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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정조대왕이 서거(1800)하며, 아들 순조(재임 1800-1834)가 왕위에 오릅니다. 11살 너무 어린 나이에 일찍 왕위에 오른 탓일까요? 순조 때부터 조선은 수직 낙하하며 기울기 시작합니다. 탕평이 실패하고 붕당정치가 약화되면서, 권력이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국정이 운영되는 ‘세도정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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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 자체가 국정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크겠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은 어린 왕을 더욱 감당키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을 위해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했던 태종의 방식과는 달리 정조대왕은 강경책보다는 능숙한 정치력으로 정적들마저 컨트롤하며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때문에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승하한 그때, 정적들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정조대왕이야 천재적인 정치력으로 그들을 컨트롤했지만, 갑작스레 왕위에 오른 어린 왕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었지요. 게다가 왕이 어려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할머니. 친할머니 아님)는 정조대왕의 정책들을 모조리 갈아엎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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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역사저널 그날>

 

조선은 계속 망가져 갔고, 백성들을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822년 ‘박래겸’은 스리슬쩍 칼퇴하려다 갑자기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임명받습니다.   

 

암행어사 임명은 큰 영예였지만, 박래겸은 교통과 치안이 발달하지 않은 지방으로 떠돌아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을 하고 맙니다. 하지만 곧 기운을 차리고 ‘관종기’를 무럭무럭 뽐내며 암행어사 일을 즐기게 되는데요.

 

박래겸(朴來謙, 1780~1842)은 순조 때의 문신으로 『서수일기(西繡日記)』의 저자입니다. 『서수일기』란 박래겸이 평안남도 암행어사를 재임하며 기록한 일기입니다. 

 

박래겸은 암행어사를 하며 관종짓도 하고, 기생과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도 가감 없이 기록하며 퓨전 사극에서 등장할 법한 기생과 어사의 로맨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래겸의 암행어사 임명일부터의 관종 스토리는 1편 링크 / 박래겸의 기생과 로맨스 스토리는 2편 링크)  

 

박래겸이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사의 일을 수행할 때는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백성의 안타까운 상황을 몰래 지켜볼 땐 ‘정의로운 어사’가 지켜야 할 태도를 보여주었죠. 환곡제도를 악용하는 꼼수의 현장을 ‘직관’한 박래겸의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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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일기로 보는 ‘관종 암행어사’

 

1822년 4월 28일 

 

읍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 틈에 섞여서 창고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니, 이봐 김 선생, 쌀이 대체 이게 뭔가? 이런 나쁜 쌀을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사또는 어딨어. 당장 사또 나오라고 해! 암행어사가 내려온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어떻게 이런 간사한 짓을 한단 말인가. 우리보고 이런 질 나쁜 곡식을 먹고 버티라는 말인가!”

 

라고 항의했다. 그런데 한 아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들, 진정하시고. 이 곡식들 전부, 지난가을에 선생님들이 납부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질 나쁜 곡식을 납부한 건 다름 아닌 선생님들이라니까요. 그런데 받을 때는 질 좋은 곡식으로 받으려 한다니, 양심이 너무 없으신 거 아닌가요? 저희는 다 절차대로 하고 있는데, 민원을 넣으신다고 하면 참 곤란합니다. 또, 만약에라도 지금 암행어사가 이 마당에 들어와 있다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 이렇게 진상을 부리 십니까.”

 

결국, 사람들은 더 이상 항의하지 못한 채 주는 대로 받아 흩어졌다. 심하다! 백성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 일이.

 

고을 곡식 창고를 담당하는 관리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받아 창고의 곡식을 빌려주는데, 모두 나쁜 쌀을 내줍니다. 백성들이 이에 거세게 항의하자, 아전들은 “그거 다 자네들이 지난 가을에 낸 곡식인데 왜 나한테 항의함?”이라며 대꾸합니다. 

 

결국, 수령에게 고발하려던 백성들은 포기해버리고 그저 주는 대로 받아 갈 수밖에 없었죠. 그런 나쁜 쌀을 받으며, 다가오는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것을 울며 겨자 먹기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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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수령에게 고발해 봐야, 자신들이 지난가을에 어떤 곡식을 납부했는지 증명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서류 조작을 통해 나쁜 쌀을 받았다고 다 기록해두었을 테니까요. 좋은 쌀은 어디로 갔냐고요? 

 

나쁜 쌀과 바꿔 이익을 남겼겠죠. 그 이익은 모두 관리들의 뒷주머니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박래겸은 ‘심하다.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의 사정이’라고 쓰면서 이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따로 작성하는 공식 보고서를 통해 조정에 보고하거나, 부조리가 심한 고을은 어사 출두를 통해 직접 조치하기도 했죠.

 

뭐니 뭐니 해도 암행어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암행어사 출두야!”이겠지요? 그런데 요즘 검찰의 압수수색 스타일이 검사의 취향 따라 때로는 밤샘 수사, 때로는 때로는 자장면 수사가 되듯, 이 어사 출두도 어사의 스타일,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나 봅니다. 특히, 박래겸은 왁자지껄한 어사 출두를 선호했습니다.

 

 

1822년 5월 13일 

 

해 질 무렵, 역졸들을 이끌고 순안현 관문 밖에 도착했다. 마침 수령은 부재중이라 나머지 관원들이 부랴부랴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내 신호가 떨어지자, 역졸들은 입을 모아

 

“암행어사 출두야!”

 

를 외치며 달려 들어가니, 사람들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 꼭 폭풍 부는 날 우박이 이리저리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 반응이 어떤가 궁금해 문루(門樓)에 올라 성을 돌아봤다. 성안의 등불은 모두 켜져 있지만, 거리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나는 뒷짐을 지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그러나 어사의 위엄을 한껏 세운 채, 천천히 관아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관아도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를 않았다.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어사 출두였는데 머쓱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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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지나서야 담당자들이 모여 내 집무실을 만들어주었는데, 그제야 머쓱했던 내 마음이 조금 풀렸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나를 위해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주었다. 나름대로 흡족했던 밤이었달까.

 

박래겸은 확실히 ‘관종’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사 연기를 충실히 수행하죠. 그런데 담당자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바람에 뜻밖의 무관심을 받게 되자 꽤 머쓱해 합니다. 그 와중에 차려 주는 맛집 스타일 밥상은 사양도 하지 않고 넙죽 받아먹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어사직과는 잘 안 맞는, 너무나 풍류형의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어사 임명장을 받자마자 “내가 어사라니! 나는 깜냥이 안 되는데!”라고 머리를 쥐어 잡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어사는 자신의 일 처리로 인해 뜻밖의 피해를 본 사람들의 항의를 받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어느 날, 박래겸은 자신에 대한 뒷담화를 전해 듣게 됩니다.

 

 

1822년 7월 19일 

 

길을 가다가 술을 파는 한 노인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그 노인이 재밌는 얘기를 꺼냈다.

 

“어사가 명을 내려 교체한 전 순안 수령의 부인이 가마를 타다가 내려 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마를 끌던 한 노비가 술을 먹다가 열이 받았는지, 갑자기 신당(神堂)을 찾아가, ‘저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버린 어사는 저의 원수입니다. 신령님, 제발 어사를 잡아가 주세요’라고 빌었다는 겁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한바탕 웃어 젖혔는데,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그 가족들과 노비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나의 행동으로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도 새겨놔야겠다.

 

어사가 파직을 명한 한 수령의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잠시 가마에 내려서 쉬게 됩니다. 그런데 가마를 끌던 노비가 갑자기 빡쳐서, “어사는 나의 원쑤”라며 신령님께 저주와 가까운 기도를 퍼부었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실제로 어사는 공적인 일을 하다가 물리적인 보복을 당하거나, 훗날 정치적인 보복을 당하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었습니다. 정의로움을 세우는 일이 물타기와 보복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가 지금도 자주 보는 광경이죠?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어사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조정의 정치적 역학관계였습니다. 박래겸의 최종 보고서에서도 우리는 미묘한 정치적 계산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1822년 8월 6일  

 

평안남도 암행어사 박래겸이 보고서를 올리다.

 

“전전 평안감사 이조원은 아직까지도 그에 대해 욕하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가 파직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소문이 횡행했습니다. 또한, 그의 생일날 그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모든 고을에서 돈이 모였고, 기생을 들여보내라며 수령들을 압박했습니다. 게다가 평안도의 소리꾼들을 서울의 부잣집 자식들에게 보내 아부한 일도 있습니다. 나아가 평양의 군량미를 두고 뒤로 해먹은 정황도 있습니다.”

 

박래겸은 수령들에 대한 인사고과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전전 감사 이조원에 대한 고발도 함께 적습니다. 실제로 이조원은 매우 부패했던 관료였던 것 같습니다만, 이미 비슷한 일로 이전에 탄핵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조원을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이미 처벌을 받았다며 그를 감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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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이조원은 장관급 요직을 줄줄이 역임하다가, 말년에 역모죄로 고발당합니다. 이때 이조원을 제거하려고 움직였던 주 세력은 안동 김씨 세력이었죠. 순조가 오랫동안 신임한 자가 역모라니 어처구니없는 죄였지만, 결국 그는 유배당했다가 끝내 사약을 마시게 됩니다. 그가 풍양 조씨 세력의 핵심 인사였기에 발생한 정쟁이었죠.

 

우리는 실록의 이 장면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박래겸의 정치적 계산일 가능성입니다. 당시 백성들의 말처럼,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똑같아서 썩지 않는 관리를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웠던 시대였죠. 그런데 안동 김씨 세력이 아니라 풍양 조씨 세력인 이조원의 죄를, 그것도 이전에 한 번 처벌을 받았던 전전(前前) 감사의 죄를 다시 꺼낸 것은, 어사로서의 일 처리를 확실히 하면서도 막강했던 안동 김씨 세력에 순응하는 정치적 한 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박래겸은 그저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 어떠한 정치적 계산 없이 순수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세력에 의해 취사 선택되었을 가능성입니다. 승정원일기에는 박래겸의 보고서가 편집 없이 올라가 있는데, 반대로 실록에서는 이조원의 죄에 대해 강조하고 있죠. 정쟁으로 삼기 딱 좋았던 것이죠.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처럼, 어사가 항상 캡틴 아메리카나 배트맨처럼 정의의 수호자일 수는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주로 싹수가 보이는 젊은 문신을 어사로 임명했는데, 중앙의 능구렁이 같은 권세가들과 연줄로 맺어진 수령을 고발하는 일은 쉽지 않았죠. 또한, 맨땅에 삽질하듯 악조건에서 분투하다 보니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본 시리즈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미 어사의 소문이 파다해 수령들이 다 대비하는 일도 있었죠. 

 

우리에게 전해지는 대표적인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설화는 무려 97건이나 됩니다. 그 수치에서 불합리와 부조리에 짓눌려도 말 한마디 감히 내지 못했던 백성들의 정의로움에 대한 열망과 가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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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초상화

 

그러나 설화는 설화일 뿐, 어사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해나가며 속이 후련한 ‘참교육’을 보여주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사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너무나 단단한 구조적인 장애물이 차츰차츰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죠.

 

생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합니다. 나라 역시도 그렇습니다. 500년을 이었던 조선이 결국에 소멸했듯, 우리의 시대 또한 언젠가 소멸해 역사책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박래겸이 활동하던 시대는 그 장애물을 해소할 골든 타임이 사라져가던 시점입니다. 

 

현재 우리 시대의 정의는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을까요?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관종 암행어사 시리즈’의 끝인사를 드립니다.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에 이어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은 조선 사람들의 단맛 짠맛 나는 일기를, 우리 시대의 ‘김 씨 아조씨’의 삶과 야무지게 비벼놓은 책입니다. 저 혼자 읽기엔 아까울만큼 재밌는 책이라,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암행어사라니!」에 수록된 에피소드를 살짝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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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