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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능선>이란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어르신들은 치열한 전투의 한 조각으로 혹은 유행가 가사의 한 줄로 생각할 테고, 게임 좀 하는 사람들은 맵 이름을 더 많이 떠올릴 것이다.

 

'내장을 끊는(斷腸) 능선(陵線)'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게 뭘까?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는 거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UN군이 북측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피의 능선’부터 시작해 ‘단장의 능선’까지, 그야말로 피와 내장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나아갔다.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UN군은 3,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북한과 중국군은 2만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걸로 추산된다).

 

이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여러 가지다. 

 

먼저, 이런 식의 고지전이 무의미하다는 것. 미국과 UN군은 휴전 협상을 하는 와중에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북측을 압박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가했으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미 2보병사단과 프랑스 부대(대대단위가 투입됐다)는 북한군 제6, 제12사단을 압박해 밀고 올라갔고, 목표였던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강원도 양구군에서 벌어진 한 달 남짓한 이 전투에 미군은 ‘질렸다’. 지지부진한 전쟁,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펼친 작전에 그야말로 손발을 다 든 거였다. 

 

'단장의 능선' 이후 미군은 더 이상 사단 단위의 병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작전을 펼치지 않는다. 질렸던 거다. 

 

6.25 한국전쟁은 상당히 특이한 전쟁이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었으며, 전쟁 1년도 안되는 기간. 정확히 말하면 반 년 만에 3번에 걸친 붕괴, 그리고 판갈이가 있었다. 

 

국군서울수복입성-1950.jpg

서울을 수복한 국군(1950)

(출처: 국가기록정보원, 이하 동일)

 

초반 북한에 의한 기습이 있었고, 남측은 붕괴 직전까지 갔다. 김홍일 장군이 진두지휘하면서 지연작전을 펼치지 않았다면, 전쟁이 어떻게 됐을지 뻔했다. 당시의 한반도 방어선은 제1선이 한강, 제2선이 금강, 마지막이자 제3선 낙동강이었다. 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을 끼고 막아내야 했던 거다.

 

그나마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고 난 다음부터는 나름 할 만해진 게 북한군은 공세 종말점에 다다른 상태였고, 하늘에선 미군과 UN군이 제공권을 잡은 상태였다. 목줄을 잡아 흔들고 있었다. 부산을 통해서 끊임없이 병력과 장비가 날아왔고, 낙동강 전선은 안정화됐다.

 

1950년 8월 미국 NSC는 어디까지 진격할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낙동강 전선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는데 말이다). 이미 낙동강 전선의 피아 간 병력비는 2대 1이었다. 

 

그리고 반 년 사이에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뒤이은 중국군의 개입과 1.4 후퇴까지 벌어졌다. 

 

이후는 지지부진한 힘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밀고, 밀리는 지루한 전장상황. 휴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1951년 7월 양측은 드디어 휴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둘 다 자신의 힘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문제는 이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했다는 거다. (휴전에 끝까지 반대했던 스탈린의 몫도 제법 컸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정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스탈린이 1953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흘러갔을지 예측할 수 없다)

 

휴전선을 어떻게 그을지부터 시작해서 문제는 산적해있었다. 그냥 선만 긋는다고 해결될 게 아니었다. 이런 첨예한 갈등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게 ‘포로’다. 이 때문에 몇 번이나 협상이 어그러질 뻔 했고,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인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다.

 

“전쟁에서 포로 생기는 건 당연한 거고, 전쟁 끝나면 이거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라고 판단할 수 있는데, 이 포로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다. 전쟁의 규모에 비해 포로의 숫자, 성향, 이들의 처리가 문제였다.

 

투항북한군.jpg

투항하는 북한군(1950)

 

또 하필이면, 이 때가 1949년 제네바 제3협약, 정확히 말하면, 『제네바협약에 대한 추가 및 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 (제1의정서) (Protocol Additional to the Geneva Conventions of 12 August 1949, and Relating to the Protection of Victims of International Armed Conflicts)』를 체결한 직후였다. 

 

이 조약에서 눈 여겨 봐야할 건 '포로에 대한 처우' 문제다. 포로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 세세한 처우와 권리규정까지 다 나와 있다. 그 정의부터 보면,

 

“모든 전투원은 무력충돌에 적용되는 국제법의 규칙을 준수할 의무가 있으나 이들 규칙의 위반으로 인하여 전투원이 될 권리를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적대당사국의 권력내에 들어갈 경우에는 3항 및 4항에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쟁포로가 될 권리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재미난 건 북한과 중국은 당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이를 들먹이며 포로 송환을 요구했다.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자, 그렇다면 어째서 포로 문제가 불거진 걸까? 이야기는 '포로가 생기면서부터' 시작된다. 1950년 8월까지 대한민국 국군은 포로 문제를 가지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선은 끊임없이 뒤로 밀렸고, 포로라고 해봤자 고작 낙오병 정도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다음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일부터 포로가 생기기 시작했고, 1950년 10월엔 5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북진을 시작하고 11월에는 3만 5천 명이 늘었고, 1950년 12월에는 국군과 UN군 수중에 총 14만 명 수준의 포로가 떨어졌다. 

 

문제는 진격할 때는 포로 문제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는 거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인천-부산에 분산수용을 하고 있었다.

 

“이제 곧 통일되겠지.”

“그때까지 잠깐 가둬 놓는다 생각하자.”

 

이렇게 가볍게 생각했을 법 하다. 누가 압록강에 먼저 도착할 거고, 누가 백두산 천지에 태극기를 꽂을까를 고민할 시기가 아니었던가? 

 

문제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다. 중공군의 총공세 앞에서 전선은 속절없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1950.jpg

중공군의 인해전술(1950)

 

UN군이 후퇴하면서 포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냥 내버려두면 이들은 다시 총을 들고 전선으로 뛰쳐나올 것이기에 죽이든가 데려가든가 결론을 내야 했다. 결국 이들은 포로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이 포로들을 다 어디에 수용해야 할까'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포로수용소를 만든다는 게 꽤 골치아픈 문제였다. 당장 10만 단위의 인원을 수용해야 했고,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감시해야 한다. 외부와의 접촉을 막아야 했으며, 도망도 못 가게 해야 했다. 전시 상황에서, 이 좁은 한반도 땅에서 그런 곳을 찾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제일 먼저 떠올린 게 제주도였다. 일단 크고, 섬이기에 배를 구하지 못하면 탈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제1군사훈련소가 있었다. 게다가 남한 사람들에겐 ‘마지막 피난처’란 이미지가 강해서 이미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었다. 한때 한반도를 빼앗기면 제주도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결사항전 하겠다는 계획까지 짜놓지 않았던가? (제주도에는 돈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서, 여차하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들만이 한 건 아니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거제도였다. 여의도 4배 크기의 거제도는 LST(Landing Ship Tank, 미국의 상륙 작전용 함정)가 정박하기 쉽고, 넓은 들판이 있어서 막사를 짓기 쉬웠다. 섬이기에 포로들의 탈출의지를 꺾을 수도 있었다. 여러 지형적 조건이 맞아 떨어졌다. 미국은 이곳에 6만 명 수준의 포로를 수용하기로 했고, 이렇게 부산에 있던 5만 명의 포로가 거제도로 옮겨졌다(훗날 3배 이상의 포로들을 집어넣는다).

 

비슷한 시기 이 거제도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든다. 흥남철수 당시의 민간인이었다. 북진을 했다 철수하던 미군이 흥남부두에서 철수할 때 민간인도 잔뜩 배를 타고 온 것이었다. 

 

어느새 거제도에는 원주민 10만 명에, 피난민 10만 명, 포로 17만 3천 명이 북적이게 됐다. 

 

보통의 포로라면 여기서 열심히 ‘탈출’을 꿈꾸거나 사보타주 등등의 활동을 하면서 포로의 역할만 하면 그만인데, 6.25 전쟁은 내전이었다. 특히나 전쟁 그 자체의 성격 자체가 오묘했다. 내전이면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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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겠다. 김수영을 보면 알 수 있다. 

 

① "거제리 수용소에서 나는 삼 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게 되었다"

 

② "이태원 형무소에서 인천 포로수용소로 인천 포로수용소에서 부산 서전병원으로 부산 서전병원에서 거제리 제十四야전병원으로-가족 친구 다 버리고 왜 나만 홀로 포로가 되었는가!"

 

③ "나는 울었다. 그들도 울었다. 남겨 놓고 간 동지들은 모조리 적색 포로들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아주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비밀선봉대를 조직하려고 결심하였다"

 

6.25에 의해 망가지고 틀어진 인생이 한둘일까 보냐만, 김수영 같은 이도 없을 거다. 전쟁 당시 서울에 있었던 그는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탈출한다. 그러나 패잔병 추적에 나선 경찰에 체포돼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압송됐고, 3년을 보냈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오자 들린 소식은 아내였던 김현경이 자신의 선배였던 이종구와 살림을 차렸다는 거였다. 이때의 마음을 담은 시간, 바로 <너를 잃고>이다.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圓周(원주)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몇 년 뒤 김현경은 다시 이종구를 떠나 김수영에게 온다. 이 김수영 같은 사람들이 6.25 한국전쟁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