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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글을 쓰고 있었다. 뭔가 맘에 안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딜리트 키를 팍팍 눌렀다. 단어 몇 개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거 같았다. 애초에 원고 방향이 잘못됐다. 어쩔 수 없이 문서를 통째로 휴지통에 버렸다. 미련 남아 다시 꺼내는 일 없도록, ‘휴지통 비우기’까지 완료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글 프로그램을 켰다. 새하얀 작업 창에 커서만 깜빡깜빡했다.

 

그 커서를 가만히 보다가 새삼 참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를 휴지통으로 옮기고, ‘휴지통 비우기’ 버튼을 누르기까지 불과 5초나 걸렸을까. 나의 얄팍한 주장과 논리, 미흡한 문장과 부적절한 예시까지, 클릭 몇 번으로 완벽하게 삭제했다. 세상에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늘 그랬다. 글쟁이로 10년 살았는데, 늘 고민 없이 쉽게 썼다. 문장 하나 지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여차하면 지워버리면 그만이니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쓰면 되니까. 뭐 대충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지난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문장을 딜리트 키로 지워버렸다.

 

사실은 내 삶이라는 것도 그런 식이었다. 그게 글쟁이로 체내한 습관 때문인지, 타고나길 그런 놈으로 타고났는지는 모르겠으나(아마도 후자일 텐데), 세상 거리낄 것 없는 놈처럼 살았다. 상대방 감정이나 마음 같은 거 헤아리지 않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뱉은 말이나 행동도 딜리트 해 버릴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더 그랬다. 독한 말만 골라 뱉었다. 상처 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놓고 쉽게 사과하고, 사과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되레 화냈다. 또 비슷한 말과 행동으로 상처 주고, 쉽게 사과하고, 사과했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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てなおし[데나우씨]

 

목수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뭣도 모르고 열심히 망치질하는데 작업반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야 이 X발. 얀마!!!! 일을 어떻게 하는 거여?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아 X발 X 같네. 여기 데나우시 났으니까, 다 뜯어내고 다시 작업해. 아휴 X발.”

 

“예예?? 데나우시요?? 데나우시가 뭐예요?”

 

“니가 오전 내내 작업한 거 다 잘못됐다고!!! 다시 다 뜯어내라고.”

 

그때 ‘데나우시’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불완전한 곳을 고침’이라는 뜻의 일본어 てなおし[데나우씨]에서 파생한 노가다 용어다.

 

데나우시 상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미 시공했는데 도면이 바뀌었을 때다. 이런 경우는 작업자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짜증은 나더라도 누굴 탓할 순 없다. 그렇다고 원청과 하청에 따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럴 땐 작업반장도 X발을 앞에만 붙인다.

 

“에이~ X발. 야~ 여기 데나우시래. 도면 바뀌었다니까, 바뀐 도면 보고 고쳐줘라.”

 

두 번째는 작업자가 도면을 잘못 봤거나, 도면은 제대로 봤는데 잘못 시공했을 때다. 어쨌거나 ‘빼박’ 작업자 잘못일 때. 이땐 작업반장도 입에 거품을 문다.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X발이 추임새처럼 들어간다.

 

작업반장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는 우선 그 타이밍 때문이다. 작업반장이 도면 들고 다니며 결과물을 확인하는 건, 통상 모든 작업이 끝난 뒤다. 해서, 데나우시 발견하는 타이밍도 보통은 그때다. 작업반장이 소장한테 “목수팀 작업 다 끝났으니 다음 공정 진행해주세요.”라고 보고하기 직전 말이다. 데나우시 하나 때문에 이어질 모든 공정이 ‘올스탑’ 되는 거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금방 수정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게 간단치가 않다. 애인을 집에 초대했다 치자. 배고픈 애인을 위해 열심히 요리하다가 어라라? 태워버렸다. 냄비도 새까맣게 탔다. 이런 제길. 애인이 기다리니까 급한 대로 새로운 냄비에 다시 요리를 시작한다. 타버린 음식은 버리면 되고, 새까매진 냄비는 애인이 돌아간 후에 철수세미로 박박 닦으면 그만이니까.

 

그것처럼 데나우시 났으니까 그건 그냥 그것대로 버려두고, 자리 옮겨 새로운 자재로 작업한다? 목수 일은 그게 불가능하다. 시공해야 하는 자리와 그에 필요한 자재가 정해져 있다. 어떤 이유로든 데나우시가 나면 우선 시공한 모든 작업물을 뜯어내야 한다. 말하자면 새까맣게 탄 냄비부터 철 수세미로 박박 긁어내고, 타버린 음식도 물로 헹궈내서 재활용해야 하는 거다.

 

이 작업을 현장에서는 바라시(‘분해하다’는 뜻의 일본어 ばらす[바라쓰]에서 파생.)라고 하는데, 여기부터 골머리다. 강력본드와 같은 맥락이다. 강력본드 칠해서 붙이긴 쉬워도 떼려면 안 떨어지듯, 목수 일도 시공보다는 바라시가 까다롭다. 못 박을 때는 시원시원하게 박히는데, 뺄 때는 진~~~~~~짜(x100) 안 빠진다. 이리저리 각도를 꺾어가며 몇 번이나 힘써야 겨우겨우 빠진다.

 

그렇게 바라시를 다 끝내야만 다시 시공할 수 있다. 그러니까 데나우시를 냈다는 건 시공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을, 시공-바라시-시공으로 끝냈다는 거고, 그 말인즉 품이 세 배 이상 들어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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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휴지통 비우기’는 없다

 

그렇듯, 데나우시는 그 대가가 혹독하다. 딜리트 키 누르듯 쉽게 지울 수 없다. 반드시 추가적인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경우에 따라 우리팀 동료는 물론, 다른 공정팀에도 피해를 준다. 그렇게 혹독하게 대가를 치러도 ‘휴지통 비우기’처럼 세상에 없던 일로 만들 순 없다. 나무에 남은 수많은 못 자국, 바닥에 널브러진 지저분한 잔재가 명확한 증거다.

 

이런저런 걸 떠나, 데나우시 낸 나 자신에게만큼은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 박았던 못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고, 나무를 뜯어내고, 다시 나무를 자르고, 그 나무에 다시 못을 박는 그 과정에서, 작업반장에게 먹었던 쌍욕과 내 작업이 끝나기만 기다리던 다른 공정팀 사람들 눈빛과 이런 상황을 자초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적어도 나만큼은 몸으로 기억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목수는 망치질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톱질로 나무 하나하나 자를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수시로 도면을 검토하고, 수백 번 줄자를 빼 들어 치수를 확인한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지만, 이제는 나도 안다. 인생에 딜리트 따위는 없다는 걸 말이다. 사과한다고, 마음에 남은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게 새겨진 상처를 보듬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물론, 그런 걸 깨달았다고 내 과거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살면서 뱉은 독한 말과 행동들, 그렇게 상대방에게 남긴 상처와 흔적은 영원히 남을 거다. 그럼에도, 늦었지만 사죄하고 싶다.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모든 이에게 말이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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