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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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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에게는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고, 수령에게는 암행어사가 호랑이보다 무섭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향촌사회의 일이 중앙정부까지 쉽고 신속하게 전해지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지방에서 중앙정부 모르게 탐관오리 질을 하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였죠. 그래도 향촌 사회의 양반들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었다면 나름의 견제가 가능합니다. 

 

향촌 사회의 주도권은 ‘중앙에서 내려보낸 수령 VS 지역에서 영향력을 갖춘 사족(양반)’의 대결 구도로 흘러갔습니다. 

 

양반은 수령이 업무를 잘하는지 감시하고 때론 협조도 했습니다. 가끔은 임금님께 상소를 올려 다이렉트로 칭찬하거나 욕하기도 했구요. 수령은 지역 여론을 흔드는 양반들을 회유하거나, 압박하면서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견제하는 세력이라 할 지라도 서로 이익이 맞는 사안이 있다면, 혼연일체가 되어 쿵짝 맞추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꿎은 백성들만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죠.

 

간절하고 절망적인 백성들의 고통은 중앙정부에서 통과가 되냐 안 되냐는 둘째치고, 기득권층의 블로킹에 향촌사회에서 중앙정부로 전달되기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고안된 조선의 와일드카드가 바로 ‘암행어사’였습니다.   

 

공무원들에게 암행어사로 임명받는 것은 큰 영예였습니다. 임금님의 비밀명령을 직접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백성의 목소리를 구중궁궐의 깊은 곳에만 계시는 임금님께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였기에 더욱 엄격한 마음으로 임했죠. 

 

그러나 스리슬쩍 룰루랄라 칼퇴하려다 암행어사로 갑작스레 임명받은 조선판 관종 박래겸(朴來鎌, 1780~1842)은 예약된 개고생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곧 기운을 차리고 ‘관종기’를 무럭무럭 뽐내며 암행어사 일을 즐기게 되는데요.

 

(참고로 순조는 정조대왕의 아들이며, 순조 때부터 조선이 수직 낙하하며 기울기 시작합니다. 탕평이 실패하고 붕당정치가 약화되면서, 권력이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국정이 운영되는 ‘세도정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박래겸(朴來謙, 1780~1842)은 순조 때의 문신으로 『서수일기(西繡日記)』의 저자입니다. 『서수일기』란 박래겸이 평안남도 암행어사를 재임하며 기록한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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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관종이라 공무와 더불어 겸사겸사 달콤살벌한 로맨스를 즐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박래겸. 특히, 그는 기생과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기록도 가감 없이 기록해두었는데요. 퓨전 사극에서 등장할 법한 기생과 어사의 로맨스는 늘 박래겸의 능글능글한 수작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박래겸의 암행어사 임명일부터의 스토리는 1편에서 링크) 

 

 

서수일기로 보는 ‘관종 암행어사’

 

1822년 4월 14일 

 

나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수십 자루의 붓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관아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해주에 사는 사람인데, 유배가 풀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먹을 게 없어서 그런데, 사또께 붓이라도 팔아 여비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하며 반신반의했고, 쌍륙(보드게임)을 하고 있던 기녀들은 말없이 (쌍륙의) 말을 놓을 뿐이었다. 나는 기녀들 옆으로 가, 대신 말을 놓아주었다. 한 기녀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을 붙였다.

 

“손님의 솜씨는 좀 놀아본 듯하고, 말씀은 젠틀하니, 거지라고는 볼 수 없는걸요?”

 

이에 나는,

 

“어째서인가? 기녀들은 사람을 많이 겪어서 사람 보는 눈도 확실하다 하던데, 그대의 눈은 영 틀렸구먼”

 

“오늘 밤 저의 집에 와주시면, 제가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모아 놓아 내기 쌍륙이나 한 판 열겠습니다.”

 

“아니, 나 같이 땡전 한 푼 없는 구걸꾼이 무슨 돈이 있어서 노름을 하겠소.”

 

그러나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가 조용히 일어나자, 그녀도 조용히 나를 따라오며, 자기 집은 저쪽이라며 가리켰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에헴, 그럼 오늘 밤에 놀러 가리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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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혜원풍속도첩>에 나오는 ‘쌍륙놀이에 빠지다’

 

신분을 속이고 관청으로 들어간 그는, 영 자신의 신분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헤집고 나아가, 낯짝 두껍게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곤 한창 보드게임을 즐기는 기녀들에게 훈수 겸 말잡이 역할을 해주죠.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쌍륙 한두 판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기녀들은 바로 눈치챕니다. 

 

기녀들에게 슬쩍 던지는 한 두 마디의 농담도 예사롭지 않았죠. 그의 신분을 눈치챈 기녀의 농담 섞인 추궁에도 그는 능글능글하게 대처하다가, 쌍륙 파티를 빙자한 밤 초대를 받습니다. 

 

밤새 신나게 논 박래겸은 다음 날 우디르급 태세 전환을 하면서, 함께 놀던 기녀들을 떠보는 짓궂은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1822년 6월 3일 

 

어젯밤 함께 놀았던 기생들이, 이제는 다들 빙 둘러서서 일하고 있었다. 어사임을 밝힌 나는 그녀들에게,

 

“에헴, 그대들은 내 얼굴을 기억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녀들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할 뿐이었다. 아마 내가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해 알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기록을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이 어사인지, 유흥 관광객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죠. 하지만, 박래겸이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사의 일을 수행할 때는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백성들의 민심을 들을 땐 그 누구보다 정직하고 공정한 자세로 임했죠. 어느 날, 박래겸은 우연히 들어간 민가에서 백성들의 필터링 없는 날 것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1822년 4월 21일 

 

길을 가다가 퍼붓는 소나기를 만났다. 나는 비를 피하고자 한 가족이 사는 민가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 아기가 젖을 달라고 칭얼대자, 할머니가 아이를 달래며,

 

“울지마라! 아가야 울지마! 어사가 오신다!”라고 혼내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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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할머니의 옛날이야기 풍속화>

 

그녀는 내가 어사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어린애를 겁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듯했다. 나는 물었다.

 

“어르신. 어사가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만, 어린애가 그 무서움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요즘 어사가 여기저기 암행하여 돌아다닌다고 해서, 이 마을의 공무원들이 모두 겁을 먹고 덜덜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애를 어르려고 하는 말입니다.”

 

“아니, 어사가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데, 그자들은 대체 뭐가 무섭다는 말입니까? 죄 있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죄가 없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나의 반문에 그녀가 대답했다.

 

“나그네 양반.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나마 암행어사가 한 번 다닐 때면 관리나 마을의 힘 있는 자들이 한껏 몸을 사릴 뿐입니다. 아, 어사가 365일 내내 다닌다면, 힘없는 백성들도 그럭저럭 살만할 텐데요.”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 없이 있다가 조용히 나왔다.

 

젖을 보채는 아이에게 호랑이나 곰처럼, ‘어사가 잡아간다’라고 겁주는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뼈가 가득했습니다. 

 

어사가 다닌다는 소문이 들리면 공무원들이 한껏 몸을 움츠려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는 이야기와, 요즘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는 당시 관료 사회의 부패가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 실감하게 합니다. 만연한 부조리와 일상적인 청탁, 19세기의 조선은 이렇게 침몰해가고 있었죠.

 

그래서 할머니는, “맨날 어사가 다녔으면 좋겠다”라며 하소연합니다. 박래겸은 그 말에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조용히 집을 나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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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겸은 이 일기에 붙여, ‘이래서 어사 제도가 필요하다’라고 씁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쯤 되면 어사 제도로도 답이 없을 만큼 시스템이 곪아 터졌다고 볼 수 있겠죠.

 

심지어 어떤 공무원들은, 어사가 뻔히 도내를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백성들의 등을 처먹을 간 큰일을 벌였습니다. 박래겸은 그 현장을 직관할 수 있었는데요. 몰래 숨어든 박래겸이 관찰한 환곡 제도 악용 현장, 함께 보시죠.

 

 

1822년 4월 28일 

 

읍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 틈에 섞여서 창고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니, 이봐 김 선생, 쌀이 대체 이게 뭔가? 이런 나쁜 쌀을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사또는 어딨어. 당장 사또 나오라고 해! 암행어사가 내려온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어떻게 이런 간사한 짓을 한단 말인가. 우리보고 이런 질 나쁜 곡식을 먹고 버티라는 말인가!”

 

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한 아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에 이어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은 조선 사람들의 단맛 짠맛 나는 일기를, 우리 시대의 ‘김 씨 아조씨’의 삶과 야무지게 비벼놓은 책입니다. 저 혼자 읽기엔 아까울만큼 재밌는 책이라,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암행어사라니!」에 수록된 에피소드를 살짝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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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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