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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만큼은 아니나 비교적 인구가 많은 일본의 지방 도시에 사는 필자. 봄철을 맞이하며 나들이나 떠나고 싶지만 코로나 때문에 꺼려지는 것이 현실이죠. 그런데 차로 가야만 하는 인적이 드문 시골 정도면 마음 놓고 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 대학교 선배한테 구경 갈래라는 제안을 받은 “1F(일에프)”, 즉 '후쿠시마 제1원전' 주변 지역은 코로나 감염에 대한 걱정을 하나도 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편집부에 그런 제안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더니 “아니, 웬 떡이요… 빨리 갔다와서 글이나 써!!”라는 대답, 아니, 명령이 돌아왔습니다. 2011년에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이나 쓰나미, 그리고 그로 인한 원전 사고에 대해 딱히 잘 아는 바가 없는 필자지만 이번에 찍어온 사진을 몇 장 소개하려고 합니다.

 

 

1. 미리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사정~지진 발생부터 지금까지 경위~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일본 미야기현 오시카(牡鹿)반도 동남동 먼바다에서 매그니튜드9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죠. 일본 주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서는 관측 사상 가장 컸습니다. 진원 지역 역시 광대했으며 이와테현에서 이바라키현까지 남북 방향으로 약 500km, 동서 방향으로 약 200km, 면적으로 따지면 10만 제곱킬러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진도7을 넘은 진동이 습격한 지역도 광범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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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인한 피해도 만만찮았죠. 땅이 흔들린 것에 더해 액상화현상(液状化現象, 지하 수위가 높으며 모래로 형성된 지반이 진동으로 인해 든든함을 잃으며 액체처럼 되는 현상), 지반침하, 댐 결괴 등. 북해도 남안에서부터 도쿄만을 포함한 관동지방 남부까지 매우 넓은 범위의 인프라가 파괴됐죠.

 

그래도 원전은 진동에 대해서는 잘 버텼습니다. 지진 발생 당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는 1호기에서 3호기, 모두 세 개 원자로가 가동 중에 있었으나 진동 때문에 자동 정지가 됐습니다(4호기에서 6호기는 점검중이었어요). 지진에 의한 정전으로 한 때 전원이 끊겼으나 지하에 설치된 발전기가 가동돼서 무사히 넘어갔죠.

 

하지만 지진에 이어 덮쳐온 쓰나미가 문제였습니다. 지진이 발생한 지 약 50분 후, 높이 13미터로도 15미터로도 전해지는, 말 그대로 예상 외의 쓰나미가 원전을 습격한 겁니다. 원전에 전력을 공급하던 발전기가 해수를 뒤집어써서 고장난 데다 각종 전기설비, 펌프 류, 연료 탱크, 비사용 배터리 등등 온갖 설비가 손상됐죠.

 

이른바 전(全) 전원 상실상태, '스테이션 블랙아웃'에 빠져든 겁니다. 원자로 내부나 사용 후 핵연료 수조로 물을 주입하지 못하게 된 바람에 핵연료를 냉각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1~3호기에서 노심(炉心)이 녹아 버리는 현상, 즉 멜트다운이 발생, 수소가 대량 발생하는 현상을 초래했죠. 결국 수소폭발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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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발 사고 때문에 대기 중에 방출된 방사성 물질은 어떤 추계에 의하면 약 90경(京) 베크렐. 숫자로 써보면 900,000,000,000,000,000입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6분의 1 수준 규모였다고 합니다. 2011년 8월 시점에 공간 방사선량이 연간 약 5mSv(밀리시버트) 이상인 지역이 약 1,800㎢, 20mSv 이상 지역은 약 500㎢에 이르렀답니다. 직업적으로 방사선을 다루지 않는 일반인의 경우 일단 연간 1mSv가 기준이 된다고 하니 이 수치는 어마어마하다 할 수밖에 없죠(참고로 연간 1mSv를 시간 당 방사선량으로 환산하면 약 0.23μSv라고 합니다. 여튼 지금 이 수치는 가라앉았다니 궁금한 분을 알아봐 보시죠).

 

당연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 살기가 매우 어려워서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제1원전을 중심으로 반경 20km 이내 지역을 “경계구역”, 그 외 지역으로 방사선량이 많은 지역을 “계획적 피난 구역”으로 지정,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피난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이들 피난 대상 지역은 2012년 4월에 개편되며 방사선량에 따라 “피난지시해제준비구역”, “거주제한구역”, “귀환곤란구역”의 3가지로 나뉘어져 세 번째 “귀환곤란구역”은 예외적 사정이 없는 한 출입이 금지됐다네요. 이어 2014년 4월 이후 차차 피난 지시가 해제되면서 피난지시해제준비구역하고 거주제한구역에서는 작년 3월에 완전히 해제됐지만 귀환곤란구역은 일부 구역을 빼고 아직 피난지시가 유효한 상태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우연히 가게 된 후쿠시마 제1원전 근처 길을 지나가다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선배가 알려준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합나다.

 

 

2. 깔끔하게 재개발된 이와키역 가까이서 만나

 

'제1원전 지나가기' 드라이브 당일, 늦은 오전에 이와키(いわき)역 가까이에 있는 한 장소에서 선배와 만났습니다. JR 카시와(柏)역에서 미토(水戸)역까지 갔다 거기서 이와키(いわき)행으로 갈아탑니다. 조반선(常磐線) 전체의 절반 정도를 타는 셈이죠. 특급권을 살 여유가 없어 일반 열차로 갔더니 3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2명 씩 마주 앉게 돼 있는 박스 시트(?) 창가에는 좁은 선반이 설치돼 있고 거기에 맥주캔을 두고 시골 풍경을 즐기면 여행 기분도 고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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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조반선 카시와역에서 이와키역까지 경로.

개인적으로 미토역에서 갈아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이와키역은 재개발된 지 얼마 안 됐는지, 역사나 역 주변은 꽤 깔끔하고 도시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네요. 지방 거점 도시의 전형적 모습을 보는 듯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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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개발되어 얼마 안 됐는지 세련된 느낌.

주변에는 쇼핑몰이 있고 식당이나 편의점도 많은 모양이네요.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이와키역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약간 떨어진 데서 보는 이와키역은 주변 경광과도 맞물려 지방의 거점역다운 분위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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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키역 서쪽에 있는 육교에서

낡고 복잡한 선로가 오래된 시골 거점역이라는 인상

 

이와키 역에서부터는 선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발! 이번 미니 드라이브는 원전 사고 이후 방사선량이 많아 거주가 어려워진 지역을 지나 미치노에끼 나미에(道の駅なみえ)까지 가는 루트. 미치노에끼라 함은 옛말로 드라이브인, 일반도로에 설치된 휴게소 같은 개념이죠. 하여튼 일단 미치노에끼 나미에에서 점심을 먹는 것을 목표로 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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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니 드라이브 여행의 경로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실제 경로와 다를 수 있지만 대충 이렇게 갔을 겁니다.

 

이와키역 주변은 아마 이와키시 중심부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나름 가게나 식당, 주택도 있었죠. 우리 일행은 북쪽으로 침입로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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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람이 사는 냄새가 느껴지는 이와키 시내.

예습 없이 간 김에 사진을 찍었을 때에는 몰랐는데 도로 표지판에 "双葉(후타바)" 두 글자.

후타바(双葉)는 원전 사고의 영향을 크게 받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예습보다 복습을 중시하는 필자는 이번 미니 드라이브 여행에서 지나간 지역에 원전 사고가 할퀸 상처가 남아 있는 지역을 나중에 알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후타바마치는 오쿠마마치(大熊町)나 나미에마치(浪江町)와 함께 사고의 후유증이 아직 심각한 동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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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현이 경제산업성 자료에 기초해 만든 피난지시구역 개념도.

분홍색 부분은 "귀환곤란지역"으로 지정된 구역을 나타내며,

후타바마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변 풍경이 확 바뀌더라고요. 논밭이 퍼져 있는 논촌 풍경. 아무 것도 아니게 보이는 이런 광경조차 원전 사고 이후 혼란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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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후쿠시마현은 포도나 복숭아 등 과일류가 유명하고 쌀농사도 왕성하던 농업지역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다 선배가 알려준 충격적인 사실. 원전 사고 때문에 생활터를 뺏긴 사람들에게 도쿄전력이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답니다. 뭐, 그럴 수 있겠지 싶은데 필자가 놀랐던 것은 액수입니다. 사고로 인한 피해의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한데 많게는 한 달에 80만 엔. 한국 돈으로 약 800만 원을 받고 있답니다. 선배가 말하기엔 "원전 사고 이후 사고 현장 근처를 꽤 많은 고급차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네"랍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아도 매달 꼬박꼬박 80만 엔이 계좌에 입금된다면 하던 일은 그만두고 매일 놀고 다니지 않겠느냐 싶잖아요? 궁금해서 물어봤죠. 그랬더니 역시나였죠. "원전 사고도 사고지만 보상금 때문에 인생을 망쳐 버린 이들도 꽤 있다고 들었지..."

 

 

3. 국도 6호선으로

 

선배가 "가는 길은 이쪽으로 할까" 해서 들어간 길은 6번 국도입니다. 평평한 땅과 그 뒤에 산이 서 있는 농촌 풍경이 보이다 갑자기 숲을 꿰뚫는 듯한 분위기. 숲처럼 보이는 나무들은 그냥 숲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일부러 심은 나무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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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아는 6번국도는 왕복 4차선으로,

왕래하는 차도 훨씬 많은데 이런 구역도 있군요

 

잡담을 나누다 또 갑자기 풍경이 바뀝니다. 숲길을 벗어나 바닷가 쪽, 해안선을 따라 깔린 길이 나왔어요. 그런데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콘크리트로 조성된 높은 구조물이 시야를 막는 구역도 있더군요. 짐작이 가면서도 선배한테 물어봤죠. "저기 보이는 건 방파제인가 보죠?" 그렇답니다. 아마 2011년 대지진과 같은 역대급 대지진에 수반하는 "상정 외의 대쓰나미"를 막는다기보다 종종 발생하는 지진에 따른 파도를 막고 주변 가옥을 지킬 목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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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가 있는 구역이 있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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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바다가 보이는 구역도 있어요.

물론 해안가를 관리하는 차원의 방파제는 조성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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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에 있는 집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방파제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요

 

"와, 와" 하면서 드라이브 기분을 금치 못 하는 필자였는데 선배가 이거 좀 보라며 네비게이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계속 6번국도를 달려왔는데 네비를 보니 6번국도에서 벗어났었던 겁니다. 원전 사고 후 6번국도의 일부 구간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새로 길을 깔았다고 해요. 선배가 낡은 네비게이션 소프트를 왜 업데이트하지 않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대목입니다. (선배는 '네비가 낡아서 그렇다'고 했고, 그때는 그냥 넘어갔는데 왜 내비게이션 소프트를 갱신하지 않고 있는지... 일부러 물어볼 정도의 대목도 아니지만 그냥 놔두기에도 좀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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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차에 깔린 네비 화면

6번국도가 붉은 선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선배가 운전하는 차는 흰색 점(현재 6번국도)을 따라 달려왔습니다.

 

 

4. 원전 사고 현장 근처를 지나가다 보인 현상

 

운전대를 잡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다 아마 지금부터 보일 순소대로 원전 사고와 관련이 있는 사연을 이야기 해주는 선배. 먼저 거론된 것은 비교적 간소한 숙소가 많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길을 가다 레스토랑이나 빌라 같은 비교적 큰 건물을 서둘러 숙소로 개조한 것처럼 보이는 호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설마 관광지가 된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럴까요? 원전 사고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방사선량이 많은 지역은 일단 방사선량을 줄이기 위해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거나 흙으로 덮는, 이른바 '제염(除染)'이라는 공정이 필요하고, 또 방사성 물질로 오염된 건물 등을 해체하는 작업 등 사고의 후속 처리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일련의 작업을 위해 많은 작업원이 투입되고 있고 그분들이 묵는 곳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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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사고의 후속 처리를 위해 현장에 출동하는 작업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숙소

관광지도 비즈니스가도 없는 시골 한가운데에 있는 숙소임에도 1박 5,000엔

코로나 때문에 호텔 숙박비가 급락된 지금을 생각하면

상당히 안정적인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사고 후 10년이 지나 이제 먼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있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 흘러가는 온 풍경이 아늑한 시골이 아닌, 앞으로도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보이기 시작했죠. 아니, 당장 눈에 보이는 풍경 그 자체를 어떻게 해야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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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사고 후 현장 주변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작업이 진행이 되고 있답니다.

공사현장에서야 볼 수 있는 대형 트럭이 자주 오가고 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죠.

 

정신을 바짝 차린 필자에게 선배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슬슬 내가 이번에 가장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할 건데..."

 

아니, 후쿠시마 제1원전을 살짝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당황한 필자에게 선배가 한 말이 "고스트 타운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 알게 될 거다..." 응? '고스트 타운'는 제주에 있는 유령 테마파크인데 설마 유령 동네를 보여 줄려나... 아직 정신 차리지 못했던 필자였습니다. 참고로 고스트 타운의 본디 의미는 '도시나 마을이 폐허가 되며 사람이 살던 것을 나타내는 건물이나 흔적만이 남아 있는 곳'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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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패션센터 시마무라(ファッションセンターしまむら)가 영업하던 건물.

한국에서는 일본 패션 소매점 브랜드로선 또 다른 데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만

일본 현지 진짜 멋쟁이가 단골하는 것은 역시 시마무라죠.

이 사실을 아는 필자에게는 유니... 아니, 그 다른 옷가게의 폐허를 보는 이상의 큰 충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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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전기제품 판매점인 케이즈덴키(K'sデンキ)도 폐허가 되었어요.

요새 전기제품 소매점은 대형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죠.

건물이 큰 만큼 인적이 끊긴 적적함이랄까 쓸쓸함이랄까 그런 것이 강조가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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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3대 규동 체인 중 하나인 스키야(すき家).

폐허가 된 다른 건물도 많이 봤는데 달리는 차 안에서 찍기에는 이게 한계인 듯합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조금이라도 좋은 사진을 사랑하는 독자분들께 보여 드리기 위해 편집장한테 좀 더 좋은 카메라를 사라고 요구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 치사한 놈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목소리가 힘입니다. 필자한테 카메라 한 대 사주라는 메시지를 편집부로!!!)

 

곳곳의 폐허에 시선을 뺏기다 보니 필자의 머리 속은 "풍경을 원전 사고 후유증으로 설명하기" 모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마 그런 모드로 안 보면 알아채지 못했을 슬픈 풍경을 발견했죠.

 

후쿠시마현은 아까도 언급했듯 농업국입니다. 이와키시 교외는 너른 논밭이 아늑한 농촌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웬만하면 농사를 짓고 있을 땅이 잡초투성이가 되어 있는 겁니다. 사진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필자에게는 폐허가 된 건물보다 큰 충격이었죠. 정말 쇼킹한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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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모내기를 마친 풍경이 퍼져 있을 논.

개인적으로는 폐허보다 이것이 더 큰 충격이었죠

 

충격은 이어집니다. 아무 예습 없이 그냥 드라이브 기분으로 나온 필자 눈에 생소한 글자가 들어옵니다.

 

"귀환곤란구역(帰還困難区域)"

 

그렇습니다. 앞에서 나온 사고 현장 주변 지역을 설명한 그림 중 분홍색으로 구분된 구역. 방사선량이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구역. 도로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많은 차들이 오가는 이 구역은, 제염 작업 등 꼭 필요한 사정이 없는 한 출입이 통제된 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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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앞쪽에 "경차량, 보행자는 통행하지 못합니다."라는 경고문.

방사선량이 많아 직접 공기를 마시거나

외부 공기 청정 기능이 떨어지는 경차는 위험하다는 취지인 것으로 보이죠.

그 뒤쪽에는 "귀환곤란구역"이란 글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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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이 통제가 된 구역 입구.

아마 필요가 있어서 들어가는 차량도 있는 것 같아

입구에 출입허가증을 확인하는 인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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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안쪽이 귀환곤란구역이랍니다.

안에 차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어찌된 것인지...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이겠죠.

 

복구 공사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에 원전 사고의 후유증이 확실히 남아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있었죠. 그러다 갑자기 선배가 "아, 저기 봐"라며 창밖을 가리킵니다. 보니까 뭔가를 초록색 시트로 덮어씌운 모습. 내용물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방사성폐기물이나 그에 준하는 폐기물인 것 같답니다. 뉴스에서 살짝 본 적이 있는 듯하지만 역시 순간이라도 실물을 직접 보니까 마음 속 많은 생각이 오가며 복잡한 느낌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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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곳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요.

아마 사고 후 복구 공사나 이른바 제염 작업 관련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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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폐기물 내지 그에 준하는 폐기물로 짐작되는 뭔가가 쌓인 모습.

초록색 비닐시트로 덮어놓은 모양인데 방사선은 새 나오고 있을 것이죠.

 

 

5. 큰 실수

 

그런데 이번에 차를 운전해 준 선배하고는 꽤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못 만났던 사이에 어떻게 지내왔고 지내고 있는지 서로 할 이야기도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습니다.

 

첫째, 잡담에 몰두하는 바람에 후쿠시마 제2원전의 사진을 못 찍었고, 그 반성도 잠시, 제1원전의 셔터 찬스도 깔끔하게 놓쳐 버린 겁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1원전, 제2원전 공히 이와키로 돌아가는 길에 확실히 찍겠습니다!

 

둘째, 이것도 지금의 후쿠시마를 여실히 상징하는 것이라 꼭 찍어야 됐었는데 6번 국도를 가다 곳곳에 말하자면 "방사선량 모니터링판"이 설치돼 있었습니다. 설치 지점 주변의 방사선량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알림판인데요, 선배가 말하기엔 요새 후쿠시마에서는 일기예보를 하듯이 날마다 각 지역의 방사선량을 알려주고 현지 주민들도 방사선량 체크를 일과 삼아 하고 있답니다.

 

일단 시간 당 0.1μSv(마이크로시버트)가 표준, 즉 인체에 대한 피폭 피해가 없는 수치라고 하는데 사고 현장 가까이에 설치된 알림판에 뜬 수치는 "에...!? 정말...!?" 정도였죠. 구체적 수치는 까먹었으나 게시판을 봤던 당시 반응은 이랬단 말입니다. 방사선은 냄새나거나 눈에 안 보이는데 수치로 제시되니까 위험한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단 실감을 넘어 약간의 무서움을 느꼈죠(그렇다고 장시간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라돈 온천을 가거나 엑스레이를 찍으면 상당히 많은 방사선에 노출되는 거라 당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상한 반응이기도 하지만요. 일단 무서워지니 언론들에 의한 공포 주입은 성공했다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실수를 저질러도 좌절을 겪어도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필자입니다. 잡담은 뒷전으로 하고 일단 원전 사고 현장의 실태를 포착하는 일에 집중하자고 맹세했죠. 이와키로 돌아가는 길에선 꼭 현지 분위기를 잘 전해주는 나이쓰 샷을 찍겠다 기약하겠습니다.

 

단, 그에 앞서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6. 자존심을 건 원샷 그 전에

 

일본어 관용구로 "腹が減っては戦は出来ぬ(하라가 헷떼와 이쿠사와 데키누)"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싸울 수 없다'는 뜻으로, 지금 필자가 놓인 상황에 딱 맞습니다(실은 그냥 예정대로 드라이브를 하다 잇따라 실수가 났고 마침 그 타이밍으로 점심 먹을 미치노에끼 나미에(道の駅なみえ)에 도착했을 뿐인데요. 뭐, 다큐에도 일정 정도 연출이 따르는 점,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명감이 클수록 실수로 인한 좌절감도 큽니다. 고작 점심 식사 한 끼가 상처투성이가 된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인가. 새삼스레 지나친 책임감을 품은 내가 원망스럽더라고요.

 

미치노에끼는 말 만큼은 생소한데 바꿔 말하면 드라이브인이고, 드라이브인 안에 있는 식당은 독점사업자고, 독점사업자는 가격 대비 상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죠(아뇨, 엄연한 편견입니다). 특히나 원전 사고 현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미치노에끼에서 뭘 먹으란 것인가. 아무리 필자가 후배라 그래도 오랜만에 멀리 이와키까지 찾아온 손님이기도 한데 말이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낼 용기도 없이 분위기 조성형 미소로 일관했던 필자였는데, 막상 미치노에끼 나미에에 도착하니 가면 위에 지어진 미소가 진짜 미소로 바뀌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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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노에끼 나미에 외관.

원전 사고 후에 새로 지었는지 새단장을 했는지,

아주 깨끗하고 깔끔한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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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자판기에 JA浪江(나미에 농협)란 글자.

浪江女子発組合이라는 동네 아이돌 그룹이 있는 모양이죠.

 

미치노에끼 나미에 안에 들어갔더니 또 놀랐죠. 일본 국내 보도는 아주 가끔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전부인 필자는 '후쿠시마'는 온 지역의 일상 생활이 파괴되고, 농사는 물론 모든 산업이 죽은 줄 알았죠. 그런데 미치노에끼 나미에에 병설된 후쿠시마 물산 매장은 후쿠시마에서 수확된 농산물을 비롯, 꽤 다양한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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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노에끼 나미에 안 풍경.

농산물이나 현지 특산품이 가득 차 있습니다.

 

오른쪽에 식당 입구가 보입니다. 필자는 특산품 매장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선배를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돌아볼 용기는 없고 바로 시킬 메뉴를 골라야죠. 일단 드라이브인에서는 라면이 단골 메뉴고, 후쿠시마는 라면이 맛이 있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어요. 실제 메뉴 사진을 보니까(죄송해요, 사진은 안 찍었어요) 꽤 맛이 있어 보였죠. 그렇지만.

 

사진 중 라면 바로 옆에 "나미에 야끼소바"라는 글자가. 고민하는 필자에게 선배가 "명물에 맛있는 건 없음"이라는 격언(?)을 가르쳐 줄수록 고민도 깊어져 갔어요. 하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난 사물에 있어서 후회없음"이라는 미야모토 무사시 선생(일본 에도시대 초의 검술의 달인. 그가 지은 "오륜서(五輪書)"는 한국에서도 번역판이 팔리고 있죠)이 남긴 격언으로 응했죠. 그런데 선배, 명물에는 운운하면서 어떻게 야끼소바를 시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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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물에도 맛있는 건 있음.

일반적인 야끼소바보다 약간 짙은 소스 맛과 굵은 면사리가 특징인 것 같아요.

한국 분들 입맛에는 꽤 짜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일본에서 가끔 마주치는 짠맛이 괜찮은 분은 아주 맛이 있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글을 쓰면서 사진을 새로 확인했는데 필자는 요리를 맛이 있어 보이게 찍는 사진 솜씨가 절망적으로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카메라 탓이기도 하지만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쌓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후식을 대신하는 커피를 마시며 옛날 이야기부터 요새 후쿠시마 정세까지 활발히 이야기가 오갔어요.

 

 

7. 반성이 있어야 인간은 성장한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갑니다. 시계를 보니까 미치노에끼 나미에에 도착한 지 벌써 3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아주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선배가 시계를 보면서 "좀 늦었네...중간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자." 잠깐만!! 방사선량 알림판은 그렇다 쳐도 두 개나 있는 원전을 하나도 찍지 못한 채 가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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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방사선량 알림판은 미치노에끼 나미에에도 설치돼 있었습니다.

일단 시간 당 0.1μSv 를 기준으로 따지면 0.05μSv/h는 괜찮은 수치인데,

이런 데에 방사선량 알림판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 써야 된다는 뜻이죠,

 

일이 있어서 빨리 이와키로 돌아가려는 선배한테 제발 두 개 원전 중 하나만큼은 보여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리고 친절한 선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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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아마 방사성 폐기물을 보관하는 건물일 겁니다.

위에 소개한 초록색 시트를 덮은 것과 달리 매우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고속도로에 들어가기 전에 제1원전은 볼 수 있겠다 해서 카메라를 손에 든 채 잡담하다, 드디어 그 순간이 왔습니다. 아까 전에 셔터 찬스를 놓쳐 슬퍼했던 필자의 마음을 헤아려준 선배.

 

"슬슬 나올 거야."

"고마워요, 선배!"

 

호흡이 딱 맞는 훌륭한 콤비입니다. 그러다 선배가 "앗, 저기 보이네!!" 합니다. 왼쪽 창문의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선배.

 

"어디, 어딥니까~!!" 외치며 무작정 셔티를 누르는 필자. 달리다 아주 멀리 하얀 건물이 살짝 보였던 것 같기도 했지만 설마 그게 제1원전이었는가. 더 가까이에 보일 줄 알았던 필자가 다시금 실수를 해버린 순간이었죠.

 

하지만 귀가해서 냉정하게 생각해 봤더니 실수는 실수이지만 상식적으로 아예 폭발 사고가 발생한 원전 가까이까지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리고 그렇다면 원거리를 광학 기술로 극복하게 해주는 렌즈가 있어야지 그나마 볼 만한 사진을 찍을 수가 있는 거죠.

 

첫 번째 문제는 필자의 상상력이 모자람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독자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딴지일보 편집장의 치사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식을 초월하도록 무책임하게 일을 시킬 수 있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싶고, 또 자신의 불찰 때문에 비참한 사진 밖에 못 찍었던 참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낄 정도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하루 빨리 카메라 및 렌즈를 마련하기 위한 비용을 입금하시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은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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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아주 작게 보이는 것이 아마 제1원전입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죠.

 

그래도 일을 할 때에는 최선을 다하는 필자. 셔터를 계속 누르며 연사를 시도했죠. 그런데도 카메라 성능이 별로 안 좋아서 겨우 위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좌절에 결코 지지 않는 자의 모습을 편집부는 무시하더라도 하나님 만큼은 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하 이와키로 돌아가는 길에 포착된 장면을 하나씩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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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방사성 물질이 덮은 토양을 제거하는, 제염 작업을 하는 모습입니다. 일견 잡초나 뽑아 정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오염된 토양은 봉지 안에 봉입되어 보관시설로 가는 모양입니다. 다음 사진에 나오는 트럭에 실린 하얀 봉지에는 방사성 물질이 부착된 흙이나 잡초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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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물질이 부착된 흙이나 잡초 등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봉지를 운반하는 트럭. 그 오른쪽에 보이는 트럭 앞 부분에 달린 현수막에 "오쿠마마치 1644 해체 제염 공사"라고 나와 있네요. 오쿠마마치에서 치러진 제염 공사에서 나온 폐기물 등을 운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전 사고 발생 지점에 가까운 지역이 폐허가 된 것을 상징하는 듯한 아래 사진들 역시 충격적입니다. 간판의 모양을 보면 로손(LAWSON)이라는 편의점임을 겨우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나 간판 역시 제염 작업을 거쳐야 철거할 수 있는 것이죠. 참으로 슬픈 광경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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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편의점 로손(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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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편의점 로손 부지

 

결국 선배와의 잡담 투어, 아니 제1원전 근처를 스쳐지나가 보는 미니 드라이브 투어는 애초 뭐가 목적인지 모를 정도 핵심을 놓친 여행이 되었지만, 오랜만에 필자가 좋아하는 선배를 만나 여러모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고 전혀 몰랐던 후쿠시마의 지금을 엿볼 수도 있었던 의의있는 여행이 됐습니다.

 

경쾌하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하루를 되돌아보는 필자의 눈에 들어온 방사선량은 1.1μSv/h. 선배, 액셀 더 세게 밟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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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 설치된 방사선량 알림판에는 1.1μSv/h의 표시.

기준치를 10배 이상 웃도는 수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