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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나 우리가 평소에 잘 인지하지 못 하고 살아가는 현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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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transference)’이다. 프로이트가 밝혀낸 것으로,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전이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인간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전이’란 원래 치료 공간에서 과거의 관계 패턴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 원래 목적은 그렇지만 치료 공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나타난다. 

 

관계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은 가령 이런 것을 말한다. 어릴 때 가혹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훗날 엄격한 선생님이나 군대 선임을 만나는 경우 과거와 유사한 두려움과 불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폭력에 노출됐던 사람이 훗날 폭력의 희생자로서의 운명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일관성이 없는 부모에게서 양육됐던 사람이 훗날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똑같이 불안정한 애착을 반복할 수도 있다.

 

바에서 일을 하다 보면, 아니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전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쉽게 흥분할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손님을 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학문적 개념이긴 하지만, 실제 일상생활에서도 상당히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개념이 아닌가 싶다. 

 

마침 전이와 관련되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나와 그 손님 사이의 ‘전이’

 

"아니 저번에 주셨던 거랑 맛이 다르잖아요! 여기 다시는 못 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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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삿대질을 하며 얼굴을 붉힌다. 어느 정도 예견된 반응이기는 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대응이 좀 늦었다. 이분 저분 서빙을 하다 보니 거의 이십 분 정도를 기다리시게 했다. 점점 얼굴 표정이 안 좋아지길래 뭔가 터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그녀를 처음 본 것은 6개월 전 무렵이었다. 당시 친구와 함께 이곳에 왔는데, 두 사람 모두 위스키를 즐기는지 매주 주말이면 이곳을 방문했던 것 같다. 듣고 싶지 않아도 두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이리저리 좀 주워듣게 됐다.

 

저번 달인가 한 번은 마스카라가 온 얼굴에 번진 채 한밤중에 이곳을 찾아왔다. 친구와 절교하고 오는 길이란다. 두 사람이 항상 잘 지내던 것만 보아왔던 터라 나로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좀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심리적 지지가 필요해 보여 따뜻한 말 몇 마디를 건넸다. 이후로 그녀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이곳을 찾았다.

 

"여기 오면 마음이 너무 편해져요. 우리 바텐더님 같은 분들만 세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술도 맛있구"

 

칭찬이 나쁘지 않았지만, 어딘가 켕기는 면도 있었다. 머리 한켠엔 언젠가 나에 대한 태도가 돌아서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지나친 걱정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3일 전 홀로 바를 찾은 그녀가 친구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쁜 년. 살다가 그 년 만난 걸 가장 후회해요. 자기밖에 모르는 것. 지금껏 나한테 했던 것도 죄다 가식이었던 거지"

 

그녀의 태도가 이토록 돌변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아니, 그보단 그 친구가 그렇게 욕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던 것 같다. 나의 개인적 관점일 수 있겠지만, 그 친구만큼 사람을 잘 받아주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녀가 사람을 조금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그냥 받아주곤 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의 다툼이 시작된 건 일주일 전 무렵이었다. 그들이 포함된 친구 무리 안에서 뭔가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단톡방 안의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따돌리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만큼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친구가 다른 친구들 쪽 손을 들어줬나 보다.

 

“너라면 그래도 내 입장을 생각해줄 줄 알았어.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잖아? 어떻게 너조차 걔네들과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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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친구를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다. 그 친구도 이번만큼은 정색하며 자기 의견을 말하는 듯했다. 아마 이전부터 쌓여있던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에는 몇 번의 기복이 있었다. 친구는 미안했던지 선물을 주기도 했는데, 또 그럴 때는 그녀가 행복해하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입에 침이 마를 새도 없이 자신의 친구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잘 지내는 둘을 보고 ‘그래 어쩌면 두 사람이 잘 지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두 사람은 절교를 했다. 그날 밤, 그녀의 멘탈은 거의 바닥을 치는 듯했다. 바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바카디를 시키더니 샷 다섯 잔을 연달아 마시는 것이었다. 혼자 울다가 친구를 욕하기를 반복하더니 그녀는 대뜸 “내가 죽어버려야 친구 소중한 줄 아는 거겠죠?”라면서 한강에 가서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했다.

 

뭔가 점점 상황이 산으로 가는 것 같아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왜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힘들지 공감한다고 표현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온전히 나의 말에 집중했는데, 그때 뭔가 그녀가 나를 강렬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런 나의 역할이 썩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어떤 애착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그녀는 소중한 타인과의 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집착하는 패턴이 지속됐다.

 

애착은 접착제와 같아서 한 번 붙인 것을 떼어내는 것이 무지 어렵다. 이별이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붙어있어야 할 대상을 상실하는 경우, 그것은 강렬하게 다른 대상을 열망하게 된다. 또 다른 접착 대상을 찾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그 대상이 된 듯했다. 그녀는 무섭게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겁이 났다.

 

그러다가 오늘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그녀를 홀대했던 것이다. 마침 오늘 손님들 중 혼자 온 분들이 많았던 탓도 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언젠가 그런 부메랑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나에 대한 태도 또한, 그녀의 친구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당하고 나니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화도 났던 것 같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내가 그렇게 잘해줬던 건 하나도 기억을 못 하고 있나? 피나콜라다에 코코넛 크림 양이 좀 줄었다고 그걸 그렇게 화낼 일인가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일단 참고 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전이(transference)’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심리학을 공부할 때 몇 번 상담 실습을 해본 적이 있다. 나의 지도교수는 항상 ‘전이’에 신경 쓰라고 말했다.

 

 

어떻게 전이에 빠지게 될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이란 과거의 관계 패턴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심리상담을 하다 보면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에서 특정한 애착의 문제를 보였던 사람은, 그와 동일한 애착의 패턴을 치료자와의 사이에서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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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킹덤빌더 라이브러리>

 

그러나 이런 현상이 꼭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서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특정한 관계 패턴을 모든 인간관계에서 수없이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과거 어머니에게 느꼈던 불만을 자신의 배우자에게 투영하여 표출하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을 상사와의 관계에서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반복이 ‘전이의 핵심’이다.

 

전이라는 현상의 독특성은 그것이 언제나 두 사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있다. 자신의 과거 패턴을 현재의 시공간에 덮어씌우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작용 말이다. 

 

상대방이 그렇게 패턴을 덮어씌우려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하면 갈등을 상당 부분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이가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고도로 훈련을 받은 상담가들도 종종 전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상담가들도 그럴진대, 일반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전이가 발생할 때는 덮어씌움을 받는 쪽에서 모종의 압박을 경험한다. 상대방이 과거 대해왔던 인물들과 동일한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은 무의식적 압박을 느끼는 것이다. 이상하게 어떤 사람만 만나면 특정한 역할(예 : 돌보는 역할, 꾸짖는 역할, 경쟁하는 역할 등등)을 맡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신의 과거 경험을 덮어씌우면서 상대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면서 살아간다. 대인 관계는 그런 식으로 삶 속에서 반복된다. 그렇게 과거의 갈등들은 계속해서 다른 얼굴을 하고 자신의 앞에 등장한다. 

 

그녀와 나 사이에서 나타난 이 현상들도 어쩌면 전이의 일종은 아니었을까. 친구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나에게 옮겨졌고, (그녀 입장에서) 자신을 홀대하는 나를 보면서 자신을 홀대했던 친구의 얼굴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내가 그녀를 보듬어주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나의 과거 경험에서 유래했던 것일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어릴 적부터 손이 많이 갔던,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던 나의 여동생이 겹쳐 보였을지 모른다. 

 

어느 것이 됐든, 바텐더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다. 자칫 선을 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 연극을 그대로 방치했다간 골치 아파지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직장과 사생활은 엄격히 분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립성이 필요한 것이다.

 

 

원치 않는 전이를 겪었을 때의 현명한 대처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는 그것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배웠다. 잘못하면 화를 더 키우게 되거나, 전이 속에 말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나의 지도교수님은 이럴 때 감정을 안아(holding)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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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은 나빴지만, 나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진정을 시켜야 했기에 한 마디 건네본다.

 

"죄송해요. 오늘 너무 많이 기다렸죠. 전과 다르게 마티니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많이 상하셨겠어요"

 

"아니 내가 사람이 많아서 그러는 건 솔직히 아니에요. 이게 전하고 너무 다르잖아요.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게요 일관성이 좀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많이 실망하셨겠네요. 다시 준비해드릴까요?"

 

그녀는 알았다면서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래도 아까 전에 비해서는 화가 좀 줄어든 상태다. 그녀는 술을 다시 받아들더니 한 모금 마시고는 바를 나간다. '나 삐졌다'를 시전하는 듯하다. 나는 공손히 그녀에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한숨을 돌려본다. 아아... 이 모든 잘못은 사실 나에게 있다. 애초에 중립성을 잃지 말았어야 했다. 왜 그녀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걸까. 유치하기는. 

 

갑자기 걱정이 밀려온다.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수도 없이 반복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당분간 좀 거리를 두고 대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병원 예약을 해본다. 내일 상담을 받으러 가봐야겠다.

 

 

 

리빙 포인트

 

1. 살다 보면 불쾌한 대인관계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쌍방이 제공하는 것이다.

2.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모든 대인관계에는 전이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자.

3. 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사람의 과거 대인관계 패턴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그들이 현재 대인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4. 상대가 크게 화났을 때는, 특히 감정 조절이나 애착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절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5. 감정이 조절 안 되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 감정을 일단은 안아(holding)주면서 잠재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