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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2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 자리에서 502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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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오(이하 마): 독자들 중에 산만씨에 대해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산만언니(이하 산): 저는 1995년 6월 29일 서초동에 있었던 삼풍백화점에서 사고를 당하고, 부상을 입고, 살아남아서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라는 책을 쓰게 된, 필명 산만언니라고 합니다.

 

마: 26년 전.

 

산: 예.

 

마: 제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곤혹스러웠던 점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저의 특정한 질문이 산만씨의 그 어떤...

 

산: 트라우마를?

 

마: 예. 자극하거나, 악화 시킬 수 있는 지점들이 있지 않을까. 인터뷰어로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늘 인터뷰는 좀 가벼운 분위기로 진행하면 좋겠어요.

 

산: 네. 그런데, 그냥 물어보셔도 돼요. 왜냐하면, 그날에 대해 이미 많이 말했어요. 또 26년 동안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를 받았고요. 제가 더 이상 울지 않으면 사실 그거는, 치료가 된 거거든요. 그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고생하는 거죠. 그 일에 대해서 말하는 걸로 제가 뭐 더 상처받고 그렇지는 않아요.

 

마: 어쨌든 당시 순간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괴롭지 않으실까 해서요.

 

산: 그거는 괜찮아요.

 

마: 사전에 다른 인터뷰라든지 자료를 일부러 안 봤어요. 왜냐하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잖아요. 반복되고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한 증언도 어차피 반복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산: 맞아요. 네.

 

마: 중복되는 질문을 피하자는 생각을 하지 말자. 그냥 백 번, 천 번, 오히려 반복하는 게 더 맞지 않나 싶어서 다른 인터뷰를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할지라도 양해해 주셨으면 해요.

 

산: 네. 맞는 말씀이세요. 저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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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당하다

 

마: 책 제목이 <저는 삼풍백화점 생존자입니다>인데, 우리가 보통 생존, 생환, 이런 말을 쓰잖아요. 그런데 그 단어 이외에 더 적당한 다른 말이 없을까요? 무슨 얘기냐면, 생존, 생환은 말 그대로 살아 돌아왔다. 살아남아 존재한다는 뜻이잖아요. 전쟁터에 가서 내가 살아 돌아오거나 살아남았다라고 하면 납득이 되는데,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전제로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지는 않잖아요.

 

산: 생존을 당한 거죠. 저는.

 

마: 음. 그렇죠.

 

산: 전쟁하고 비슷한 상황이었고요. 그냥 그 자리에서 무차별하게 사람들이 죽었고. 그러니까 저는 죽음을 스쳐 지나갔거든요. 제가 원래 있던 동은 천장하고 바닥이 붙어버렸어요. 사고 나기 직전에 누가 불러서 안 무너진 동으로 이렇게 어? 이러고 가다가 사고를 겪은 거였어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어쨌거나 거기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생존자라는 말이 맞을 것 같았어요. 백화점에 생존하러 가지 않죠. 그게 당연한 건데, 저는 생존 당한 거죠. 그러니까 환경이 전쟁터로 만들었고 거기서 살아남았으니까 그 적합한 단어가 없더라고요. 다른 대체할 만한 단어가.

 

마: 공교롭게도 요새 유사한 일이...

 

산: 반복되고 있죠?

 

마: 오늘 미국 마이애미에서 아파트가 무너졌대요. 그래서 지금 거의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이 됐다고. 태반이 죽었겠죠. 얼마 전엔 중국에서 어떤 건물이 무너지고, 우리나라에서도 광주에서 철거하다가 무너져서 버스를 덮치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그런 유사한 사건을 뉴스로 접할 때 어떤 느낌이세요?

 

산: 사람들이 많이 물어보는 게, 해마다 “6월 29일에 기분이 어떠냐”예요. 그건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아~  29일이 지나갔구나’는 알겠는데 그때마다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요. 이런 참사를 생각하면 그 유가족들이나 희생자나 그런 분들 생각에 남들보다 한 번 더 마음이 아프죠. 제가 세월호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 이유도 그래서였어요. 내가 겪었으니까. 그래서 훨씬 더 감정이입이 됐죠.

 

마: 흔히 ‘이불킥’이란 말 쓰잖아요. 아무 맥락도 없이 예전에 잠깐 있었던 민망하거나, 창피하거나 또는 분노가 일거나 어떤 특정 감정이 느닷없이 툭 튀어나오는 것.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공포, 분노, 이런 게 툭 튀어나오나요?

 

산: 그게 바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죠. 전에는 성격이 그렇게 예민하거나 불안감을 느끼질 못했어요. 근데 그날 이후로 제 성격도 많이 변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스트레스 지수 전체가 10이라고 하면 저는 남들과는 다르게 7까지는 평소에도 늘 채워져 있는 거예요. 나머지가 채워지면 폭발하는 거죠. 이건 제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지금도 약을 먹고 있어요. 그래서 이거는, 생의 마지말 날까지 제가 조절을 하며 살아야 돼요. 정신과 선생님이 저한테 결혼하지 말라 그랬어요. 결혼하면 스트레스 받을 일 많으니까.

 

마: 육아라든지?

 

산: 그렇죠. 육아라든지, 뭐 시댁이라든지. 그 이야기를 들은 게 제가 30대 초반이에요.

 

마: 말 그대로 영구적 후유 장애네요.

 

산: 맞아요. 그러니까 의사가 결혼을 권유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과 스트레스가 내재돼 있죠.

 

마: 제가 전문가는 당연히 아니지만, 이성과의 사랑이랄까. 육아를 통해서 얻는 기쁨도 있지 않을까요? 상쇄되는..

 

산: 저는 끝을 봤잖아요.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고한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허무하게 가는 걸 봤기 때문에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걸 체감 했잖아요. 눈으로 직접 보는 거 하고, 그냥 귀로 듣는 거 하고는 정말 달라요. 그 광경을 눈으로 피부로 직접 경험한 저로서는 이런 불완전한 세상에 애를 낳는 게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도, “나 영원히 사랑할게” 그런 약속이 너무 우스운 거예요. 그렇게 된 거예요. 시니컬해지고, 냉소적이고, 무감각해지고. 타인에 대해서 공감하려 하지 않고. 왜냐하면, 내가 가장 소중하고, 나 살아 있는 게 소중하고, 이 사람들은 어차피...(한숨) 그러니까 제가 지금도 어떻게 보면 무감각증에 걸려 있어요. 보통 이렇게 책이 나오고 잘 팔리면, 매대에 책이 깔렸다면서 사람들이 나한테 사진 보내주고 그러면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이것조차... 트라우마의 후유증인가. 파리로 여행을 갔는데 사람들은 다 좋다는데 저는 아무 느낌이 없고. 

 

마: 일상생활의 소소한 재미 같은 게...?

 

산: 그런 걸 못 느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아세요?

 

마: 예를 들어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건...

 

산: 그런 건 감독이 의도한 대로 울어요. 그 포인트에서. 하지만 그건 내가 타인에게 진심으로 공감한 게 아니죠. 진심으로 뭔가에 울림이 온다거나 감동을 받는다거나 하는 게 없어요. 사람이 건조해지는 거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친한 아주머니가 저에게 자기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분이 계시던 암 병동에 여덟 명이 같이 있었대요. 그 얘길 듣는 순간, 그 여덟 명 얘기를 나한테 다 하려고 그러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냥 듣기 싫은 거예요. 뭔지 알겠어요?

 

마: 저는 모르겠는데요.

 

산: 보통 남들이 그런 얘길 하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막 가슴 아파하고 울어요. 그 얘기를 듣고. 그런데 나 혼자 계속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나 할까요.

 

마: 일상생활이 가능은 하지만, 예전보다 그런 부분들이 깎여 나갔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산: 네. 그렇죠. 배워야 돼요. 배웠어요. 그리고 상상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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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로부터의 각성

 

마: 그날의 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가하시는지 궁금해요. 이를테면 지진 같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적 재해의 피해자라고 바라보는지, 아니면 어떤 악의를 전제한, 악의에 의한 범죄의 피해자로 스스로 인지하시는지.

 

산: 세월호를 겪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자연재해처럼.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운이 나빴지. 그 안에서 특별한 누군가가 죽은 것도 아니고. ‘하필 그런 일이 있었을 때 그 자리에 있었지. 뭐’라고. 그런데 세월호를 보면서 ‘아!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저는 경험적인 데이터가 있잖아요. 전 국민이 다 가슴 아파하고 전 국민이 한 사람씩 살아나올 때 좋아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심지어 저는 조순 (당시 서울) 시장이 병원까지 찾아왔었어요. 정부 당국자들이 당연히 사과를 하고 애썼단 말이죠. 한 사람을 살리려고. 그런 걸 봤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는 안되어도 용서가 되고 납득이 가능했어요. 그런데 세월호는 달랐어요.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를 지켜보며 ‘내가 그 일에 대해서 침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미리 얘기하고 다녔다면 이런 일이 조금, 그래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마: 안전에 대한 사회적인 환기라든가.

 

산: 그렇죠.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더. 제 생각에, 이런 안전사고에 대한 예방 같은 건 혼자서 못해요. 기획해야 되고, 사람들이 공감해야 되고, 절대로 혼자서 못해요.

 

마: 사회 전체가 합의를 해야 되겠죠.

 

산: 네. 시민사회가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문화가 깔려 있어야 되는 건데, 그게 여태까지도 미비하다는 것에 화가 났죠.

 

마: 사건 당시에 어마어마한 보도량이 쏟아졌잖아요, 그 후에라도 삼풍 관련 뉴스를 접하지 않으셨나요?

 

산: 굳이 일부러 안 봤죠. 사실은 세월호 사태 때도 제가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 안 봤었어요. 근데 이게 참 운명인지 우연인지, 세월호 막사로 제가 출장을 가게 됐단 말이에요. 다니던 회사에서 거기다 부스를 차렸기 때문에 출장을 가서 보게 된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지.

 

마: 팽목항 현장 말씀하시는 거죠?

 

산: 네. 팽목항도 가고 진도 체육관에도 있었는데. 알잖아요. 내가 겪었던 삼풍 사고는 진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난리가 났었단 말이에요. 근데 너무 이상한 거예요. 이건 이상하다, 이상하다. 조명탄만 팡팡 쏘고 아무도 안 구해. 계속 비교하게 된 거죠. 내가 겪었던 일들과 이 사람들. 그 후에 이 사람들은 계속 길거리에 나와서 항의하고 그러니까. 느낀 거죠. ‘아니야. 이건 잘못된 거야’라고. 세월호가 저를 각성시켰죠.

 

마: 제가 최근에 어떤 미디어를 통해서 봤는데, 삼풍 회장이 건물 붕괴 당일 오전 여덟시에, 안 좋은 조짐들이 있으니 명품이나 보석 같은 걸 먼저 대피시키라고 지시했다는 거예요. 이런 걸 보면 어떤 악의를 전제한 범죄의 피해자다라는 구체적인 원망을 가질 수도 있잖아요.

 

산: 그 사고 나고 나서 국가나 시민사회가 다 같이 적극적으로 그 사람들을 미워해 주고 그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서 수감되는 것까지 다 보여줬어요. 그러니까 징역 칠 년이든 어쨌든, 나는 그걸 보면서 아우~ 저 새끼 들어갔네. 이러면서 약간 해소가 됐단 말이에요. 다 같이 욕해주니까,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더 이상 원망하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그런 일을 겪었구나라고 오히려 더 캐주얼하게 지날 수 있었어요. 

 

그게 나를 해치는 줄도 몰랐어요. 그렇게 그냥 지나갔죠. 당시만 해도 정신과라면 조현병이나 진짜 불 지르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만 가는 데로 생각됐기 때문에, 그때도 이상한 증상이 계속 있었는데 아무도 “너 이상하니까 병원 가 봐”라고 안 했어요.

 

마: 일테면 직장동료라든지, 주위 사람들은 산만씨가 삼풍 생존자란 사실을 다 아시나요?

 

산: 아니요. 몰랐어요. 삼풍 참사 최후 생존자가 3명이 있어요. 이분들 인터뷰가 안 나오는 이유는, 이제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일상이 지켜지길 바란단 말이에요. 저도 한 20년 가까이 아무한테, 그러니까 그 일을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얘기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삼풍 생존자라고. 근데 2014년 세월호를 겪으면서 사람들한테 자꾸 얘기하는 거예요. “저, 삼풍에서 살아남았어요.” 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세월호에 더 감정이입이 됐던 게 뭐냐면, 나 스무 살에 사고 당했고. 세월호 친구들 열아홉, 열여덟이니까. 그 애들이 왜 배에서 못 나왔는지도 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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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마: 삼풍 생존자란 사실을 아는 지인들과 모르는 지인들이 있잖아요. 본인 스스로가 각각에 대해 대하는 게 다른가요?

 

산: 아는 지인들하고는 거의 연락 잘 안 해요. 그렇게 연결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싫고. 모르는 사람들이 편하죠. 궁금해하고 그런 게 싫어요. 호기심을 보이고 궁금해하고 신기하고. 그게 싫어요.

 

마: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때요? 지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게 가족인데.

 

산: 그 후로 되게 속을 많이 썩였죠. 근데 나중에 알았어요. 그때는 마음이 되게 오랫동안 아팠으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가족들한테 얼마나 상처를 주는 줄 몰랐어요. 그저 계속 죽고 싶어 했으니까.

 

마: 사고를 겪고 10년 후에 자해를 시작하셨던데 10년 동안은 자각을 못하셨나요?

 

산: 계속 증상이 있었는데 제가 인지하지 못했어요.

 

마: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면 인지하지 못한 거예요?

 

산: 네.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게 아픈 상태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고. 주변에서 “너 이상해”라고 얘기를 해도 안 들렸어요. 또 의사가 말하기를 롱텀 PTSD라고, 저처럼 시차를 두고 PTSD가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러다가 10년 만에, 그때가 서른 살이었어요. 자살시도를 했고, 그때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거죠.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얘 입원시켜라. 입원시켜야 된다고 했을 때 충격을 받았죠.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2분

 

마: 참사 당일 아르바이트 하셨다는데, 어떤 아르바이트였죠?

 

산: 물품 보관소에서 사모님들 쇼핑하시기 편하게 물품을 맡아 드렸죠. 주차장으로 가시기 전에 식품관 들릴 때. 마치 목욕탕에서 번호표 주는 것처럼. 그런 거 했었죠.

 

마: 거기가 몇 층이었죠?

 

산: 지하 일층이요.

 

마: 기록상으로는 5시 52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순간을 묘사해 주실 수 있나요?

 

산: 하루 종일 더웠어요, 에어컨이 안 나왔으니까. 사람들이 식당 에스컬레이터가 어긋났고, 싱크홀 있고, 이런 얘기를 막 했어요. 그러면서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제가 진짜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한 거예요. 그게 너무 한이 됐어요. 나중에 막 악몽을 꾸고... 가전 코너에 있던 사람들하고 친했거든요. 근데 거기 다 죽었어요. 만약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면. 나중에 꿈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쇼핑하는데 나 혼자 “여기 무너져요!” 막 이렇게 소리 지르는 꿈을 계속 꿨어요.

 

마: 일종의 죄책감이었겠네요.

 

산: 그랬던 거 같아요. 되게 더웠어요. 되게 덥고 습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조금 덜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는데 무너지기 직전에 저 앞에서 누가 저를 불렀어요. 그래서 네~ 이러고 가는데, 뒤가 내려앉은 거예요. 그 굉음. 살면서 그 후로도 들어본 적 없는 큰 소리가. 큰 상판이 내려앉았으니까 그 밑에는 압력, 회오리치는 바람에 사람이 날아갈 정도였는데, 잔해가 파편이 되면 총알같이 될 거 아니에요. 그 파편에 스쳐도 상처가 벌어지는 거예요. 

 

마: 무슨 돌풍 같은 게 일어나나 보죠? 무너지는 순간에?

 

산: 욕조에 담긴 물에 손바닥을 펴서 집어넣으면 손등 위의 물이 돌잖아요. 그게 공기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엄청 큰 상판이.

 

마: 아. 푹 꺼지면서...

 

산: 그럼요. 그러면 그 속도가 어떻겠어요. 요만한 게 튀어서 살을 째면 상처가 확 벌어져요. 다리도 이렇게 여기 스쳤는데. 이렇게 주저앉으니까 이제 이렇게 스치잖아요. 앞으로 걸어 나간 바로 뒤에서 무너지면서 저는 불어오는 바람에 안 날아가려고 주저앉았죠. 그랬더니 머리서부터 발뒤꿈치까지 다 파편이 다 지나가고, 맞고 한 거죠. 그렇게 피를 엄청 흘리고. 이렇게 사람이 피를 많이 흘려도 살 수 있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그러는데 차라리 무너진 쪽이나 안 무너진 쪽 어느 한쪽에만 있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스트레스는 안 받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상황을 모르는 곳에 있다가 나왔으면 괜찮고, 차라리 무너진 데만 있었어도 어~ 안 무너진 데가 있었구나를 못 느끼기 때문에 괜찮은데, 저는 무너진 순간에 안 무너진 쪽으로 지나왔기 때문에, 너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한 발의 차이로 내가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게 나를 너무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생애의 가장 큰 고민은 대학 진학, 엄마한테 잔소리 안 듣는 거, 이런 거였는데. 그 후에는 모든 꿈이 사라진 거예요.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거예요. 대학을 가면 뭐해. 그 안에 대학 간 사람도 죽었잖아. 부자가 되면 뭐해? 그래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완전한 허무주의. 어차피 인생은 죽으니까. 사람들이 다 우습게 보이는 게, 저축은 왜 하지? 결혼을 왜 하지? 미래나 희망이 없는 거야.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이렇게 살지. 서른 살이 되면 이제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다가 대충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재미도 없고 지루한 날들이 계속 이어지고 나는 끝내 그렇게 죽겠구나란 생각을 하니까 아~ 그냥 빨리 죽어버려야지.

 

마: 그렇게 10년쯤 후에 확 터져버렸고.

 

산: 예. 그래서 아~ 그냥 빨리 죽을래. 나 이렇게는 더는 못 살겠어. 이게 10년을 견딘 후 내린 결정이었어요.

 

마: 병원 치료비야 당연하겠지만 다른 금전적 보상 같은 것도 있었나요?

 

산: 보상금이 1년 뒤에 나왔는데, 그 당시 돈으로 사망자가 4억이었어요. 부상자들도 꽤 많이 받았죠.

 

마: 근데 그래봤자 정신과 치료라든지 그런 곳에 비용으로 쓰셨잖아요.

 

산: 그러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니까요. 사람들이 왜 돈 얘기하는지 모르겠어. 세월호 아이들이 8억인데, 8억 받겠어요? 나는 열아홉 살까지만 살고 이 사고 안 겪는다고 하면 기꺼이 그 버튼 누를 거예요. 열아홉 살까지 사는 선택을 할 거라니까요. 장수하는 거 말고. 차라리 그때가 행복했어요.

 

마: 사고 겪은 이후의 삶보다...?

 

산: 예. 그때는 오락실에서 테트리스 해도 재밌고 그랬는데 사고 이후로는 너무 그런 것들이..

 

마: 무미건조해지고..

 

산: 그러니까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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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의 무례함에 관하여

 

마: 아까 얼핏 말씀하시기를 법과 시스템, 제도 이런 거 이전에 사회적인 합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신 건가요?

 

산: 세월호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지난 1월에 해경들 무혐의 처분 나고 청와대 관계자 컨트롤 타워, 지난 정권 다 면죄부 받는 거 보면서, 이게 참 여론이 7년 전처럼 뜨거웠다면 저런 판결이 났을까. 시민들의 관심이 식은 틈을 타서 이렇게 판결을 내리는구나. 그렇다면 법과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회적 관심이 먼저지. 그리고 아시다시피 광주 민주화 항쟁도 국가에서 계속 덮으려고 그랬잖아요. 근데 문화예술인들이 계속 광주를 끌고 나와서 걸었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해야 돼요. 올바른 시민 사회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면 절대로 이런 식의 결정은 일어날 수가 없어요. 

 

마: 참사의 피해자로서 제시하는 관점이 중요할 수 있겠네요.

 

산: 제가 진짜 어렵게 결정하고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사실은 세월호 유가족들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너무 무례해졌다고 할까. 사회적 참사를 겪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됐죠.

 

1월에 무혐의 판결 났을 때 세월호 가족들이 삭발 투쟁하고 문재인 정부 책임 하라 그랬더니 민주당 계열에서는 대통령 건드리지 말라. 그럼 어디 가서 얘기해요? 국민의힘에서는 당연히, 문재인 정부가 해결 못해야 좋겠죠. 안산 가족협의회 가보셨어요? 컨테이너 박스예요. 이게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줄 알고 그냥 그렇게 있는 게 지금 7년이에요. 일상을 뺏긴 채 7년을 나와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세월호를 생중계로 봤던, 세월호가 침몰하는 걸 생중계로 봤던 국민 모두가 서로를 못 믿게 되었어요. 

 

마: 나라도 그냥 각자도생으로 잘 살아남아야겠다 라는 의식들이 팽배해졌다?

 

산: 그렇잖아요. 알게 모르게. 제가 책에도 썼지만, 나만 아니면 돼, 이런 시대정신. 세월호 참사 터졌던 당시에도 고3들한테 세월호에 신경 쓰지 말라고, 세월호랑 월드컵 안 봐야 니네가 대학 간다.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이냐고요. 어느 나라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요즘 한창 떠드는 능력주의. 그게 어디서 왔어요?

 

마: 그런 사회가 지속 가능할 리 없겠죠.

 

산: 예. 그래서 이제 말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는 엄청난 재앙이다. 이게 특수한 몇 명의 불행한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천만에요. 그때 나랑 같이 사고당한 사람들 중에 엄청 잘나가는 사람들 죄다 한순간에 깔려 죽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 사고는 사람을 가리지 않아요. 근데 그 생각은 아무도 안 해요.

 

마: 잘 났거나 못 났거나 그 현장에 있었으면 다 죽은 거니까.

 

산: 예. 그러니까 그게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니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로 인해서 그냥 죽어? 내가 보기엔 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인간이 뭐가 달라. 날파리하고 똑같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일상이 있었기 때문에 침묵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세월호 얘기가 지겹다는 거예요. 그래서 2018년 4월에 딴지일보 자유게시판에 썼어요. 그것 때문에 책을 쓰게 되고, 책이 나오면서 이제 가능하면 많은 데 가서 그냥 얘기해야 되겠다. 이건 특수한 몇몇 지정된 사람들의 불행이 아니라 시대적인 불행이고 이거를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죠.

 

 

딴지일보 자유게시판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말한다

 

딴지일보 정식 연재

 

저는 삼풍백화점 생존자 입니다

 

 

 

새로운 가족

 

마: 지금 인터뷰 자리에 강아지를 데리고 오셨는데, 강아지 얘기 좀 해주세요.

 

산: 사실은 정신과 선생님이 키우라고 그래서 키우는 거예요.

 

마: 이전에는 어떤 반려동물 같은 거 없었어요?

 

산: 좀 이상한 건데, 나는 내 집에 살아있는 게 있으면 안됐어요. 날파리도 없어야 돼요. 살아 있는 건 나 혼자여야 하고 남자도 불편해요. 그냥 집에 기계가 다 작동하고 와이파이만 있으면 됐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계속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라고 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이 그랬어요. 병원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사귈 줄 몰라서 오는 거다. 넌 사귈 줄 알았는데 왜 안 만나냐. “아 싫다니까요.” 내가 계속 이러니까. 그러면은 강아지를 키우래요. 강아지를 키우면 억지로 나가니까. 내가 생각해 봤는데 싫은 거야. 왜냐하면 쟤를 책임지는 게 싫은 거야. 내가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데. 쟤가 막 이십 년까지 살면 어떡해요. 그래서 내가 싫다고 계속 그러다가, 선생님. 제가 양보해서 고양이를 키우겠습니다. 그랬더니 안된다고. 집에 더 처박혀 있게 된다고. 여튼 하도 그러셔서 마지못해 강아지를 키우게 됐어요. 유기견 임보하는 분한테서 입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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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이름이 뭐죠?

 

산: 복주요. 복주머니 할 때 복주. 복주가 칠 남매인데 구조한 분이 복희, 복만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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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면 우리 진짜 망합니다

 

마: 정리해보죠. 난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서게 됐고 그 개인적인 경험이 10년 동안 작동해 왔음에도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본인도 그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걸 인지를 못하고 지내다가 결국 터져 나왔고 그래서 자살시도를 하고 그러면서도 그걸 개인적으로만 해결하거나 발버둥을 쳐왔는데 세월호라는 사건을 마주하며 공익적인 부분을 인지하고, 그래서 발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고 책을 내셨고.

 

산: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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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삼풍 당시에도 온통 뉴스로 도배되고 세월호도 온 국민이 큰 충격에 빠졌단 말이죠. 그렇게 난리가 났는데.. 안되잖아요.

 

산: 결국 국민들의 윤리의식이 달라져야 하는 건데.

 

마: 이선호군 사고라든지 구의역 사건부터, 중대재해처벌법-5인 미만 사업장은 빠지는 바람이 설왕설래가 있습니다만-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너무 쉽게 죽어나가는 걸 좀 줄이자, 사회적 합의는 충분히 됐다고 봐요. 그렌데 안되고 있잖아요.

 

산: 제가 느끼는 건 달라요. 우리끼리 사회적 합의가 되는 게 아니라 고용주들의 사회적 합의가 되어야 하는 거죠. 저도 조직생활을 해봤지만 위에서 까라면 까요.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냥 까요. 난 전두환 밑에서 일했어도 열심히 일했겠다 싶어요. 시키면 하는 스타일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큰일난다라는 사회적 합의. 이렇게 되면 회사 망한다라는 사회적 합의. 그리고 그런 회사는 망해야 된다는 시민들의 의식. 그 수준까지 도달하는 사회적 합의.

 

그러니까 조심해야 돼, 정도가 아니라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면, ‘진짜 이렇게 하면 회사 좆돼.’ 이런 합의. 그러면 일하는 사람도 말할 수 있죠. 사장님, 이렇게 하면 우리 회사 망합니다. 근데 지금은 어때요? 그냥 해 인마. 다 그렇게 하잖아. 조용히 해. 너만 조용히 하면 그냥 넘어가. 이렇게 하면 돈을 얼마 아낀 건데. 네가 벌어올 수 있어? 말 못해요. 여태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은 다 떠났겠지. 그리고 그 자리 내려놓고 나가면서 여기까지 그래도 다른 구멍을 메꿔가면서 왔고 그렇게 세월호가 터진 거다라고 생각해요 저는.

 

마: 이 책과 그 외 산만씨의 이런 인터뷰나 사회적 발언들이 아무쪼록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데 많은 기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산: 이 책은 저 혼자 쓴 게 아니에요. 딴지일보 자유게시판에 쓴 글을 메인에 걸어주고, 퍼나르고 사람들이 보게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거죠. 제가 쓰긴 했지만 제가 만들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이 그만큼 봐주고 관심 가져주고 얘기하게끔 했기 때문에 내가 그냥 기록한 것뿐이지, 만약에 그때 그 자유 게시판에서 그냥 묻혔어 봐요. 이거 책으로 나왔을까요? 아니에요.

 

마: 개인적으로도, 산만씨의 연재 글에 불행 포르노랄까. 처참한 현장 같은 자극적인 묘사나 시선이 없는데도 독자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 신선한 의미로 다가오더라구요.

 

산: 네. 악플이 없었던 최초의 연재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러니까 그만큼 사람들 마음속에 이심전심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훈훈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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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32명이 죽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502명이 죽고 6명이 실종됐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299명이 죽고 5명이 실종됐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평균 7명, 1년에 2천여 명이 일하다가 죽는다.

 

성수대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붕괴하고,

삼풍백화점은 3개월에 한 번씩 무너지며

세월호는 두 달에 한 번씩 침몰하고 있다.

 

당신이 지게차를 운전하지 않고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지 않고 택배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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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