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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13.화요일


임종금


 


0.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의병전쟁의 시작을 다루었다. 이젠 의병전쟁의 절정인 서울진공작전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다. 의병전쟁만 해도 내용이 엄청나기에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1. 13도 창의군의 조직


 


1907년을 거치면서 의병활동은 점점 거세졌다. 기존의 양반 의병 외에도 신돌석, 김수민, 홍범도 등이 이끄는 평민 의병, 활빈당과 같은 저항세력, 마지막으로 해산된 대한제국군까지 의병전쟁에 뛰어들자 의병전쟁은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앞서 5편 에서 본 것과 같이 언제까지 지역에서 게릴라식 전투만 고수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의병전쟁의 기본목표는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헌데 지역에서 아무리 관리를 쫓아내고, 친일파들을 죽이고, 일본 헌병과 경찰 몇 몇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국권회복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다. 또 전략적으로는 군대 해산(대한제국 군대는 시위대와 진위대를 모두 합쳐 해산 직전 8800명 규모였다. 이 가운데 4000명 가량이 의병전쟁에 투신한다.) 이후 일본군이 이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제는 뭉쳐서 결단을 내릴 때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관동창의군이다. 당시 의병전쟁의 중심지는 강원도와 경북 지역이었다. 잘 아시다시피 이곳은 지형적으로 산이 많아서 게릴라전이 용이하고, 양반 유생들의 힘이 강한 지역이었다.


 


1907년 6월,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 이구재가 이인영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5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은찬과 이구재는 이인영에게 의병대장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당시 이인영은 양반 가운데 가장 급이 높고, 학문적 소양이 높은 사람이었다.(또한 을미의병 때에도 봉기했던 사람이다.) 처음에 이인영은 아버지의 병을 이유로 거부하였으나, 결국 승낙하였다.


 


당시 유명인사였던 이인영이 거병하자, 전국에서 이인영의 의병진을 향하여 많은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에 본거지를 정하고, 관동창의군 대장에 올랐다. 그러자 경북과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과 신돌석이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은 날로 불어났다. 1907년 가을에 관동창의군의 규모는 16개 의병부대 6000(혹은 8000명)명에 달하였다. 이인영은 경기도 양주군 삼산리를 본거지로 정하였다. 관동창의군은 원주에서 경기도로 접어들어 서울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다.


 


이것을 그대로 두고 볼 일본군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삼산리 방면에 1개 대대(+a하여 약 500명)를 보내었다. 당시 의병진영은 삼산리로 향하는 요충지에 감시 부대(감시 병력은 약 200명~300명)를 배치해 놓았다. 일본군이 감시부대와 전투를 하는 사이, 삼산리의 본대(700명)는 조용히 잠적하였다. 아직까지 일본군 1개 대대를 700명이 당해내기 어려웠다. 잠적한 700명은 사방에서 게릴라식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이것이 삼산전투이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몇 가지 있다. 당시 관동창의군에 합류하겠다는 의병이 6000명 이상이었음에도 본대에 머무른 병력은 1000명이 안 되었고, 주변 30킬로미터 근방에 흩어져 있었다. 숫자는 모았지만 아직 질서정연한 통제는 이뤄지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올라오고 있는 부대도 많았다. 게다가 병력은 앞서지만, 화력에서 정규 일본군과 맞서기에는 미약했다. 당시 일본군 대대는 기관총은 물론, 대포까지 동원한 정예군이었다.


 


어쨌든 삼산전투에서 어렵사리 일본군을 몰아낸 이인영은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총 결집을 해서 단일 대오를 이뤄야겠다.’고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인영은 경기도 양주에서 의병장 회의를 열고, 13도 창의군 결성과 창의군 총 대장직에 올랐다.


 


당시 13도 창의군은 전국에서 48개의 의병부대, 병력은 1만 명이 넘는 대부대였다. 그러나 실제로 1만 명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인영의 호소에 발맞춰서 ‘언젠가’ 합류할 부대가 1만 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해산군인 출신은 약 4000명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이들이 정예군이었다.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한 후, 조속히 경기도 양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이인영이 1개월 동안 창의군들을 기다렸지만, 신태식,신돌석,이강년 부대는 따로 활동하고 있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홍범도,김수민과 같은 평민 의병들은 배제되었으며, 신돌석도 1907년 12월 말에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 이유는 눈치 깠다시피 신분적 격차가 너무 났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력에 있어서 오히려 평민 의병장들이 더 위협적이었다. 양반 의병들은 명분을 쌓는 데 주력하였다. 예를 들어 양반 의병들은 친일파 부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도 망설였다. 양반이 재산을 빼앗는 것은 차마 할 짓이 못 되고, 도적들로 오인되어 명분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평민 의병장들은 바로바로 직접적으로 행동하고, 실용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가차 없이 응징하였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이런 평민 의병들이 훨씬 두려웠다.


 


해가 바뀐 1908년 1월(참고로, 1907년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총 규모는 21,703명, 사망자수는 2337명, 134차례의 전투가 기록되었다.). 양구는 의병군의 본진이었다. 일제는 이곳에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의병군은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이미 발각되었다. 1월 2일 밤에 치러진 양구 전투에서 의병군은 7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 가운데에서는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도 있었다. 신돌석은 양구 전투를 끝으로 창의군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양구 전투에서 보다시피 의병군의 작전은 이미 노출되었다. 의병전쟁 자료를 보면 일본군의 움직임은 이미 의병군들의 숫자와 전략은 거의 알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의병군들의 보안은 취약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흔히 게릴라식으로 움직이면 병력의 숫자나 상대의 전략을 알기가 쉽지 않은데, 이미 대규모로 움직이면서 노출이 잦아지면서 보안체제를 확실히 갖추지 못한 의병들이 정보전에서 밀리고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 서울 진공 작전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인영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군은 점차 서울로 진격하였다. 당시 이인영의 격문을 살펴보면 양반 의병들의 최종목표를 알 수 있다.


 


1. 통감부를 타격하여 굴복시키고


2.「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의 파기를 달성하며 국권을 회복하고


3. 을사5적 정미 7간신 등 매국노들을 처단한 다음


4. 의병중에서 인물을 선임하여 신정부를 조직해서


5.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맞는 내용 같지만, 결사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결국 서울을 점령한 다음, 일본과 협상하여 1905년 이전의 체제로 돌려 놓겠다는 것이다. 또한 내용은 정치적이다. 일제와 협상을 하겠다는 것에서 이 정치성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당시 양반 의병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런 온건적이고 복고적인 내용은 양반들에게는 먹히기 쉬운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뭔가 시원한 느낌이 오지 않는 것이다. (왠지 요즘 민주당을 보는 듯한) 필자 같으면 ‘왜놈을 척결하여 완전히 몰아내고, 왜놈 편에 선 놈들의 재산은 모두 뺏어 백성들에게 나눠준다.’라는 내용은 꼭 넣었을 것이다.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에게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인영도 허위와 함께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서울로 본대를 이끌고 갔으니,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대오를 맞춰 갔겠거니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의병은 역시 의병들이다. 조용히 산으로 움직이고, 수십 명씩 소규모 단위로 움직이며 일본군과 끊임없이 교전하면서 진격하였다. 대낮에는 평민이나 양반의 복장을 하고(의병들은 딱히 정해진 복장이 없다.) 일반인처럼 행세하며 일본군을 통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누가 의병이고, 누가 일반 백성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인영과 허위는 본대를 이끌고 약속장소인 서울 동대문 인근까지 도착했다.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이인영과 허위는 무려 38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아직 아무도 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13도 창의군 가운데 가장 전투력이 강한 이강년과 민긍호 부대 는 일본군과 접전을 하다가 오히려 남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군은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이미 의병들의 최종목표가 서울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각지에서 흩어져서 올라온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본군은 서울로 오는 길목을 끊고, 의병들을 공격하였고, 작전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래서 이인영과 허위가 동대문에 이르렀을 때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1만 명 가운데, 동대문에 도착한 이는 200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으로는 일본군만 4000명 넘게 지키고 있는 서울을 공격하기가 어려웠다.(헌병과 일본 경찰까지 합하면 일제의 방어군은 더 많을 것이다.) 이인영과 허위는 일단 여주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이 때 일본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여주 전투에서 이인영 본대는 대패하였다. 일본군의 기습을 예측하지 못하였고, 38차례나 전투를 치르면서 이미 탄약도 고갈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 이인영에게 결정적인 통보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인영은 만사를 제쳐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유교에서는 충과 효 가운데 ‘효’가 더 높은 가치가 있었다.


 


혹자는 이인영이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간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고, 이인영은 얼굴마담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군무는 당시 군사장이었던 허위가 기획하고 집행하였다. 이인영이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해서 의병의 세력이 갑자기 약해진 것은 아니다.


 


이인영의 낙향으로 인해서 창의군 총대장이 된 허위는 (허술한 의병들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하여)군율을 만들고 임진강 지역에서 의병연합부대를 이끌었다. 허위의 통솔하에 의병들은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을 장악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의병들에 의한 ‘군정’이 이뤄질 정도로 막강하였다. 허위는 양반이지만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다시 세력이 모이자 허위는 4월에 재차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의병장들에게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2차 서울진공작전을 계획 중이던 1908년 6월 11일. 허위는 일본 헌병 40명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허위의 체포로 서울진공작전은 영영 실패하게 되었다.


 


3. 이강년, 허위, 신돌석, 김수민, 민긍호


 


이들은 1908년에 죽은 의병장이었다. 이들의 죽음으로 중부지방 의병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대신 함경도 지역과 호남 지역이 이후 의병전쟁을 이끌게 된다. 잠시 이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강년


 


이강년과 허위는 명문가 출신이다. 이강년은 유인석의 문하였다.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고 1907년 제천전투에서 일본군 500명을 죽인 것을 시작으로 각 전투에서 활약을 펼쳤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이후에도 이강년의 활약은 이어졌다. 1908년 4월부터 인제 백담사 전투, 안동 서벽 전투, 봉화 재산 전투와 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헌병?일본 경찰 등 약 1000여 명이 죽었다. 1908년 7월에 충북 단양군 적성면 금수산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을 통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강년은 수많은 혼이 스러져 간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이다.


 


-허위


 


허위는 경북 구미 출생이다. 역시 명문가 허씨 집안이다. 을미의병때부터 활약하였다. 1904년에는 평서원서리재판장에 임명되었다. 평서원은 현재 대법원과 유사한 것으로, 요새로 치면 대법원장 권한대행직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1908년 이인영이 낙향한 이후 역시 13도 창의군 총대장직을 권한대행하였다.


 


경기도 중북부를 완전히 석권하였으며, 군율을 매우 엄하게 하고, 군표를 발행하였다. 군표란 지금 의병들이 물건을 빌려가지만, 이후 일제를 몰아낸 이후에는 군표에 적힌 것을 배상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렇듯 그는 매우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2차 서울진공작전을 구상하고, 대담하게도 부하를 통감부에 보내어 광무(고종)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이권 침탈의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 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조건들을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끝내 의병들의 공격에 무너질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만하였다. 그의 구상대로 2차 서울진공작전이 치밀하게 진행되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 헌병의 급습으로 체포되고 만다. 일본은 포로를 잔혹하게 심문하여 기어이 그의 거처를 알아낸 것이다. 그는 일본 헌병사령관이 직접 심문하였다. 헌병사령관이 그에게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묻자.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망시킬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은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당시 양반 유생들의 현실 인식이기도 했으며, 정확한 인식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강년의 뒤를 이어 2번째로 순국했다.


 


-김수민


 


김수민은 평민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화약과 총탄을 만들 줄 알고, 사격술이 매우 뛰어났다. 그의 활동은 가히 게릴라전의 교범이라고 할 정도다. 철저하게 부하들을 20~30명 정도로 소대단위로만 움직이고,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무기를 탈취하는 데에는 일등이었다. 일본측 자료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군술(軍術)에 능하여 이산·집합이 또한 교묘하고 궁지에 몰린 때도 한 두 차례가 아니었으나 능히 빠져나가 지금도 부하를 곳곳에 흩어져 있게 하고, 자기는 적은 부대의 장수로서 출몰 배회하므로 그 체포가 용이하지 않다."


 


1908년 10월에 김수민은 강화도를 기습 점령하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화도 점령에 일본군은 수 차례 병력을 파견했으나, 결국 의병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의병들은 100명 안팎으로 여겨진다. 강화도에서 큰 성과를 거둔 김수민은 서울에 잠입하여 앞으로 서울 공격을 위한 구상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민긍호


 


민긍호는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씨척족으로 관직에 발탁되었다. 원주 진위대에 배속되어 특무정교(特務正校, 오늘날 특무상사)로 일한다. 1907년 7월 군대 해산 이후 원주 진위대 병사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하고 원주읍내 관공서를 모조리 장악하고, 일본인들을 모두 처단하여 원주를 장악하였다. 이후 부대를 나눠 유격전을 시작하였다. 백여 차례에 걸친 전투를 이끌었고, 1907년 8월에 여주를 공격할 때에는 1000명이 넘는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서울진공작전에서도 수 차례 일본군을 물리치고, 서울 근교에 이르렀으나, 이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모두 돌아가고 없었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활약을 펼쳤다.


 


1908년 2월 27일에도 역시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그러나 미처 보급을 받기도 전에 2월 28일에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일본군과 맹렬하게 싸웠으나 탄환이 다 떨어져 체포되었다. 그날 밤 일본군의 소재를 파악한 의병대가 민긍호를 구하기 위하여 습격하였다. 민긍호는 일본군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피살당했다.


 


-신돌석


 




1908년 이전 의병전쟁 활약 중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세력이 바로 신돌석 의병부대이다. 활동범위는 남북으로 200킬로미터, 동서로 10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범위가 넓었다. 때때로 400명 이상 되는 대부대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읍내로 입성하기도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그래서 당시 일제에게는 토벌 제1순위로 꼽히고 있었다.


 


1907년 말에 13도 창의군에서 배제된 이후, 신돌석은 1908년 1월 10일에 영양군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일본군의 급습에 걸려 대패를 당했다. 당시 죽은 의병숫자만 하더라도 60명이고, 부상자수, 도망친 의병 숫자를 헤아리면 과반 이상의 병력을 잃어 버렸다. 이에 신돌석은 다시 소규모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의병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비장의 카드가 숨어 있었다. 일제는 기어코 신돌석의 의병부대만은 끝장을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일제는 대규모 귀순작전을 펼쳤으며, 귀순자들은 가운데서는 헌병보조원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 작전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세력이 바로 신돌석 부대다.


 


4월에 의병을 다시 모은 신돌석의 부대원은 약 280명 정도였다. 신돌석은 항상 군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부호들을 공격하여야 했다. 일본군은 이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은 부호가가 집중된 곳에 진을 치고, 신돌석을 기다렸다. 또한 신돌석이 부대원들을 이끌고 산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귀순자들과 헌병 보조원들이 산길을 알려주었다. 더 이상 신돌석에게 산은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1908년 5월 말, 신돌석의 부대는 120명 수준으로 줄어 있었다.


 


신돌석이 나타났다고 하면, 순식간에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또한 신돌석이 이동 중에도 일본군들은 역으로 매복을 하고 신돌석을 기다렸다. 이제 신돌석의 주특기인 매복을 일본군이 활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7월에는 70명 가량으로 줄어 있었고, 9월에는 20명 가량으로 줄어들었다. 다시 의병을 모았지만, 50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겨울이 오자, 더는 의병부대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해산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양반도 아니었고, 양반 의병들과 그리 친근하게 지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원이 없어서 늘 물자를 구하러 다녔다. 의병을 일으킨 1904년부터 1908년 말까지 단 하루도 넉넉하게 지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부대의 세력이 줄어든 이후부터는 물자를 구하러 갔다가 기다리던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 대다수였다. 신돌석은 1908년 12월에 포상금을 노린 김상열(혹은 신돌석의 친척이 범인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이에게 피살당했다.


 


참으로 비참하게 스러져 간 영웅들이다.


 


4. 1908년에 일어난 국내외 다른 사건들


 


1908년도 역시 조용하지 않았다. 3월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사살했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요청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 시켰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보호를 환영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였다. 당시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로 인해서 서양인들은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일본은 이런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을 지냈던 스티븐슨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살해됨으로써, 외려 서양인들은 한민족의 저항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8월에는 대심원(대법원) 이하 각급 법원이 개원되었다. 물론 이 법원들은 일제가 한반도 통치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법관들은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일제의 편의에 의해 판결이 이뤄졌다.


 


10월에는 최남선이 만든 잡지 <소년>이 창간되었고, 11월에는 서양식 신극 <신세계>가 원각사에서 공연되었다. 의병전쟁으로 나라가 들끓는 동안에, 개화파들은 조용하게 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


 


현 서울대학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이 개설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훗날 다루겠지만,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중추가 되는 기관이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겉으로는 자본금 1000만원에 대한제국의 지분 30%와 일본의 지분을 합하여 만든 한일합작 국책회사의 형태를 띠었으나, 초창기부터 일제가 운영을 독점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헌법초안을 만들고, 국회를 개원한다는 둥 나름대로 개혁을 시행하지만, 이미 사방에서 일어나는 봉기는 막을 수 없었다. 1908년 10월에 비운의 황제 광서제가 죽고, 동시에 서태후가 죽었다. 서태후는 죽기 직전에 선통제 부의를 마지막 황제로 지명하였다.


 


일본은 앞서 봤듯이 사회당이 (곧 해산되었지만)창당되는 등 계급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무마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미화하기 위하여 ‘무신조서’가 공표되었다. 한편 미국과는 여전히 관계를 돈독히 하여 ‘미일신사협정, 미일교환협정’등을 연이어 체결하였다.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저항의 형태는 우리와 같은 의병전쟁이 아니라, 조세불납운동과 프랑스 장교를 독살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인도네시아에도 역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콩코는 벨기에 영토로 병합되었고, 그리스는 키프로스를 병합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를 합병하였다.


 


영국에서는 탄광노동을 8시간으로 제한하였고, 아동법이 제정되어 복지정책이 시작되고 있었다.


 


5. 예고


 


아직도 의병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09년까지 오늘 하려고 했는데, 양해 바란다. 7편에서 의병전쟁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진짜 진짜 개화파들의 애국‘계몽’운동을 꼭 다루도록 하겠다. 진도 졸라 느리다. 이러다가 명박이 보다 늦게 끝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