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홍콩과 애국주의 역사학 ‘아편전쟁 담론’

 

홍콩섬은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아편전쟁 이전까진 인구 8천 명 정도의 ‘애매한’ 어촌이었다. 중앙 정부의 통제권이 미치긴 했지만, 어민과 해적들이 공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홍콩섬을 영국이 주목했다. 지금 동남아시아 지도나 세계지도를 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홍콩섬과 주룽반도가 얼마나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 

 

세계지도.PNG

 

우선 홍콩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이다. 동시에 태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나아가서 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의 해운을 연결하는 더 이상의 좋은 요충지가 없을 만큼 완벽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광동성의 젓줄인 주강(珠江)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 내륙으로 진출도 쉽다. 게다가 서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시진핑 주석의 핵심 정책인 세계를 하나의 띠와 하나의 길로 연결하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그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다.  

 

일대일로.PNG

 

홍콩섬은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항구이다. 그래서 홍콩은 옛날부터 바다를 오가는 세계인들에게 생필품을 보급하는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홍콩이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나 각종 교과서에는 아편전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서술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뒷부분에서 좀 더 다루겠다)

 

홍콩을 알기 위해선 아편전쟁을 알아야 한다. 홍콩을 말하며 아편전쟁을 피해갈 순 없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아편전쟁에 대해 개요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략적이지만 일반적이다. 

 

중국은 물론 홍콩, 심지어 한국의 중국학계에서도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담론이다. 이른바 ‘애국주의 역사학’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가해와 피해라는 틀로 근대사를 재단한다. 그것의 중심에 아편전쟁이 있고, 중국은 아편전쟁의 철저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중국이 철저한 피해자가 되어야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구한 완벽한 구세주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근대사는 오늘과 직결되어 있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의 단골 메뉴가 되는 이유이다. 

 

아편전쟁.jpg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의 개요는,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1. 청(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차(茶)였고, 영국의 주요 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2. 영국의 차 수입량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영국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 영국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청에 인도산 아편의 (밀)수출을 허가했다.

4. 이후 영국의 대중국 무역은 균형을 회복했다. 청나라 재정의 30%가 아편을 구입하는데 소비되었다.

5. 청나라 전역에 아편 중독자가 창궐하여 온 나라의 경제와 사회가 마비되었다.

6. 도광제는 호광총독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 아편 처리에 전권을 부여했다.

7. 1839년 임칙서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석회와 섞은 뒤 바다에 버렸다. 각국의 무역상인을 체포하여 앞으로 아편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8. 영국은 반발했고,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1840년 영국은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중국이 패배했다. 그리고 난징 부근의 영국 함상에서 두 나라는 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22.jpg

 

『난징 조약』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을 개방한다.

3. 전비 배상금과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을 영국에 지불한다.

4. 공행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5. 이 조약은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의 대등한 교섭의 결과이다.

 

특별히 ‘대등한 교섭의 결과’라는 조항을 두었다. 승자인 영국이 후환을 의식을 했다는 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지금까지 이 『난징 조약』을 불평등 조약이라고 원망하고 있다. 이것이 불평등 조약이었다면, 근대식 무기와 장비 부족이 그 일차적 원인이었다. 지금도 중국 정부가 사활을 걸고 군비 증강에 나서는 이유다.   

 

『난징 조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홍콩섬’을 ‘할양’한다는 것이다. 

 

국토의 일부를 다른 나라에게 주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대단한 굴욕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우리는 ‘할양(割讓)’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할(割)해서 양(讓)한다는 즉 ‘떼어서 남에게 넘겨준다’는 뜻이다. 당시 청나라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영구히 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홍콩섬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우린 배웠다. 당시 중국 정부가 볼 때, 홍콩섬은 너무 멀고 관리하기도 힘든 섬이었다. 떼어주어도 크게 애석할 것 없는 섬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보자.

 

1840년에 시작된 이 2년간의 전쟁은 아편 때문에 촉발된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난징 조약』의 내용을 보자. 아편 시장을 개방한다는 조항은 없다. 영국이 정말 (중국이) 아편시장을 봉쇄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면, 『난징 조약』의 내용에는 아편시장 개방에 관한 조항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국 측은 중국의 5개 항구의 개방과 독점 상인 등을 폐지하는 요구를 했고, 관철시켰다. 원래 영국의 목표가 아편 판매에 있지 않고 통상에 있다는 뜻이다. 아편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 하여 그 전쟁을 굳이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편’이라는 ‘부도덕한’ 물질을 부각시켜 도덕적인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영국을 비난하기 위해서다.

 

외국을 파렴치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정부와 정당이 자주 사용하는 정치 행위 중의 하나이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아편전쟁’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다. 외국과의 이해관계가 부닥칠 때마다 그들을 향해 다시 ‘아편전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꾸짖는다.  

 

난징조약 문서.PNG

난징조약문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애매한 땅

 

홍콩은 아편전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대륙의 교과서에도 홍콩의 교과서에도 물론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이라... 아메리카 대륙이나 어느 별자리가 누구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말처럼 하릴없이 들리는 말도 드물다. 태고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는 말이 가당치나 한 것인가? 홍콩을 포함한 주룽반도와 주변 섬들은 ‘역사’에서 소외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남들이 알아주든 아니든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중국이 통일되기 전인 춘추전국시대의 홍콩부터 말해보자. 

 

홍콩은 중국 남부와 함께 월나라의 영토였다. 월나라의 영토는 중원의 입장에서는 너무 멀고 사람이 살기 너무 더운 오랑캐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월나라의 남쪽에 있다 하여 베트남의 명칭이 ‘월남’이 되었다)  

 

이후 홍콩지역은 수많은 경계의 변화를 겪다가,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국의 행정구역인 남해군(南海郡) 번우현(番禺縣)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진나라.png

 

중국이 통일된 이후로 여러 왕조에서 홍콩 지역은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귀양 보내기 좋은 멀고 먼 유배지였다. 내 손에 피 묻히기 싫을 때 쓰는 그 방법은 효과가 탁월하여 가는 도중에 세상을 뜨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홍콩 지역은 ‘중원’에서 볼 때 너무나 먼 곳이었다.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땅이 아니었다.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기엔 너무 멀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아까운 그런 지역이었다.  영국에 할양할 때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땅’ 하나 떼어준다는 생각도 있었다. 

 

(중국의 역대 조정은 중원에서 먼 변방지역은 크게 중요한 곳이라 생각지 않았다. 대만도 청나라에 편입된 게 겨우 300년 전이다. 홍콩이나 대만의 가치를 알았다면, 진작에 홍콩이나 대만을 관리했을 것이다. 반면에 영국은 홍콩의 지리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홍콩을 표현할 때 줄곧 ‘애매한 신세’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속 등 정체성이 애매하다는 뜻이다.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지역 사람들

 

예로부터 해안 지역은 중앙조정에서 볼 때 골치 아픈 곳이었다. 수시로 해외로 도망가거나 밀수 혹은 해적질을 하는 유랑자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수시로 해안 통제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마침내 명나라는 해안선 4키로 내에는 주민이 살아서는 안 되는 ‘해금(海禁) 정책’을 채택하였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여 아예 그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이 해금 정책은 명초에 제정되어 17세기까지 3백년 이상 지속되었다.    

 

홍무제.PNG

해금정책을 실시한 ‘홍무제’

 

하지만 위에서 정책을 마련하면, 아래는 대책을 마련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이다. 강력한 해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외국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뿐만 아니라 큰돈을 벌기 위해 해외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해적이 바다에서 어민을 습격하거나 내륙으로 들어와서 한 마을 전체를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해적들은 한때 일본인이 다수를 점유하기도 했지만, 지역적 혈통적 정체성이 매우 복잡하여 점점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는 농민이고 어민이지만, 체제 밖에서는 이곳저곳을 떠돌던 유민이었다. 밀무역을 하기도하고, 바다 길잡이 역할도 하는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국적을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중국 대륙, 대만, 동남아시아, 한반도, 일본 열도, 류큐(오키나와) 등지의 출신으로서 이익만 생긴다면 이곳저곳을 다니는 자유인이었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그들 모두가 ‘왜구’라는 이름으로 억울하게 특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있던 대만을 수복한 정성공(鄭成功)이나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무역을 활성화 시켰다는 장보고를 그들의 대표 격이라고 생각한다. 정성공이나 장보고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논쟁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해당 국가들은 어떤 인물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인물을 미화하기도 한다.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킨 정성공은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청해진을 설치했다고 알려진 장보고는 정말 한반도인일까? 장보고는 산동인들이 자랑하는 장보자(張保仔)와 다른 사람일까? 하나하나 따져보면 의문은 끝이 없다. 

 

홍콩 지역의 사람들 또한 줄곧 체제 안팎을 넘나들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홍콩섬을 포함한 광동 연해가 영국의 감독 하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정체불명의 사람들(해적, 유민 등)은 내륙 수로로 쫓겨 들어갔다. 이들 때문에 광동과 광서지방은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홍콩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홍콩의 처지가 홍콩섬에 살던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같았다. 

 

 

아편전쟁의 진실

 

아편으로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었는가?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 그 전쟁은 중국의 역사에서도 홍콩의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앞에서 청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 근절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고, 임칙서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몰수하여 석회와 섞은 뒤 바다에 버렸다고 했다. (아편은 석회와 소금에 반응하면 못 쓰게 된다. 물에 빠진 아편을 건져 올려봤자 쓰지 못하게 한 조치였다)  

 

흠차대신 임칙서(1785~1850).PNG

임칙서

 

아편을 바다에 버리는 임칙서.PNG

바다에 아편을 버리는 임칙서

 

임칙서는 아편을 매우 싫어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아편 등의 마약류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천양지차를 보인다. 당시에도 아편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인식은 너무나 달랐다. 위정자들이 아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대처는 다르게 된다.

 

신중한 황제는 제대로 된 판단을 위해 몇 번씩이나 지방 관리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원래 시원한 결론은 얻기가 힘들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 

 

임칙서가 평소 아편 금지를 지지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황제에게 끊임없이 아편 근절을 주장했다는 점을 우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황제가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도록 몰아갔다.

 

통계 수치를 보면, 당시 청나라 전체 인구 4억 명 중 아편 흡연자는 1백만 명이 되지 않았다. 임칙서는 특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구국의 절대 영웅으로 신격화되었다. 중국과 영국의 담판 단계에서도 그는 범인 인도와 아편 금지 등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담판을 끝내 결렬시켰다. 전권대신으로서 그는 이후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간신히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평화는 그렇게 깨졌다. 아편은 변화의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광동지역 아편 피우는 중국인들.jpg

19세기 청나라 광동지역의 아편을 피우고 있는 중국인들.

 

문제의식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다. 문제의식을 가지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려면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어둠에 갇혀 버릴 수 있다. 확신을 가지는 순간 진실은 저만큼 달아난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는 평생의 화두가 될 만하다. 

 

영어 오피엄(OPIUM)의 음역이 분명한 아편은 양귀비라는 식물의 덜 익은 열매에서 뽑아낸 진액을 건조시켜 만든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님은 군 위생병 출신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군에서 많이 보았던 아편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만 가지고 나왔더라도 이후 진통제는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던 사람도 그 시커먼 덩어리를 한 번만 핥으면 금방 헤헤하고 웃는다는 말도 했다. 부엌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흉기도 되고 이기도 되는 것처럼, 예로부터 아편은 마약이기도 하고 약재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편은 중국의 상류층에서는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해온 약재였다. 아편은 13세기경 중국에 전해졌고, 17세기경부터 그것을 흡연하기 시작했다. 

 

확산세가 커지자 18세기에는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중국인들의 아편 흡연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뒤이어 영국이라는 변수가 하나 더 보태졌다. 

 

영국이 대량의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서 식민지인 인도에서 대량 재배된 아편의 소비처로 인구 대국인 중국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중국과의 주거래 품목으로 아편을 선택한 것은 역사적 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영국을 포함한 외세는 통상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재배되는 아편.PNG

인도 지역에서 무더기로 재배되는 아편

 

 

아편전쟁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들 

 

언제나 그러하듯 학설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우선 당시 중국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아편으로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는가? 아니면 위기인 것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세력들(외국과 통상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던가? 

 

청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시시각각 떠올려야 한다. 청나라를 무너뜨린 세력도 지금의 정부도 모두 한족이다. 1911년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문(孫文, 혹은 쑨원)은 만주족의 청 정부를 철천지원수로 이해하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손문 (혹은 '쑨원').jpg

손문 (혹은 ‘쑨원’)

 

물론 지금도 당시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주도 세력은 한족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족의 땅임을 주장하는 그들은 만주족인 청나라의 무능과 부패를 최대한 부각시켰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다음 문제로는, 

 

전쟁이라는 초강경책을 채택해야만 했던가? 현상 유지라는 온건책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던가?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지금 유지되고 있는 체제나 질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의 두뇌는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로부터 늘 도발당하고 있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지금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 현상은 혁명보다 더 혁명적인 노력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문제는 혁명보다 더 큰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평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에는 사람들의 기억력과 인내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피해를 생각해보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전쟁의 피해자는 말단 병사들이거나 무고한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함락된 포대와 청군시신2.PNG

아편전쟁 중 함락된 포대와 청군 시신들.

 

청 황제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신하와 저 신하의 의견이 다르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서 올라오는 보고도 책임자에 따라 다르다. 청 당시 지방정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사실을 보고 하기보다는 지방관리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증명서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이후 아편전쟁 기간 중에도 연전연패하면서도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올릴 정도로 시스템은 이미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1911년 청나라가 무너지고 세워진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고 나중에 다시 황제를 칭한 원세개(袁世凱, 혹은 ‘위안스카이’)는 이런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은 정확한 정보를 위해 특사를 파견하는 방법을 썼다. 

 

우선 한 명을 파견해서 상황을 듣고, 다시 한 명을 더 파견한다. 두 명의 의견이 일치할 경우는 그대로 믿었다. 아닐 경우 다시 한 명을 더 파견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아편과 관련하여 최고 책임자인 황제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아편은 나쁜 것인가? 아편 때문에 정말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말인가? 그래도 지방경제에 활력을 가져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이 보고서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일까?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술수로서의 보고일까?  

 

이 팽팽한 긴장을 깰 것인가? 아쉬운 대로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아편을 허용하면서 평화를 얻을 것인가? 아편을 불허하고 자존심을 얻을 것인가?

 

한번 시작된 질문은 끊임이 없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강경파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강경책은 늘 자존심과 연결된다. 통상을 반대하고 아편 확산을 막는 것이 중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되면, 이제 누구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역사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다.

  

 

동아시아인들의 ‘중국 근대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이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중국 경제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중국 또는 중국공산당의 논리다. 자신을 철저한 피해자로 만들고 반드시 구국의 영웅을 등장시키는 것이 그것의 특징이다. 물론 과도한 자기연민이나 낭만주의적 서사 방식을 기조로 한다.

 

서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편전쟁이 일어난 과정을 말했지만, ‘애국주의 역사학’의 틀을 말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 지금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아편전쟁 스토리를 말해본다.

 

백성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그것을 사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여 국부(은)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아편 중독 때문에 심신이 피폐해진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여 나라가 망해갔다. 보다 못한 임칙서(林則徐)라는 지방 총독이 황제를 설득하여 드디어 민족의 자존심 찾기에 나섰다. 

 

임칙서 동상.PNG

임칙서의 동상은 중국 각지에서 점점 늘어가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편이라는 마약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 나라의 돈(은)이 유출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임칙서라는 ‘애국자’가 나섰다.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흠차대신 임칙서는 광저우로 내려가 거래되는 아편을 몰수하고 폐기 처분했다.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은 영국 의회가 상인들의 요구에 역사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을 승인했다고 비판했다. 찬성 271표, 반대 262표였다. 간발의 차이로 전쟁이 승인된 것을 보면, 영국의 정치인 그들 자신도 전쟁의 명분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의 조야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무기로 침략자 영국에게 맞섰지만 분패를 했다. 

 

영국 측은 5백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에 중국 측은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만 보아도 얼마나 일방적인 전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중국인 나아가서 동아시아인들이 쓰는 중국 근대사를 완전하게 지배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의 가치를 몰랐던 대가는 혹독했다

  

영국과의 전쟁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약 20년 뒤, 1856년부터 전개된 2차 아편전쟁은 더욱 참혹했다. 1차 아편전쟁에서 이미 청 제국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협상이 가능했던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 간 1차 아편전쟁이 두고두고 아쉬운 이유이다.

 

아편전쟁 경로.png

 

『난징 조약』의 결과는 중국이나 영국 모두에게 불만이었다. 청은 아편 (밀)수입량이 증대되는 것과 점점 확대 심화되고 있는 기독교 전도 등에 불만이었다. 

 

반면 영국은 생각한 것처럼 상품수출이 증대되지도 않고 베이징에 외교공관을 개설하지 못한 점 그리고 선교의 자유도 확보하지 못한 점에 불만이었다. 조약 개정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영국에게 기회가 왔다. 

 

영국인 소유의 선박인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해적 혐의로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를 강제로 내리게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국 국기를 모독했다는 것이 새로운 전쟁의 이유였다.

 

애로호 사건.jpg

애로호 사건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기독교라는 서구를 상징하는 종교이다. 

 

서구의 종교인 기독교가 중국의 질서와 전통 사상 체계를 한꺼번에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는 초기부터 매우 조심스럽게 대응해왔다. 교황청을 비롯한 서구 기독교 세력은 완전한 전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해 왔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간에 한 번쯤 심사숙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긴장해서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풀 수 없는 고리가 분명히 있다. 이후 전개된 태평천국 등 일련의 국내 동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에 기독교 전도를 목표로 삼는 학생이 있다면, 중국과 근대사와 기독교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라고 내가 권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차 아편전쟁은 1차 아편전쟁보다 훨씬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영불(영국, 프랑스) 양국은 톈진(天津)을 점령하여 기독교 전도의 자유와 북부의 항구 개항 등이 약속된 『톈진 조약(1858)』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비준과정이 여의치 않자 영불은 다시 베이징을 공격하였다. 

 

청나라 시절 원명원.jpg

청나라 시절 원명원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을 야만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한 것도 이때였다. 1860년에 톈진 개항과 홍콩 주룽(九龍)반도 할양 등의 혁혁한 전과를 확인하는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도 이 조약에 상당하는 대우를 요구하여 헤이룽장 이북의 영토와 연해주 지방을 할양받았다. 

 

한 번 노출된 약점과 손상된 권위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두고두고 이용당했다. 대대로 간신히 유지되어 오는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종이 호랑이라고 공인된 대국의 몰락은 의외로 매우 빨랐고, 타의에 의한 근대화는 더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은 외세에 대해 천추의 한을 품게 되었다. 

 

홍콩지도.PNG

 

홍콩섬과 주룽반도 그리고 신계(新界) 지역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홍콩을 구성하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자 안전을 구실로 더 많은 땅을 요구했다. 『홍콩 경계 확대 조약』을 통해 지금 홍콩 전체 면적의 90%를 차지하는 면적을 빌렸다. 99년 동안 임대하는 것으로, 기한은 1997년 6월 30일까지 였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