리와 삶의 기준점들에 따라 정치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그에 맞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못한다면 한국개신교회는 끝없는 멸망의 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지금 한국개신교회의 정치적 포지션과 발언들은 결코 성경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개신교인들 스스로가 먼저 변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의 이야기와 계속해서 관련된 주제를 이어나가겠습니다. 다음 주제는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의 관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현재 한국개신교회의 교회론적 이슈들과 신앙적 주제들의 신학적 문제를 미국교회와 그 신학의 영향력이라는 부분에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는 한국교회들이 왜 미국이라면 하나님과 같은 동급의 수준에 놓고 바라보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개혁하기 위해서 왜 미국교회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그럼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