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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베예능사 이야기를 다룬 책

 

코베예능사가 연예기획사로 성장세를 보인 배경에 야마구치구미의 폭력이 있었다. 또한 야마구치구미가 새로 나와바리를 획득함에 있어 코베예능사의 연예 공연은 실마리가 되었다. 서로 이용하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야쿠자 조직이 연예 흥행을 주름잡는 방식에 대해 어떤 작가는 이와 같이 분류하고 있다.

 

①연예인을 전속 계약 내지 강력한 영향 하에 놓아 해당 연예인의 흥행권을 독점하는 방식

②조직의 세력을 배경으로, 나와바리 안에서 치러지는 흥행을 관리하는 방식

③마구잡이식 진출, 예를 들어 동네 야쿠자 세력과 공동으로 흥행을 치르면서 진출의 실마리로 만들거나 다른 야쿠자 조직의 나와바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흥행을 치르며 동네 세력을 엎어누르는 방식

 

야마구치구미의 경우 코베예능사가 미소라 히바리 같은 스타를 데리고 있으면서 지방 야쿠자 조직에 공연을 같이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지방 야쿠자로서는 야마구치구미가 무언가를 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거절하기는 어려운 데다(그야말로 배경에 야마구치구미가 있기에), 어쨌든 같이 공연을 주최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확실하였다. 결국 코베예능사의 공연 제안을 받아들이고, 코베예능사는 동네 야쿠자한테 코배예능사 산하에 들어갈 연예기획사를 세우게 함으로써 동네 야쿠자 조직까지 야마구치구미의 산하로 편입해 버린다.

 

한편 만약 동네 야쿠자가 코베예능사의 제안을 승락하지 않으면 코베예능사가 단독으로 흥행을 치르면서 동네 야쿠자가 시비를 걸어 오는 것을 기다린다. 야마구치구미는 애초부터 승산이 있어서 진출하는 것이며 동네 야쿠자는 자기가 운영하던 연예사를 코베예능사(실질적으로는 야마구치구미)가 매수한다.

 

이러한 방식은 위 분류의 ①과 ②를 선택적으로 쓰며 때로는 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코베예능사는 서서히 ③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화시키면서 종전부터 본거지였던 오사카∙효고는 물론, 시코쿠(四国), 츄고쿠(中国) 지방 일대의 흥행권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다. 산하에 오사카예능사, 야나가와예능(柳川芸能), YK프로덕션, 시마다예능사(島田芸能社), 우메신기획(梅新企画) 등등 잇따라 계열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1958년 4월, 코베예능사는 정식으로 주식회사로 전환하며 도쿄와 오카야마에 지사를 설립하였고 연간 1억 엔을 웃도는 수익을 올렸다. 조그마한 방에다 전화기 한 대만 둔 사무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야쿠자와 흥행이라는 관점에서는 위에 언급해 온 연예 공연과 더불어 절대 빠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바로 프로레슬링이다. 복싱 링 비슷한 링을 이용해서 힘과 기술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레슬링, 엔터테인먼트 내지 쇼로서 레슬링이다. 이번에는 연예기획사와 함께 거대한 수익원이 된 프로레슬링 흥행과 야마구치구미의 관계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자. 

 

 

1. 역도산(力道山)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이 싹튼 계기는 한 스모(相撲, 일식 씨름) 선수가 스모계를 뒤로 한 것에 있다. 그의 이름은 '역도산(力道山)'. 사생활에서는 모모타 미츠리로(百田光浩)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으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재일 조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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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여름, 그는 타마노우미 우메키치(玉ノ海梅吉) 오야카타(親方), 스모베야(相撲部屋, 스모 선수들이 소속하는 단위)를 주재하여 후진을 육성하는 스승)가 운영하는 니쇼노세키 베야(二所ノ関部屋)를 떠난다.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영화 "역도산"에서 그려졌다. 즉 스모계의 계급상 두 번째로 높은 오제키(大関) 승진을 앞두면서도 스모계에 뿌리내린 조선인 차별 때문에 승진하지 못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역도산은 술만 마시면 난행을 벌인데다 금전문제도 있어서 타마노우미 오야카타한테 자주 질책당하다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아니면 결혼을 생각했고 당시 스모 선수의 보수로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아마 비중은 달라도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싶다.

 

스모계를 떠난 역도산에게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이 나타난다. 닛따 신사쿠(新田新作)라는 남자는 니쇼노세키 베야의 타니마치(タニマチ, 후원자)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극장 중 하나인 메이지좌(明治座) 사장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관동국수회(関東国粋会) 산하 닛따구미(新田組)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메이지좌를 손에 쥔 것은 원래 닛따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영위하다 미군에 의한 공습을 받은 후처리나 점령군 캠프 건설로 번 돈으로 메이지좌를 복구하며 매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래 모습은 야쿠자라 할 수 있겠다.

 

스모계를 떠난 역도산은 닛따 밑에서 공사 현장의 감독 겸 경비원으로 일한다. 그러던 중 도쿄∙시바(芝)에 있는 캬바레에 놀러갔고, 미국 출신 프로레슬러, 보비 브런즈(Bobby Bruns) 일행과 다툼을 일으킨다. 재미 있는 것은 이 다툼이 계기가 돼서 역도산이 미국 프로레슬링계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역도산이 보비 브런즈의 소개로 미국 프로레슬링계에 입문한 것이다.

 

그 후 역도산은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하와이를 시작으로 미국 본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프로레슬러로서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적 레슬링/복싱 전문 잡지 "복싱 매거진"은 특집 기사로 그를 소개하기까지 하였다. 스모의 길에서 좌절한 역도산은 프로레슬러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2. 프로레슬링계에 진입하는 야마구치구미

 

프로레슬러로서 성공을 거둔 역도산은 일본에서도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르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뒷배가 필요하였다.

 

여기서 또 등장하는 것이 "흥행계의 챔피언" 나가타 사다오(永田貞雄)다(나가타 사다오에 대한 관련 링크 (1), (2)). 나가타는 니쇼노세키 베야의 후원자였던 닛따 신사쿠의 오래된 지인이다. 그리고 관동 지방을 고장으로 한 야쿠자들은 에도시대 이래 정권이나 재계와 깊은 관계에 있어 왔다. (물론 흥행업의 프로인 나가타가 역도산의 구상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뒷배를 봐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역도산은 닛따, 그리고 그를 통해 협력을 얻게 된 나가타를 뒷배로 두고 요시모토흥업 사장인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를 창업한 하야시 세이 친동생)를 비롯 재계인을 설득, 1953년 7월에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日本プロレスリング協会)'를 결성했다. 회장으로 전(前)농림대신이자 요코즈나 심의위원회(横綱審議委員会, 스모 선수를 스모계 최고위인 요코즈나로 승진시키는지 여부를 심의하는 위원회) 회장을 맡았던 사카이 타다마사(酒井忠正)를 세웠고, 이사장은 닛따가, 기타 요직은 정재계 인사들이 맡게 되었다. 여기에 관동지방의 야쿠자가 뒤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요코즈나의 꿈을 포기해서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든 이가 요코즈나 심의위 회장을 협회 회장으로 모셨다니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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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과 샤프

 

이후 프로레슬링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나가타가 느꼈던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1954년 2월에 기획된 벤 샤프/마이크 샤프 조(이른바 "샤프 형제") 대 역도산/키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의 태그 매치(Tag Match, 레슬러 2명으로 구성된 팀끼리 치러지는 시합. 링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는 각 팀 한 명씩. 종종 혼란스러운 장면이 연출되는데 그것이 이 시합 방식의 재미이기도 함) 순행은 각지에서 초만원을 기록하였다. 입장료 총액이 당시 프로 스포츠의 신기록을 경신하였다.

 

일본이 패배를 당한 미국에서 온 샤프 형제는 마치 미국의 상징과 같았다. 시합 개시 직후에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다가 아주 교묘한 타이밍으로 틈을 잡고서는 가라테 찹(空手チョップ) 일섬!! 미국 레슬러의 거대한 몸통이 링 바닥에 무너지는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역도산에게 자기를 투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역도산이 (실제로 그가 차별당했는지, 당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를 떠나서) 조선인이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바이다. 참고로 역도산과 태크팀을 이루던 키무라 마사히코 선수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재미있지만 그에 대해선 다른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고, 이제 화제를 타오카 카즈오로 돌리고자 한다.

 

역도산이 주도해서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가 설립될 무렵, 관서 지방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오사카를 거점으로 한 전통 야쿠자 조직인 사카우메구미(酒梅組) 3대 째 쿠미쵸, 마츠야마 쇼지로(松山庄次郎)가 취임하면서 전일본 프로레슬링 협회가 창립된 것이다. 상담역으로 코베혼다카이의 혼다 진스케(本田仁介), 이사 자리에는 오사카 와나라구미(倭奈良組)의 이시다 이쿠죠(石田郁三), 도이구미(土井組)의 나가타 쿠마키치(永田熊吉), 그리고 타오카 카즈오가 앉았다. 관동 지방의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와 비교하면 야쿠자색이 훨씬 선명하기는 한데, 일단 관동의 협회에 맞서 관서 지방에서도 프로레슬링 협회가 설립된 셈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성공시키려던 생각하던 이는 타오카 밖에 없었다는 견해가 있다. 먼저 상담역을 맡은 혼다 진스케의 인간 관계다. 혼다는 전쟁 중부터 야마구치구미 2대째 야마구치 노보루를 따르면서 조직이 응원하던 타마니시키(玉錦) 선수가 소속하는 니쇼노세키 베야(역도산이 소속하던 스모 베야)에 출입했다. 입막(入幕, 스모계에서 쥬료(十両) 이상의 지위에 들어감)하기 전 역도산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다 나가타 사다오와 새로운 예능 흥행에서 제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관동 지방 야쿠자가 꾀하는 자리에 끼어들기 어려웠단 사정이다. 게다가 전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는 역도산과 같은 스타성이 있는 레슬러가 없었다. 그나마 흥행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 관서 지방의 대오야붕들이 대거 모여 있고 특히 흥행력이 뛰어난 야마구치구미가 뒷배를 보고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결국 전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해체되었고 국제프로레스단, 아시아∙프로레스, 동아프로레스, 동화프로레스 등등 약소 집단이 할거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 와중에도 타오카 카즈오만큼은 코베예능사의 흥행력을 배경으로 프로레슬링계에서 위상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던 1956년 10월, 여러 프로레슬링 단체가 합동해서 체중별 선수권을 치른다. 이를 계기로 산산조각이 났던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병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사실상 역도산을 데리고 있는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로 통합되어 갔다. 프로레슬링 단체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맙소사 타오카 카즈오가 부회장에 취임했다. 당초 꾀했던 그림과는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타오카의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낸 셈이다.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 부회장이 됨으로써 프로레슬링 흥행에 깊이 관여하기 위한 디딤돌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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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경기를 보기 위해 길거리 텔레비전 앞에 모인 사람들

 

 

3. 프로레슬링 흥행을 주름잡는 야쿠자

 

타오카 카즈오는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운영 방식을 회상하면서 훗날 "전국 제패"로 불리는 세력 확장의 의도는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조직 차원에서도 시노기(수익원)를 확보해야 된다고 명시했었고,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시노기를 위한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도쿄는 야마구치구미에 있어서도 매우 매력적인 시장임은 틀림없었다.

 

1963년 2월, 타오카는 우익의 거물, 코다마 요시오(児玉誉士夫)의 중개로(일설에는 역도산이 중개인이 되었다고도) 도쿄에 본거지를 둔 도세이카이(東声会) 회장,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와 형제 사카즈키를 맺는다. “황소”라는 별명의 마치다의 본명은 정건영(鄭健永). 2차대전 후 긴자(銀座)에서 구렌타이(愚連隊, 불량아 집단)로부터 시작해서 1,500명의 조직원을 데리고 있는 조직의 오야붕이 된 재일교포 야쿠자의 대표격 중 하나였다. 이 마치다 히사유키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서 감사역을 맡아 흥행권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타오카는 마치다의 "형"이 됨으로써 전국의 프로레슬링 흥행을 콘트롤할 권한을 산하에 두었다.

 

타오카와 마치이의 형제 사카즈키를 계기로 전국의 프로레슬링 흥행권은 지역마다 명확히 할당되었다. 먼저 하마마츠(浜松)보다 서쪽은 야마구치구미, 관동 지방은 마치다가 이끄는 도세이카이가 맡게 되었고, 동북 지방은 도세이카이와 호쿠세이카이(北星会, 코다마 요시오 밑에서 일하던 오카무라 고이치(岡村吾一)가 결성)가 나누어 가졌다. 요코하마 및 시즈오카는 킨세이카이(錦政会, 이나가와카이(稲川会)의 전신. 코다마 요시오가 고문을 맡음)가 관리하게 되었다.

 

당시 프로레슬링의 흥행 수입은 막대했고 일설에는 역도산의 연간 수입은 요코즈나(스모계 최고위)의 10배를 웃돌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프로레슬링 흥행을 둘러싼 이권 다툼은 치열하였는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타오카 야마구치구미가 해결에 나섰다. 말하자면 타오카 야마구치구미는 프로레슬링 협회 안에서 발생하는 트러블을 제어하면서 분할 통치 체제를 지키는 역할을 했었던 셈이다. 또한 협회가 낳는 수익이 많을수록 협회에서 빠져나가서 독립하려는 움직임도 잦았다. 그럴 때 역시 타오카가 나서서 억제했다고 한다.

 

유세프 터키(본명 유세프 오마)라는 프로레슬러가 있었다. 그는 일본 지배하 사할린에서 터키인 부모 밑에 태어났고 프로레슬러로서 역도산의 선배자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크나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타오카 카즈오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역도산이 그렇게나 성장했던 것은 야마구치구미 3대째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요. 프로레슬링계에서의 이권 다툼은 타오카 씨가 절대로 방치하지 않았죠"

 

이러한 장면에서도 타오카 카즈오가 대오야붕이라 불러지는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 (15)…케츠모치(ケツ持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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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연예계나 프로레슬링계와 야마구치구미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호혜적 관계에 있었단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야쿠자 조직이 옹호해주며 그 대신 어떤 이익을 받는 일, 또한 그 일을 해주는 조직을 케츠모치(ケツ持ち)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야쿠자 조직에 옹호받는 대상은 해당 조직이 나와바리로 하는 동네에 있는 술집이나 상점 등이 전형적인데 연예인이나 프로레슬러들도 케츠모치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거죠. 요새 단속이 강화되면서 케츠모치로 큰 수익을 걷기가 어려워졌지만 케츠모치의 관습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술집이나 상점 입장에서도 케츠모치를 이용하는 장점은 있었죠(물론 해당 나와바리에 있는 한 이용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지만요). 예를 들어 가게가 불법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어서 경찰에 의지할 수 없다든가, 술집 같은 경우에는 손님이나 다른 가게와의 트러블을 남모르게 처리하고 싶어할 때도 있을 것이죠. 또한 해당 지역에서 아예 경찰이 기능치 못하고 있는 경우 등등. 과거에는 케츠모치가 그나마 존재할 의의가 있었다고 하는 소리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원래 "케츠(ケツ)"는 엉덩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고, "모치(持ち)"는 동사 모츠(持つ, 가지다)의 이른바 ます형(따라서 명사로도 사용됨)이죠. 케츠는 비유적으로 사물의 마지막 부분, "맨 끝"을 일컫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케츠모치"는 "뒤처리를 해줌"을 의미하게 됐고 뒤처리는 귀찮기 마련하기에 어느새 "귀찮은 일을 처리해줌" 정도의 뜻이 된 것 같더라고요(사전에 따라 여러 설이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죠).

 

최근에는 "케츠=맨 끝"이라는 등식으로 연상해서인지 줄을 이룬 요소의 맨 마지막 것을 가리킬 경우도 있다네요. "저는 어릴 적에 폭주족에 속했는데 은퇴하기 1년 전부터는 케츠모치를 담당했었습니다." 하면 폭주족을 빠져나가기 전 1년 동안 케츠모치를 했었고 그만큼 주요 구성원으로 할약했었다는 뜻입니다. 폭주족의 케츠모치는 폭주족 편대를 쫓아오는 경찰차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기합이 있는 놈"만 맡을 수가 있기 때문이죠(어디까지나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정보에 기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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