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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포로의 문제점은 이들 포로들을 ‘어디로’ 보낼까가 핵심이다. 거제도로 보낸다는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어디로 보낼까가 문제란 소리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라는 대목을 기억하는 독자가 몇이나 될까?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첫 구절이다. 이 소설의 소재가 바로 이 포로들과 관계된 문제이다. 상식적으로,

 

“북한에 억류된 남측 포로는 남으로 보내면 되고.”

 

“남한에 억류된 북측 포로는 남으로 보내면 되는 게 아닌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김수영 시인을 생각해 보자. 전쟁 당시 북한은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의용군을 모집했다. 말이 좋아 의용군이지 강제로 끌려간 이들도 꽤 됐다.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어거지로 전쟁에 끌려간 이들. 이 상황에서 포로가 된 거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참고 넘어가겠는데,

 

“너희들은 북한 포로니까 북한으로 가야 한다.”

 

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지금까지 남쪽에서 살았고, 가족 친지가 다 남쪽에 있다. 공산주의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얼떨결에 끌려가 총을 잡은 이들 보고 ‘북한 포로’니까 북으로 가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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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윙키즈’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이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결국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장이 납치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수용소장을 인질로 ‘일괄 북송’을 외쳤다. 이 폭동의 최대 피해자는 반공포로들이었는데, 반공포로 105명이 공산포로에게 살해당한 거다. 도대체 그놈의 이념이 뭔지...)

 

<반공포로>란 개념이 이렇게 나온 거다. 이들에게 북한행은 죽으란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더 큰 골칫거리는 중국군이다. 중국도 참전을 했던 상황이기에 당연히 포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이 중국으로 가기 싫어했다는 거다.

 

“우리 그냥 대만으로 보내주면 안 돼?”

 

정말 당황스러운 주장이었다. 중국군으로 참전해서 싸우다, 대만으로 귀국하겠다는 발상. 한마디로 말해 공산주의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거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군을 몰아낸 지 겨우 1년도 안 돼 중국은 참전을 결정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의 장악력이 얼마나 될까?

 

중국 포로들 중 3/4이 대만행을 말한 거다.

 

그 자체만으로도 중국에겐, 공산당에겐 치욕이었다. 결국 이 포로 문제는 휴전협정 협상 기간 동안 가장 큰 난제로 자리 잡게 됐다. 만약, 내전이 아니었고 이념을 가지고 싸우는 전장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리는 없었을 거다.

 

그러나 6.25는 내전이고, 이념 전쟁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총성을 멈출 수 있다. 판단을 내려야 했다.

 

1952년 1월부터 포로 문제를 가지고 협상에 들어갔다. 이 포로 문제가 합의된 게 1953년 6월이다. 포로 문제 하나 가지고도 1년 반이나 걸렸던 거다. 달리 말하면,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늘어진 이유 중 하나가 포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게 맞다. 남과 북은 1년 반 동안 포로 문제를 가지고 싸웠다.

 

이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고를 친다. 1953년 6월 18일,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중국 출신 포로 중 반공 성향 포로를 석방한 거다. 이 당시 이승만이 이런 일을 벌인 건 그만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원래 휴전을 반대했다.

 

“UN군이 나서지 않겠다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

 

이게 과연 말인지 방구인지...전쟁 전부터 북진통일을 외쳤던 이승만은 전쟁 중에도 몽니를 부렸다.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 부산정치파동. 소위 말하는 발췌개헌을 했을 때부터 이승만은 미국 눈 밖에 나 있었다.

 

이 부산정치파동의 핵심 골자는 이승만이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개헌을 한 거다. 이 당시 이승만이 내세운 건 대통령 직접선거였다. 이걸 두고 이승만을 칭송하는 이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한 위대한 지도자’라 말하는데 실상은 좀 달랐다. 전쟁 상황, 더구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들을 상대로 투표를 해야 한다. 이 당시 인지도 면에서 가장 높았던 게 이승만이었기에 낙승을 자신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한 거였다. 이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내각제를 주장하던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납치해 간다. 이 와중에 정헌주를 비롯해 12명의 의원들은 공산당 관련 혐의로 몰았다. 즉, 빨갱이 딱지를 붙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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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산정치파동은 미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아니, UN군 전체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끼쳤다.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였고, 전 세계 외신들... 특히나 UN군을 파병한 나라의 기자들이 득실댔다. 이 와중에 백주대낮에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계엄령을 때리고, 개헌을 하겠다고 들고일어난 거다. 그것도 어떤 고매한 이상이나 신념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말이다.

 

UN군으로 참전했던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낌이 어땠을까? 내 형제, 내 아들들이 피 흘리며 지키려 했던 게 고작 한 늙은이의 노욕을 채워주기 위한 짓이 된 거다.

 

미국은 이때 진지하게 이승만 제거 계획을 생각했다. 바로 에버레디 계획(Plan Eveready)이었다.

 

이승만은 그런 존재였다. 이 상황에서 다시 한번 사고를 친 거다. 반공포로석방은 미국을 포함해 전쟁 참전국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당시 이승만의 계산은,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미상호방위조약 같은 거 체결할 거 아냐?”

 

라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아무리 봐도 전쟁은 곧 끝날 거 같은 상황이었기에 이승만은 휴전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걸 얻어내려 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 일본이 체결한 방위조약 같은 걸 한국도 하나 받아내야겠다는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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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벼랑 끝 전술은 당장 아이젠하워를 분노케 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새벽에 깬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라고 했다(이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재임 시절엔 단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4.19로 쫓겨나고 난 후에야 살짝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곤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 차관보를 한국으로 급파했다.

 

“가서 끝을 내고 와”

 

로버트슨과 이승만의 단독 협상이 16일간이나 진행됐다. 이 협상이 끝난 뒤에야 정전협정이 체결되게 된다.

 

아이젠하워가 이렇듯 분노했을 때, 아이젠하워보다 더 분노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중국의 마오쩌둥이다. 그는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듣자마자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곤,

 

“석방된 포로만큼 남한 놈들을 죽여라!”

 

이어지는 금성지구 전투에서 양측은 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포탄을 쏟아부었다.

 

(금성전투는 1953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6.25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전투이다 보니 양측 다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부었던 전투이다)

 

금성 돌출부를 밀어내느냐, 지키냐의 싸움이었는데... 이때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했고, 이에 화가 난 마오쩌둥이 석방한 반공포로 숫자만큼 한국군을 죽이란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중국군은 1951년 춘계 대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공세를 전개했다.

 

보면 알겠지만, 단순한 포로 석방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얽히고설킨 이념의 실타래 앞에 북으로 남으로 포로들이 오갔고, 북과 남에 미련이 없었던 이들은 제3국을 선택하게 된다(소설 ‘광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결국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원래는 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해야지만, 휴전을 인정한다는 거였는데, 이승만은 휴전 체결 후인 1953년 10월에서야 가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상호방위조약이 70년 가까이 이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