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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는 어떻게 구성된 국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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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관광청은 말레이시아를 ‘진정한 아시아’(truly Asia)로 홍보한다. 실제 말레이시아 도심에서는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은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기타 종족 등으로 구성된다. 

 

다종족 사회인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계는 원주민, 소수종족과 함께 ‘부미뿌뜨라’(땅의 자식)로 불린다. 말레이시아 인구 약 3,300만여 명 중에 부미뿌뜨라는 약 69%에 달하며, 그중 다수는 총인구의 55%를 차지하는 말레이계이다. 중국계는 약 23%, 인도계는 약 7% 정도를 차지한다.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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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는 말레이어이며, 영어는 상용어로 쓰인다. 초중등 교육과정에선 중국어와 인도 타밀어로 수업하는 학교의 교육과정도 공교육으로 인정된다. 중국계와 인도계는 원한다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를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물론 말레이시아 국민 교육도 함께 병행된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화교들이 이름마저 현지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말레이시아의 이러한 다문화 정책은 포용적이다. 

 

말레이시아에서 각종 양식에는 종교와 종족에 관한 정보를 표시하는 공간이 있다. 외국인의 경우는 ‘기타’에 해당한다. 종족과 종교에 따라 개인은 특정 ‘그룹’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이 종족의 구분은 단지 통계상 편의를 위한 분류 항목이 아니다.

 

 

부미뿌뜨라만을 위한 다종족 사회

 

말레이계를 포함한 부미뿌뜨라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나눠 부미뿌뜨라에게 다양한 혜택과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 대학 입시 즈음에 이러한 혜택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부미뿌뜨라 학생만이 응시하는 시험이 별도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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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사원에서 예배하는 부미뿌뜨라.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식적으로 대학 정원에 종족별 쿼터가 존재했다. 55%는 부미뿌뜨라에 할당되었다. 순수하게 성적순으로만 뽑으면 중국계가 대부분의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의대와 법대의 경우에는 더욱 엄격하게 부미뿌뜨라 우대가 적용되었다. 

 

현재는 공식적인 쿼터제를 시행하진 않는다. 그러나 부미뿌뜨라 계의 학생만을 위한 별도의 입학 전형 프로그램이 있는 등 사실상 여전히 차별적 요인이 존재하고 있다.

 

우대정책은 교육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공무원과 경찰 또한 대부분 말레이계로 구성된다. 말레이계의 고용 확대가 공공부문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특별한 허가나 면허가 부미뿌뜨라에게 특혜적으로 적용되는 것들이 많다. 특정 지역의 토지는 부미뿌뜨라에게만 거래가 허용되고, 주택구매 융자금의 이자율도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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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경찰

 

주식시장에선 상장하려면 지분의 12.5%를 부미뿌뜨라 투자자에게 할당해야 한다. 신규 부동산 개발 사업의 경우 부미뿌뜨라에게 의무적으로 일정의 몫을 할당한다. 교육, 보건, 소득수준, 부동산 소유 등에 있어 부미뿌뜨라라는 존재만으로 다양한 특혜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법을 들여다보면, 부미뿌뜨라에 대한 이런 혜택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진 않다. 법에는 부미뿌뜨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말레이시아 헌법은 말레이를 정의하고 있다. 

 

말레이계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말레이 관습을 따르며 부모가 말레이시아 국적이어야 한다. 보르네오 섬 북단에 있는 사바와 사라왁 주의 소수종족 원주민도 언급된다. 

 

헌법은 국왕이 말레이계와 이들 원주민의 “특별한 지위”를 지킬 책임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권리와 특혜라는 표현은 없다. 이러한 헌법 조항은 ‘누가 말레이인가’를 정의하는데 여전히 모호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인도계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슬림이며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부모가 말레이시아 국적이다. 헌법상의 정의에 따르면 이들은 말레이로 구분될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부미뿌뜨라에 포함되지 못한다. 말레이계를 위한 우대정책 속에서 중국계와 인도계는 2등 시민이라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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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식민지배에 의해 다종족 사회가 시작되었다

 

다종족 사회 구조는 식민지배의 유산이다. 영국은 말레이시아를 식민지 경영하며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에 집중했다. 현재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는 주석광산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말레이시아 인구가 증가한 시기도 식민지 경제 수탈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을 허용한 시기와 맞물린다. 말레이와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에 영국은 중국계와 인도계를 대거 유입시켰다.

 

1911년 반도 말레이시아(태국 남부와 싱가포르 사이의 말레이시아 반도)의 총인구는 230만 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약 30년 만에 인구는 5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1947년 말레이계는 총인구의 49%, 중국계는 38%, 인도계는 11%를 각각 차지했다. 

 

이민 초기, 어마어마한 수의 이민자는 주로 남성이었다.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민자 커뮤니티의 자연 증가율(출산율)이 낮았다. 반면 말레이계의 출산율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남성이 주를 이루던 중국계와 인도계의 남녀 성비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은 1970년 이후이다. 그리고 이즈음 출산율이 높았던 말레이계는 인구 과반을 넘으며 수적 우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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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를 받는 동안 중국계, 인도계 이주자와 말레이계는 거주지, 직장, 언어, 사회활동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영국 식민정부의 분할통치 정책은 사회통합에는 관심이 없었다. 말레이계는 주로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시간이 지나 말레이시아 독립(1957)이 다가왔을 당시, 말레이시아의 다수 중국계와 인도계는 말레이시아에서 출생한 이들이었다. 독립협상 과정에서 영국은 이 이민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협상을 주도한 말레이계는 독립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독립 과정에서 종족별 엘리트 중심의 정당들이 창설되었다. 

 

 

독립 이후의 말레이시아 

 

수적 우위로 인한 말레이계의 정치 권력 확보는 독립 이후 핵심적인 국정 현안이었다. 독립 당시 ‘말라야 연방’이었던 국가의 이름은 1963년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이 연방에 가입하며 ‘말레이시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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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 사라왁이 편입된 것은 중국계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영향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바, 사라왁 주민 대부분이 비무슬림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말레이와 정체성이 유사하다고 말레이계는 판단했다. (전술했듯이 말레이시아 국교는 이슬람교로 말레이계는 원칙적으로 모두 무슬림이다)  

 

싱가포르는 연방에 가입하고 2년 뒤인 1965년, 연방에서 출축됐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내에서 종족간 평등을 요구하고 개혁을 원했지만, 말레이 기반 집권 세력은 이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1964년 싱가포르에서 종족간 유혈 충돌이 발생하면서 종족간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말레이시아 국회에서 가결되며 싱가포르가 강제 독립된 셈이다. 그렇게 다수를 점하게 된 말레이계는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고 타 종족 정당들과 연합한 국민전선(BN)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했다. 

 

원칙적으로 모든 말레이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기에 이슬람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말레이는 무슬림이라는 등식이 있지만,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추구하는 이슬람의 방향을 두고 말레이계 내의 분화가 있었다. 

 

말레이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UMNO)은 세속적 이슬람을 표방하며 중국계(MCA), 인도계(MIC) 정당 등으로 구성된 연립정권(국민전선, BN)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보다 근본주의적 이슬람을 표방하는 이들은 별도의 정당(PAS)을 창당하며 야당으로 자리 잡았다.

 

야당 중엔 중국계를 대표하는 정당(DAP)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여당 연합에 중국계를 대표하는 정당(MAC)이 있었기 때문에 확장성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큰 틀에서 이러한 권력 구조는 정권 교체 없이 2018년까지 유지되었다. 

 

1969년 불안했던 종족 기반 정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여당 세력이 2/3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여당이 여전히 정권을 유지하기 했지만, 이전 선거에 비해 의석은 감소했고, 중국계와 인도계는 집중적으로 야당을 지지했다. 

 

말레이계와 비말레이계는 각자 자신이 승리했다며 자축하는 행진을 벌였다. 말레이계는 어찌 됐든 정권을 유지했다는 이유였고, 비말레이계는 이전 선거보다 약진한 결과를 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행진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며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른바 ‘13 May’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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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May 당시 행진 사진

 

당시 유혈사태가 예견되었음에도 경찰이 늑장 대응하는 등 사태 악화를 방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된다. 수백 명의 사망자(주로 중국계였음)가 발생했는데 이는 말레이시아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이후 정치사회 변동의 큰 전환점이 된다.

 

 

부미뿌뜨라(특히 말레이) 기득권 확보를 위한 정책이 진행되다 

 

말레이시아는 69년 유혈사태 같은 종족 간 갈등이 종족 간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 말레이계가 경제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이다.

 

신경제정책(NEP)은 부미뿌뜨라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전체 경제적 지분의 30%를 소유하도록 한다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형태의 우대 정책을 도입했다. 그렇게 부미뿌뜨라 우대 정책으로 교육받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말레이 신중산층이 생겨났다. 

 

각종 인허가 특혜를 통해 말레이 기업들도 성장했다. 말레이계 내부에서도 한시적으로 도입된 우대 정책이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국가발전정책(1991-2000), 국가비전정책(2001-2010)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우대 정책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말레이 기득권을 보전하는 것은 정권의 연장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에 집중된 정책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말레이계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한 경제적 과제였다면, 정치적 과제는 이슬람을 어떻게 대변하는가였다. 특히 1970년대 말의 이슬람 부흥 운동은 정치권이 더 적극적으로 이슬람 관련 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1981-2003년의 마하티르 총리 집권시기에 이러한 말레이 및 이슬람 관련 정책이 강화되었다. 이슬람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인 안와르를 여당으로 영입하는가 하면 국가의 대표적 건축물들이 이슬람 양식을 띠기 시작했다. (참고로 마하티르는 현대 말레이시아에서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친 정치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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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마하티르 

 

총리실 내에 이슬람국을 신설하고 국제이슬람대학교도 설립했다. 외교적으로도 대 중동 외교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반이스라엘 정책이 강화되었다. 

 

마하티르는 말레이계와 이슬람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계와 인도계의 이익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들을 교묘하게 정치에 이용했다. 그로 인해 종족과 종교가 말레이시아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마하티르의 세속적 이슬람 정책은 근본주의적 이슬람 정치 구현을 추구하는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마하티르 이후, 말레이시아의 총리들

 

마하티르 퇴임 후, 압둘라 바다위가 총리가 되었다(재임 2003-2009). 압둘라는 이슬람 전공자였으며 온건 이슬람 정책을 표방했다. 마하티르처럼 종족 간 갈등을 정치 도구로 삼는 일도 자제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는 말레이계의 현실적인 요구와 이슬람적 가치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압둘라는 조기에 총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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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바다위와 노무현 대통령.

 

이어 총리직을 승계한 이는 나집이다(재임 2009-2018). 나집은 2대 총리의 아들로 20대에 정계에 입문한 엘리트 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몽골 모델 출신 여성과의 염문설이 있었고, 그 여성의 살인사건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총리 취임 이전부터 도덕성에 큰 결함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집이 총리로서 이슬람적인 가치를 표방하며 말레이계의 지지를 얻는 것은 압둘라보다 더욱 어려웠다. 대신, 나집은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1말레이시아’ 캠페인을 전개했다. 

 

어찌 되었든 나집은 총리가 되어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2015년 사상 초유의 부패 스캔들 1MDB 사건이 터졌다. 국가투자기관으로 설립한 1MDB의 약 8천억 원 상당의 자금이 국제 자금세탁을 거쳐 나집 총리 개인 계좌로 유입된 것이다. 

 

해당 사건에는 많은 나라가 얽혀있었고, 그중 미국이 있었다. 미국 정부 당국은 관련 수사를 개시했다. 이에 대해 나집 총리는 친 중국 행보를 하는 등 외교를 본인의 정치 수단으로 활용하며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흔들리는 정권을 막을 순 없었다. 

 

2018년에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최초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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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집(좌)과 측근이자 '1MDB 스캔들' 공범 조 로우(우). 조 로우는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전 대표로부터 성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2018년의 정권 교체는 부패한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여당 세력에 등을 돌린 중국계의 민심과 부패한 정권에 실망한 말레이계를 포함해 꾸준히 역량을 구축한 시민운동의 결과로 작동한 민심의 심판이었다. 

 

말레이계 중에서도 상당수가 나집의 행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집의 친 중국 행보로 인해 철도 건설 등에 대규모 자본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고, 이에 말레이계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말레이계의 기득권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나집 정권이 붕괴되고 그 뒤 총리가 된 사람은 마하티르였다. 맞다. 1981-2003년 총리를 했던 그 마하티르다. 

 

 

다종족 사회를 표방한 마하티르 2기 집권과 반발

 

마하티르는 원래 나집을 지지했으나, 1MDB 사건이 터졌을 때 이에 대해 나집에게 문제를 제기했다가 당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통일원주민당(PPBM)을 창당했고, 야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안와르와 중국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중국계 정당 DAP와 힘을 합치며 야권연합 ‘희망연대(PH)’를 형성했다. 나집 정권을 비판하며 마하티르는 야권연합의 총리로 추대되었다.

 

마하티르는 선거 기간 중에 이러한 말레이계의 정서를 인지하고 집권 시 중국이 투자한 대규모 사업의 재검토를 약속했다. 

 

희망연대(PH)는 개혁과 다종족 사회의 가치를 표방했다. 그러나 종족 간 이권 싸움은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했다. 인종차별철폐국제조약에 서명하고자 했으나 말레이계의 이익단체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이들이 내건 구호는 ‘ 말레이, 이슬람, 국가 정체성’이다. 즉, 말레이시아는 무슬림인 말레이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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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 시내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말레이계 시민들이 ‘말레이 우대’ 정책 완화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출처-<뉴스트레이츠타임스>

 

말레이계의 저항은 상당했다. 마하티르 집권 다음 해에 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 선거에서 마하티르의 희망연대(PH)가 패배했다. 

 

부패 세력으로 낙인찍힌 말레이계 구 집권세력은 선명한 이슬람 정치를 표방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정당인 ‘말레이 정당(PAS)’과 손을 잡으며 이슬람을 부각시키는 전략으로 보궐선거에서 승리했다. 

 

그 이후 희망연대(PH) 지도부는 내분을 겪게 되며, 권력 승계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결국, 2020년 2월 ‘의회 쿠데타’가 발생하며 희망연대 정권이 붕괴했다. 차기 총리직 승계를 놓고 여당 내부에서 갈등하는 사이 말레이계를 대표하는 여야의 정당들이 내무장관이었던 무히딘 야신을 추대하며 새로운 정당 연합을 출범시킨 것이다. 

 

 

다시 부활한 부미뿌뜨라만을 위한 사회

 

2년 전에 열린 총선에서 반영된 민심과는 관계없이 정치 엘리트 간 이전투구를 통해 새롭게 다수 국회의원의 지지를 확보한 무히딘(현 총리)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국민연합(PN) 정부는 모두 말레이계 정당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종족들은 소외되었다.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국민연합(PN) 정부는 일단 코로나19 사태로 시간 벌기에 나선 형국이다. 결국 올해 1월에는 코로나 사태를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8월까지 모든 선거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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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현 총리 ‘무히딘 야신’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도 정부는 부미뿌뜨라 지원에 집중하며 많은 재원을 할애했다. 폐지되었던 총리실 내 이슬람국을 다시 되살리며 예산도 4배가량 증액했다. 현 정권은 말레이계 이익 수호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개혁은 실종되고 종족정치의 퇴행적 행태가 재현될 조짐이 보인다. 

  

종족과 종교적 다양성을 가진 다종족 사회 구조는 비록 식민지배의 유산이지만, 그 자체로 문제를 갖지 않는다. 종족 및 종교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종족정치의 폐단이 결국 어렵게 이룬 독립 이후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주의 성숙의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 말레이시아 민주화는 종족정치의 부활을 저지하는데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형종 (연세대 미래캠퍼스 국제관계학과 교수)

 

 

 

편집자 주 - 민족이 아닌 종족이라는 단어를 조금은 어색하게 느낀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엄격한 구분하에선 민족은 국민적 개념 즉, 국가 단위 정체성을 함께 내포하는 단어다. 현재 말레이시아 내 여러 종족들은 아직 말레이시아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이지 않았다. 그런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형종 교수는 ‘민족’이 아닌 ‘종족’이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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