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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과 진보

2010-04-0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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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88 추천0 비추천0

2010.04.09.금요일


산하


 


 


까마득한 이라는 형용사가 적절하다 싶을만큼 오래된 과거, 한 선배에게 나는 집요한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형. 만약에 남북이 전쟁이 나면 형은 어쩔 건데? 북한이 다시 쳐내려온다면?"
  "무식한 녀석아. 북한은 남한을 침략할 의사도 능력도 없어."
  "의사도 능력도 없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가 세계 역사에 한 두 번이오?  하여간 어쩔 건데?"
  "허 참 나는 불가능한 가정법에 답하고 싶지 않아."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라지만 미래를 두고 못할 가정이 어디 있겠소?  어쩔 거냐니까."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총을 겨눠야겠지." 
  "오호 북한에게 총을 겨누시겠다?"
  "짜슥아 북한은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니까?"
  
   



재미없는 대화였지만 거기서 멈췄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는 믿음의 방패 앞에서 북한이 쳐내려오면 어쩔 거냐는 구닥다리 창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 그 선배의 안보의식(?)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거니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는 믿음 역시 날이 갈수록 굳건해진다. 그래도 80년대까지는 남북이 비스무리하기라도 했다. 요즘처럼 반딧불과 보름달의 차이를 보이지도 않았고, '이밥에 고깃국'은 못먹었을망정 남북을 통틀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옛날에 졸업한 일이었다. 제 나라 국민이 픽픽 굶어 죽는 판에 전쟁을 하겠다고 아금바금 덤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누리는 권력도 산산이 흩어질 먼지가 될 것이므로.  
 
그러나 역사라는 놈이 믿음대로만 움직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믿는 자에게 복이 있기는 커녕 믿는 자의 뒤통수가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 역사이며, 고무신을 열 두 번도 바꿔 신는 갈대만도 못한 존재이기 십상이었던 것을 우리는 안다. 그 심술과 변덕의 틈바구니에서 최선의 아니면 차선의, 그것도 아니면 차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였고, 한 나라의 국민이 어떤 정치 세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흥망이 표변하고, 그 정치 세력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개인과 나라와 존폐가 갈라졌음도 우리는 안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정치 세력이든 자신들의 필생의 목표인 정권 획득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는 정당하며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라는 신념을 갖는 것보다 "우리가 하면 당신들에게 이롭다"는 믿음을 선사하는 일일 것이다. 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극복하고, 실제로 저 사람들이 우리 미래를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구나 하는 긍정을 얻어 나가야 할 터이다. 


 


진보라고 일컬어지는 세력도 마찬가지다. 약점을 보완하고 자신에게 이런 한 방이 있음을, 또는 한 칼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를 광범위하게 입증받아야 정권 쟁탈의 시상대에 발끝이라도 걸칠 수 잇을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 세력이 가장 약점을 보였던 분야 가운데 하나는 안보와 국방의 영역일 것이다. 
 
진보정당이 평화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평화를 위한 국제적 연대를 구축해야 하는 것도 지당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것도 백번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섬섬옥수로 정권을 거머쥐려면 배겨야 할 굳은 살이 많다. 


 


북한이 몰락할 경우 중국의 동북 4성이 되리라는 쑥덕거림이 있었던 지 오래다. 그 말을 익히 듣고 있는 국민들에게 "북한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를 부르짖어 봐야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상의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연평해전 당시 충돌 모습


 


한 번 당한 것은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을 보여 준 연평 해전을 목도한 국민들에게 왕년의 내 선배처럼 "북한은 절대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봐야 또 깨는 소리 한다는 핀잔 외에 얻을 것이 있을까. 


 


남북의 대결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진보의 역량과 계산으로 남북 문제를 주도하기 위해서라도 이 영역에서 진보는 국민들에게 할 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천안함이 가라앉았다.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어뢰라고 하기엔 음탐병부터 레이다병까지 아무런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고, 화재도 나지 않았다. 기뢰라면 그 일대를 누비고 다녔던 여객선들과 어선들을 교묘히 피해서 천안함에 들러붙었다는 것이 요상하다. 결정적으로 정보를 쥐고 있는 미국이 북한 관련을 부인했다. 피로파괴라고 보기엔 생존자들의 증언과 서로 사맛디 아니한다. 어차피 선체가 건져지고 조사가 진행되면 알 일이지만 여기서도 진보 세력은 신념이 아닌 현실의 프리즘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배가 노후하여 파도를 못이겨 침몰한 것이라면 한국 해군의 주력 초계함인 포항급 전체의 문제가 될 것이고, 이건 바로 국방 예산과 직결되는 문제다. 유실 기뢰라면 서해 5도 일대에는 대규모 소해 작업이 벌어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고, 북한이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특수부대(UDT도 30분을 못버티는 바다 속을 몇 시간이고 유유히 누비고 다니는)나 1200톤급 배도 피항할까 말까 하는 파도 위를 포장도로처럼 달리는 대단한 잠수정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긴 하지만 북한의 소행이라면 어찌할 것인가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고, 거기에 따라 취해야 할 행동들도 다 다르다. 북한이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보다는 북한이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계산이 필요하며, 백만에 하나 북한의 짓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도 셈속에 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군부는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갈 계산이 선 것 같고, 모처럼 맘에 드는 행태를 보이던 이명박 대통령도 그에 기우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여기에 대해 진보가 견지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북한에 대한 믿음"도, "미국의 음모"라는 유아틱한 음모론도 아닐 것이다. 수긍할 것은 수긍하고 따질 것은 따지고 밝힐 것은 밝히며, 정권을 수여하게 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구축해 가는 모습일 터이다.  허둥거리거나 묵묵부답이거나 무책임해 보여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