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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4일. 창간 26년 된 홍콩의 『빈과일보(蘋果日報)』가 폐간했다. 평소 8만 부 발행하는 신문은 이날 1백만 부를 발행했다. 며칠 사이 편집국장과 주필이 체포되고, 회사 자산이 동결되는 등 더 이상의 경영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1천여 명의 실업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홍콩의 유력 인터넷 신문인 Stand News(立場新聞)는 “사과가 사라진 홍콩” 그리고 “빨간 선이 모든 홍콩인에게 닥쳤다”는 제목을 달았다. 특별히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1면에 중국어로 “친구, 사과,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게”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관련한 내용은 차차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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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들이 몇 시간을 기다려 폐간하는 홍콩 신문 빈과일보의 마지막 호를 사고 있다. / 출처-<AP 연합뉴스>

 

내게 홍콩은 홍콩의 밤거리라는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상상의 도시였다. 리샤오룽(李小龍)이라는 희대의 영화배우가 사는 동네였다. 영화 속에서 악당이 먼저 흉기를 들고나오면, 리샤오룽은 마지못해 쌍절곤으로 대응하곤 했다. 하지만 일단 꺼내면 악당이 후회해도 소용없을 만큼 응징했다.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고 암울했던 고교 시절 우리들 가방에는 쌍절곤이 들어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나쁜 놈들을 응징하겠다는 일념으로 점심시간 때 연습 삼아 친구들을 향해 휘둘렀다. 언젠가는 가보리라 하던 그 ‘상상의 공동체’ 홍콩은 의외로 빨리 내 앞에 나타났다. 

 

중문과에 입학하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애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등의 책을 접하면서 나는 중국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국에 마오쩌둥이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막연하게 그를 동경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깃들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무조건 정의를 위해서 투쟁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면서 그에 관한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물론 이후 그의 자세한 행적을 알게 되면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섣부른 단정은 역사에 대한 확신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 시절 어느 날, 나는 친구로부터 대륙에서 발행되는 책을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사회주의의 날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다니 그야말로 신천지가 열리는 듯한 낭보 중의 낭보였다. 그렇게 해서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에 ‘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원단 ‘불온서적’이 내 책상 앞에 놓이게 되었다. 

 

홍콩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홍콩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유학지로 홍콩을 선택한 것도 내 지적 호기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역사를 가른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홍콩은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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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우산 시위(우산 혁명)

 

2014년 ‘우산 시위’에 이어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로 홍콩은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우산 시위’의 목표는 홍콩의 수장인 행정장관을 내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는 보통선거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송환법 반대 시위’의 목표는 어떠한 이유로도 중국으로 송환되어서 재판받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2014년 79일간의 ‘우산 시위’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는 부담감은 더욱 격렬한 ‘송환법 반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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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

 

송환법 반대 시위대는 하나도 양보할 수 없다며 아래와 같은 5대 요구를 내걸었다. 

 

 1. 송환법(범죄인 인도협정) 공식 철회

 2.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

 3.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것 철회

 4. 체포된 시위 참가자에 대한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5.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시위의 결과는 정부로부터 송환법의 폐기 선언만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시위는 할 수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고, 곧이어 중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보안법을 발표했다. 

 

홍콩의 분리와 전복을 기도하는 모든 활동을 처벌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중국 정부가 준비해온 마지막 카드였다. 이로써 하나의 국가, 두 가지 제도를 의미하는 ‘일국양제’나 주권 반환 이후 50년 동안 홍콩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깨졌다고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홍콩의 역사는 2020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중국 정부가 홍콩 국가보안법을 발표한 날이다. 

 

이 법에 따르면 홍콩인은 물론 세계인은 잠재적인 국가 전복 세력이다. 누구라도 홍콩을 함부로 들먹인다면 체포할 수 있다. 그날 이후 홍콩에서 정치적 시위는 사라졌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조차 홍콩인들은 조용하다.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시위가 영구히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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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홍콩에서 내 책이 출판되었다. 그 전부터 홍콩에서 심심치 않게 납치 등의 사건들이 일어난 터라 나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 책은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했다. 민감한 시기에 홍콩의 정체성을 다룬 책이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홍콩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외국인 학자가 홍콩에 관한 책을 냈다는 것부터가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홍콩에는 ‘홍콩역사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4백만 년의 역사를 연대기별로 정리해놓은 박물관이다. 세계 어느 박물관에 가든지 보통 각 해당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과 의식에 따라 각각에 맞는 스토리텔링이 되어있다. 나는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분석했다.

 

나는 내 책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서술한 학술서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던가. 게다가 홍콩이나 중국의 당국이 출판계는 물론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모든 신경을 쏟고 있을 시점이었다.

 

내 책에서 나는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 주체가 홍콩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을 밝혔다. 즉 홍콩인이 만든 박물관이 아니라 중국인이 만든 박물관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홍콩의 정체성을 인정해주기보다는 중국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이었다. 나는 책에서 홍콩의 정체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중국-홍콩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이 정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봐야 그거야 당국에서 만들기 나름 아닌가. 책 내용 중에서 한 줄을 떼어내어 시선이 의심스럽다고 하면?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고, 홍콩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가 홍콩의 독립을 선동했다고 하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다. 

 

책이 나온 이후 나는 언행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홍콩의 몇몇 매체들로부터 들어오는 인터뷰 요청도 모두 완곡하게 거절했다. 

 

홍콩의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을 때면, 그 1-2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닌 경우보다 빨리 지나간다고 했던가. 입국심사대에서 스탬프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지루하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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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물론 중국으로 들어갈 때, 나올 때도 똑같이 긴장했는데, 심사대 앞에서 나는 홍콩에서의 내 종적을 되새기고 있었다. 심사대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홍콩에서의 활동에 대해 촘촘한 자기 검열을 진행했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 돌아다녔지? 그때 실언한 적은? 아니 진심을 담은 말은 한 적이 없던가? 앗, 몇 해 전 명보(明報, 지식인들이 많이 보는 홍콩 중립지)에 홍콩과 한국의 시위문화를 비교한 내 글이 실린 적이 있었지, 아니 그 전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면서 막연하게나마 홍콩 지지를 표명한 적도 있구나, 나도 체포될 수 있고 조사받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하지? 우선 한국영사관에 연락해 달라고 해야겠지, 영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해야겠지!”

 

입국심사대에서의 대기시간 외 평소에도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진행했다. 

 

“나는 홍콩을 지지하나? 중국을 지지하나? 평소 내가 만나던 친구들의 성향은? 내 책에서 무엇을 주장했지? 혹시 홍콩독립에 긍정적인 서술을 한 곳은 없겠지? 아니야 그래도 외국인 학자인 내가 홍콩을 위해서 한마디라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 검열을 진행하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외국인인 내가 이렇게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데 홍콩인들이 느낄 압박감은 말해 무엇하리.”

 

홍콩의 세미나에 불려갈 때마다 나는 홍콩 친구들의 무언의 간절한 눈빛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말해다오, 네가 대신 말해다오, 우리 홍콩의 처지를, 우리 너무 답답해,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 너는 외국인이니까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왜 불렀겠나!” 

 

홍콩의 역사 관련 논문 발표회장에 참석한 일반 손님들의 한숨과 탄식 소리는 영원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홍콩에서 ‘외국 세력과의 결탁’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홍콩 친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지금 외국 세력과 결탁을 하고 있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곧이어 실제 그런 죄명으로 줄줄이 체포되고 기소되고 있는 활동가들과 정치인들을 보게 되었다. ‘외국 세력과의 결탁’은 이제 중국 정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경고성 수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을 공격하고 홍콩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을 향한 경고에서 빠지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실제로 홍콩에서 인문학 관련 세미나가 사라진 지 오래 이고, 홍콩의 정체성 관련 책의 출판이 뜸해졌다. 매번 방학 때 가서 작은 서점들을 순례하면서 홍콩의 다름을 주장하는 책을 찾아내던 행복은 이제 더 이상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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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기소된 빈과일보 사주 지미 라이 넥스트디지털 회장. 라이 회장은 외국 세력과 결탁해 국가 안보를 위협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현재 수감 중이다.

 

원래 홍콩은 정보의 천국이었다. 

 

중국과 대만 그리고 세계의 정보가 넘쳐나는 어쩌면 각국이 가장 많은 정보원을 파견하는 곳이기도 했다. 양안삼지(대륙, 홍콩, 대만)는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원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홍콩의 기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이 중국에서 조사를 받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과 대만의 의원이나 학자가 홍콩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되거나 조사를 받는 일도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효과는 엄청났다. 

 

도심의 장기적인 시위로 세계의 주목을 받던 홍콩이 매우 조용하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골치 아픈 홍콩을 납작하게 만든 신의 한 수였고, 홍콩의 입장에서 보면 한 방에 홍콩을 죽인 통한의 한 수였다. 

 

중국의 체제 안정을 지키는 법인데, 반대로 홍콩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2019년 송환법을 반대하기 위해 시작된 홍콩의 정체성 시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는 앞으로 홍콩에서 어떤 형태의 정치적인 시위도 일어날 수 없다고 예단한다. 

 

홍콩의 역사를 1840년 아편전쟁부터 친다면, 2020년 6월 국가보안법 이전과 이후로 다시 한번 더 나누어진다. 가장 큰 충격으로 기록될 것이다. (2020년 7월 1일부터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본격적인 홍콩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1. 역사란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말을 쉽게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고,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왜곡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과연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역사에서 ‘정곡’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바로’ 세우기는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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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상념을 한끝에 나는 나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을 바로잡기 전에 반드시 충분하게 알아야 한다.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 우선 논의의 장이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방어권이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적 진실 – 그것이 있다면 - 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우선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가령 아래와 같은 것들에 관심이 많다. 

 

히틀러는 괴물이다. 하지만 히틀러도 선출된 권력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모두가 나폴레옹이 전쟁 영웅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진정한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킬링필드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을까? 아니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왜 수백만 명을 살해했을까? 스탈린은 왜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을까? 아니 이주시켜야 했을까? 

 

정말 대원군과 고종과 민비가 잘못해서 조선이 망한 것일까? 그들이 잘했다면 조선은 계속 유지됐을까?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마오쩌둥과 사인방에게만 물어야 할까? 그들의 선동에 놀아난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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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학명 당시 마오쩌둥 옆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인방. 시계방향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훙원,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흑백사진),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이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이들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런 문제의식의 기초 위에서, 모든 논의가 자유롭게 허용될 때 역사는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콩의 정체성을 인식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숙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한국은 이렇다’고 일언지하에 결론 내릴 수 없는 것처럼 홍콩 또한 단정할 수 없다. 인식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그것을 잡았다고 하는 순간 대상은 더욱 멀리 가버린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소수처럼 다루어질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다. 현재의 티베트, 신장, 내몽고 등을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인정해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입은 있으나 말은 할 수 없다. 일단 지금은 그렇다. 개인이나 지역이나 국가나 다름을 인정받지 못할 때 불행하다.

 

내가 나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아편전쟁 이후 홍콩에 그리고 중국-홍콩 체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왔을까? 

 

 

2. 역사에서 배워야 할 가르침 : 역사는 갈등과 모순의 결과물

 

한번 터진 질문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청나라 말기 정부는 망할 짓만 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서 만주족의 청나라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가? 아편전쟁의 뇌관이었던 아편으로 인한 상황이 정말 극도로 심각했나? 난징조약은 정말 불평등조약일까? 이때 평등과 불평등은 누가 무슨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중국 정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1997년의 주권 반환이지만, 주권은 중국으로 반환되어야만 했을까? 주권이 반환되는 것이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홍콩을 그대로 두었다면 중국에 손해였을까? 

 

나는 평소 이런 점이 궁금하고 답답했다. 

 

돌이켜보면 19세기부터 중국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사람들은 성공이냐 실패냐 또는 선이냐 악이냐 즉 이분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그리고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결론은 과정보다 더 회자된다. 그 결론은 또 다른 논쟁을 불러오지만 사실 그 논쟁 역시 이분법의 테두리 속에 있을 뿐이다.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독자들 모두 확신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거는 무엇일까? 정답으로 보이는 교과서의 내용도 진영논리도 수시로 호출되는 동원 대기조에 불과하다. 

 

개인사나 국가의 역사가 단순 성공이었냐 실패였냐는 시각은 모두 잘 못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진실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결과에 도달하게 된 과정에 있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얽히는 ‘갈등’과 창과 방패의 ‘모순’이 중층적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온 결과 그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갈등과 모순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진정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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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국의 모습

 

세계적으로 보면 19세기는 변화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세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의 기운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그런 느낌말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 개인도 국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편전쟁부터 지금까지의 쟁점을 정리하면, 우리는 역사에서 진정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홍콩 역사의 쟁점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 기회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불편한 진실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왜 양자 모두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하는지?’ 

 

를 알게 될 것이다. 

 

전술했던 것을 정리하면,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식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었다. 그동안 홍콩을 둘러싸고 전개된 역사적인 이슈에 내 나름대로 딴지를 걸고 싶었다. 이것이 본 기사 시리즈의 목표이다. 어쩌면 나와 딴지일보의 만남은 예비 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 이제 홍콩 이야기를 시작한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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