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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가기록정보원)

 

6.25 한국전쟁은 상당히 특이한 전쟁이다. ‘내전’이 더 치열하고, 상흔이 깊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6.25는 특히 더 그랬다. 내전이고, 국제전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념전쟁인 까닭이다. 1816년부터 1965년까지 치러진 전쟁 중에서 규모나 격렬함, 범위 등을 고려했을 때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다음으로 가장 큰 피해가 일어난 전쟁이다.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 한국전쟁은 3번의 붕괴가 발생했다. 쉽게 설명하면 판갈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가이자 전략가인 에드워드 루트워크(E. N Luttwak)의 주장이다.

 

첫 번째 붕괴는 개전 직후부터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날 때까지다. 한국군은 괴멸 직전까지 밀렸다. 38도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면서 6만여 명의 사상자,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시 6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걸로 추정된다(개전 당시 한국군의 병력이 9만 명 수준인 걸 생각해보라).

 

두 번째 붕괴는 인천상륙작전과 뒤이은 북진이다. 북한군은 거의 궤멸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북한은 강계에 임시정부를 펼치고, 결사항전을 말했지만 남한에 의한 북진통일이 현실화됐던 게 이 당시였다.

 

세 번째 붕괴는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까지의 과정이다. 국군과 UN군은 평택까지 밀렸다가 3월이 돼서야 서울을 재수복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북진해서 평양을 수복한 후 39도선에서 멈췄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건 정치학자, 군사 사상가들의 일치된 견해이기도 하다. 물론, 사후적 지혜에 의한 판단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수긍이 갈 만한 이야기다. 39도선, 그러니까 평양-원산까지의 라인은 한반도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다. 즉, 방어할 전선이 좁다는 걸 의미한다. 정치적인 의미도 주목해 봐야 하는데, 39도선에서 멈춰섰다면, 중국에게 최소한의 완충지대를 준다는 의미가 된다(그 위로 넘어가면 전선은 점점 넓어진다).

 

이게 정치적으로 민감한데, UN군 결성 목적은

 

‘국경선(38도선)을 회복하는 것’

 

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8월부터 어디까지 진격하느냐를 놓고 고민했었다. 미국 NSC는 1950년 9월 9일 38도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결의한다. 이렇게 된다면, 문제는 UN군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거다. 10월 7일 UN은 UN군의 38선 돌파를 허락하고, 그 결과 UN군의 역할이 바뀐다.

 

‘38선 회복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

 

그 사이 중국은 끊임없이 사인을 보낸다.

 

“38도선을 넘지 마라.”

 

주중 인도대사를 통해서 미국과 영국 측에 계속 사인을 보냈지만, 이들은 이를 무시했다. 헨리 키신저도 이 점을 주목하며 6.25 전쟁 당시 39도선에서의 정지를 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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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에서 이북으로 북진했더라도 평양-원산선에서 멈췄어야 했다. 멈췄다면 중국군은 참전하지 않았을 거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게 채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거다. 1950년 6월 25일 개전해서, 낙동강 전선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냈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느껴지던 9월이 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다. 10월이 되자마자 북진으로 평양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되기 전까지 미군은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 거란 부푼 꿈을 안고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다 장진호 전투에서 호되게 당하고, 이듬해인 1951년 1월 다시 서울을 빼앗긴다.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 전쟁의 주도권이 몇 번이나 뒤바뀐 거였다.

 

첫 번째 붕괴, 그러니까 북한군과 한국군‘만’이 맞붙은 첫 번째 전투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물론, 첫 번째 소멸에서도 오롯이 한국과 북한만 전투를 한 건 아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군 작전의 전반을 지원하고 있었고, 미군이 한국군에 공중지원과 보급지원, 미 제24사단의 1개 대대(증강된 1개 대대)를 급거 투입해 1960년 7월 5일 북한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바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였다. 이들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전쟁이 국제전의 성격으로 급격하게 뒤바뀐 걸 생각하면, 그나마 개전 초의 얼마간은 한국군과 북한군만의 싸움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잠깐의 시간 동안을 장악한 건 북한군의 ‘탱크’였다.

 

(6월 26일) 장단 쪽으로 북상해 능이 있는 곳에서 인민군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정말 인민군 전차가 나타났다. 전차에 대항할 무기라고는 우리가 배운 2.36인치 로켓포가 있었는데 우리가 배우기는 600m 사거리에서 그때 전차가 맞으면 그냥 뚫어진다고 했는데 그날 최단거리에서 쏘아 명중했는데 끄떡없었다. 푸턱 하더니 그냥 막 오는 거야! 전차라는 게 그냥 포를 쏘는 게 아니라 유산탄이 있어서 엽총알 모양으로 확 퍼지는 포탄이 있었다. 그걸 쏘는데 이건 정말 꼼짝할 수가 없었다. 포 중대는 57mm 대전차포가 있었는데 그것은 더 형편없어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박형수(당시 제1사단 제13연대 제10중대장)

 

상황을 잘 표현한 증언일 거다. 한국군은 미군이 건네준 2.36인치 로켓포, M9 바주카포와(‘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그 위력이 잘 나온다)와 57미리 대전차포가 있었다(57미리 무반동총이 아니다!). 미군은 대전차 무기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이걸 한국군에게도 그대로 주입시켰다.

 

(미군 고문관) 무어 중위는 “연대가 장비하고 있는 2.36인치 로켓포, 57밀리 대전차포는 능히 북괴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이며, 문제는 사수가 전차에 대하여 겁을 먹지 않고 침착한 행동으로 사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교육하였다.

- 차규헌 중위 (당시 제7사단 9연대 소대장)

 

이는 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의 기록이다. 북한군의 증강과 전차배치에 대한 정보가 한국군에도 전해진 상황이었는데도, 미군과 한국군은 탱크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신성모가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에게 탱크지원을 요청했다.

 

“우리에게 전차 좀 지원해 줘라.”

“몇 대나?”

“한 189대?”

 

단칼에 거절당했다. 당시 미국 군사고문단장의 주장은 단순했다.

 

“한반도의 지형에서 전차를 운용하는 건 상당히 제한된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안배돼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북진통일!”

 

을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전차를 지원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미군은 155미리 곡사포를 비롯해 각종 중화기, 전차에 대한 원조를 거절했다. 예산 문제도 있었지만(대한군사원조계획의 예산 한계에 맞춰야 했다), 정치적인 계산도 생각해봐야 했다. 1949년부터 옹진반도에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는 마당에 덜컥 탱크를 쥐어졌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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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 전차

 

렇다면 북한은 어땠을까? 북한은 1948년 10월, 철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T-34 전차 60대와 SU-76 자주포 30문 등을 인계받는다. 탱크 뿐만 아니었다. 인력 구성도 화려했다.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인 ‘제105 땅크여단’은 김일성과 같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류경수가 지휘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대대장으로 참전했던 한국계 소련인 최표덕이 소련 군사고문관으로서 부대의 훈련을 감독했다. 훗날 창설한 17여단의 여단장 필우창 소장은 1945년까지 소련군 전차병으로 근무했었다. 이 사람은 베를린 전투에 참가했을 정도의 베테랑이다.

 

(105 땅크 사단, 지금 명칭은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은 북한의 ‘메이커 사단’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최정예 사단으로, 6.25 전쟁에서 서울을 방어하던 국군 7보병사단을 섬멸하고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공을 인정받아 ‘105 땅크사단’으로 승격됐다. 이후로 105란 숫자는 북한에서도 꽤 중요한 숫자가 되었다. 지금도 105 땅크사단은 최정예로 취급 받고 있으며, 사단 편제이지만 거의 군단급에 맞먹는 화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소련의 지원으로 병력과 장비를 차곡차곡 준비하던 북한은 전차운용을 위한 연료 확보에도 공을 들였다. 이미 원산에 정유공장을 준비해서 연간정유능력 10만 톤을 확보했는데, 부족했는지 천길호 연변에 공장 한 곳을 추가로 건설했고, 1950년 4월이 되면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외국으로부터 10만톤의 연료를 구입한다.

 

북한은 전차를 앞세운 전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