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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이 정치를 흡수했던 영국 지배하 홍콩 

 

홍콩의 저명한 학자인 진야오지(金耀基) 선생은 영국 식민지하의 홍콩을 ‘행정이 정치를 흡수했다’는 말로 개괄했다. 홍콩의 제도적인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격언처럼 사용된다. 

 

정치가 필요 없을 만큼 제도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이다. 법률, 공무원과 경찰, 세수, 교육 등 이미 제도가 완벽하기에 따로 정치라는 행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정치도 우리가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일 뿐, ‘정치’ 그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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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홍콩

 

국가적으로 행정이 중요할까, 정치가 중요할까. 행정이 완벽하면 정치는 필요 없을까. 정치 없는 행정은 또 어떤 문제를 불러오게 될까. 나는 이런 문제에 있어 문외한이고, 여기에서 논의할 지면도 부족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정치인이 무엇을 아느냐’ 고 했단다. 정치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행정 제일주의나 효용 제일주의를 견지했다. 홍콩의 행정 중심 흐름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말한 건, 여기서 그의 공과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되었건,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가졌던 생각이 홍콩의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행정 중심주의는 거꾸로 보면 정치가 없다는 말인데, ‘정치 없는 홍콩’ 즉 ‘정치를 연습하지 못한’ 점은 원죄가 되어 홍콩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정치는 ‘주고받는’ 행위인데, 최근 시위에서 홍콩본토(locality)파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향후 상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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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홍콩 행정의 최고 책임자는 영국 여왕의 전권대표인 총독(지금은 특구행정장관)이었다. 물론 견제 장치도 있다. 행정국과 입법국은 총독에게 협조하고, 법률을 제정하는데, 양자 모두 총독에게 건의하고 질문할 수 있다. 

 

식민지 초기부터 영국 재벌기업들의 발언권은 매우 강해서 곧 참정권을 요구했다. 1850년에 자딘 그룹의 임원이 처음으로 입법국 의원이 되었고, 이후 1900년까지 50년 동안 입법국 의원의 70%가 재계 출신이었다. 홍콩은 식민지 초기부터 재계의 영향력이 매우 큰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자유 특히 경제활동의 자유는 그 폭을 더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주는 없고 자유만 있던 곳

 

홍콩을 스토리텔링할 때 유행하는 말이 또 있다. ‘민주는 없고 자유만 있다’는 것이다. 홍콩의 ‘자유’는 유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홍콩의 ‘공기’는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때 공기는 자유를 말한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홍콩을 떠나고서 알게 되었다. 홍콩에는 편안함이 있다. 그 편안함의 근원을 곰곰이 따져보면 ‘자유’라는 걸 알게 된다. 

 

홍콩영국 정부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실현해주었다. 자유는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기본 조건일 것이다. 네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거라 하고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기업의 성장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기업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줄 것인가는 모든 정부의 고민거리이다. 기업의 사업 아이템이나 활동 범주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따라 경제 수치는 등락하기 때문이다.

 

‘경제 자유 지수’라는 것이 있다. ‘경제 자유 지수’란 국가에서 개인이나 기업이 얼마나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이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인간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틀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이 인정받고, 또 그 능력이 현실로 구현되고, 다시 그 성과가 사회 전체에 골고루 나누어지는 선순환구조야말로 자본주의의 이상일 것이다. 

 

홍콩식 첨단 자본주의는 이렇게 기초를 마련했다. 

 

“우리 홍콩영국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공격하지 않는 한, 네 생각과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허용해주마!” 

 

홍콩 정부는 시종일관 ‘불간섭주의’를 자랑했다. ‘불간섭주의’는 홍콩의 자유를 상징하는 구호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경제 관료들은 ‘작은 정부’라는 말도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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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신축된 홍콩 정부 청사

 

경제학에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하나이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 흐름에 맡겨두자는 주장이 다른 하나이다. 

 

원래 1841년 홍콩이 무관세 자유무역항으로 선포될 때, 경제활동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자는 영국 고전경제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처음부터 영국 정부는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해보라는 쪽에 기대고 있었다.

 

당연히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근대화된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바탕에는 영국식 자유주의와 이성이 깔려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1997년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달라지고 있다. ‘행정’을 지배하는 것은 ‘정치’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행정이 정치를 흡수한 시대’는 지나갔고, ‘정치가 행정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주권 반환 이후 홍콩의 공무원들은 중국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수시로 중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만이 홍콩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홍콩의 공무원들은 이제 국가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인사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2021년 4월 충성 서약을 거부한 129명의 공무원에 대한 해임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7월에는 구의회 의원 1백여 명이 사직했다. 

 

‘행정의 공백’과 ‘느슨해진 기강’을 지적하는 뉴스가 등장하고 있다. 홍콩을 떠난 혹은 떠나고 있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업의 자유가 축소되고 있다는 뜻이다. 행정 또는 제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처럼 보인다. 요즈음 홍콩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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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8일, 홍콩 정부의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을 감독·지도하는 ‘중앙인민정부 홍콩 주재 국가안보공서’ 현판식.

 

 

초기 홍콩의 교육

 

홍콩의 성공과 실패는 ‘홍콩영국 정부(港英政府)’가 만들어 낸 것이다. 홍콩 사람들은 이렇게 ‘홍콩영국 정부’라는 말을 사용한다. 홍콩 정부는 사실 홍콩의 정부가 아니라 영국 정부의 지시 하에 움직이는 정부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홍콩의 성공과 실패는 영국의 것이다. 

 

식민지 초기 정부는 교육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중국어 서당과 교회학교를 지원해 주는 정도에 그쳤다. 대다수가 교회 학교였는데, 학교 측의 목표는 전도에 있었고, 학생들의 목표는 영어를 배워서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중국어와 영어를 모두 중시하던 교육 정책은 1878년부터 영어 중심으로 전환되어 식민지 홍콩의 영어교육 체제를 확립했다. 중국어 중심의 사립학교도 설립이 되지만 차선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임을 감안하면 영어는 광동어라는 현지어 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홍콩인들 대부분이 광동어 외에 영어를 하는데, 외국어 능력은 차원이 다른 정보의 습득을 보장한다. 물론 개인의 능력은 사회의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1908년 홍콩 총독이 대학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인도의 재벌 모디(H. N. Mody)와 홍콩의 중국인 재벌들 그리고 중국 양광 총독의 기부로 홍콩대학의 개교가 추진되었다. 대학준비위원회는 영어를 교학 언어로 결정했고, 중국어문학만은 중국어로 강의한다는 원칙을 만들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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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대학

 

1911년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대륙에서 홍콩으로의 인구 유입이 확대되었고 학령인구에 대한 교육 문제가 현안이 되었다. 각종 학교가 난립하였고, 게다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주입하였기에 홍콩영국 정부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1912년 개교한 홍콩대학은 특별히 한문과(漢文科)의 선택과목으로 ‘사서오경’과 중국의 전통경전을 두었다. 청나라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대학 운영 방침의 일환인데, 혁명을 찬양하는 강의는 허용되지 않았다. 남학생만 받다가 1919년 ‘54운동’의 영향으로 1921년부터 여학생도 받기 시작했다.  

 

1913년 홍콩영국 정부는 처음으로 ‘교육조례’를 발표하여, 모든 학교에 대한 감독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륙의 ‘54운동’ 영향으로 홍콩에서도 민족정서가 고양되기 시작했고, 홍콩영국 정부는 민족주의 확산 흐름에 우려하여 중국어 학교의 교사양성 즉 사범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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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4일, 중국 베이징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 조선의 3.1 운동(1919년)에 영향을 받았다. 

 

 

홍콩영국 정부는 유교 정신 선양 교육에 힘썼다

 

고전문학을 중시할 것인가, 현대문학을 중시할 것인가? 는 지금도 인문학 관련학과의 고민이다. 보수를 표방하는 국민당은 고전문학을, 진보를 대표하는 공산당은 현대문학을 중시했다. 당연하게도 청나라와 국민당은 공자를 위시해서 유교 경전을 금과옥조로 내세웠고, 청나라를 반대하는 혁명파와 공산당은 공자를 ‘사람을 잡아먹는’ 전통의 우두머리라고 찍어서 공격했다.  

 

교육만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분야도 드물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인간을 키워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인간을 만들어야 할까? 어느 것이 중요할까?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역사학자 임지현은 남한과 북한 모두 학교 교육에서 ‘충’과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했다고 보았다. 알다시피 ‘충’과 ‘효’는 체제와 질서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남북한 모두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을 했다는 말이다. 남북한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역대 정부는 물론 조선 등 동아시아부터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까지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까닭이다. 

 

전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는 청나라의 교육방침이기도 하지만, 홍콩영국 정부의 방침이기도 해서, 홍콩영국 정부는 청나라를 뒤엎자는 혁명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은 도미노 게임과 같아서 청나라에 혁명이 일어날 경우 당연히 홍콩도 그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시종일관 염려했던 점은 청나라 정부가 적절하게 유지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정부가 무너진다면 그 여파는 식민지 체제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너무 강성해서도 너무 약화되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권을 가져간 이후에는, 가급적 청나라의 체면을 세워주고 현실적인 요구를 들어주고자 했다.

 

1925년 홍콩영국 정부는 광동성과 홍콩의 대파업으로 조성된 반영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중국전통의 도덕윤리에 기초한 중국어 교육을 제창했다. 1926년에는 처음으로 중국어 공립학교를 세웠고, 1927년에는 홍콩대학에 중문과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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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홍콩

 

당시 홍콩영국 정부는 식민지 체제 안정을 위해 ‘충’과 ‘효’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 정신 선양에 힘을 쏟았다. 체제안정에 조금이라도 방해될만한 혁명가 손문(孫文)의 활동도 대문호 루쉰(魯迅)의 강연도 환영하지 않았다.  

 

1927년 루쉰은 홍콩 경찰의 감시 속에서 문무묘(사당) 뒤에 있는 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두 차례의 특강을 했다. 

 

그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담하게 말하고, 용감하게 행동하고”, “옛사람을 밀어젖히고”, “고문을 버리고 생존하라”고 요구했다. 두 번째 특강에서는 공맹지도(孔孟之道)를 핵심으로 하는 봉건 문화는 수명을 다했다고 하면서, 영국 침략자들이 봉건 문화를 고취하는 이유는 우리의 부패문화를 이용하여, 우리 이 부패민족을 통치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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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좌)과 루쉰(우)   

 

 

자유를 경험한 홍콩인, 새로운 교육환경과 만나다 

 

앞에서 나는 정체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이 시리즈의 목표도 ‘중국’과 ‘홍콩’의 갈등이 사실은 정체성의 충돌임을 말하는 데 있다. 나아가서 충돌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보는 데 있다. 내 고민은 학계가 이룩해놓은 기존의 정체성 연구를 새롭게 두뇌과학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와있다. 

 

여기에서 살짝 두뇌과학 이야기를 해보자. 보수와 진보라는 정체성은 두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서로 다른데, 두뇌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이유는? 우리의 두뇌구조와 그것의 작동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고하는 방식의 차이인데, 크게 나누면 어떤 사람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낭만적으로 사고한다. 

 

우리는 ‘저 사람은 정말 이해가 안 돼’,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때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두뇌는 다르다. 타고난 두뇌(문화적 유전자)와 성장(교육)환경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두뇌(유전자)도 환경의 지배를 받으니까 다음 세대의 두뇌를 생각한다면 환경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 환경을 두고 보수파는 보수적인 교육을, 진보파는 진보적인 교육을 해야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54년 홍콩에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아편전쟁부터 따지면 1백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홍콩에 영국식 교육이 정착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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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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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홍콩

 

홍콩의 공무원들을 접촉해보면 매우 우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홍콩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면 우수한 공무원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런 공무원을 영국식 교육제도가 배출했다고 본다.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교육제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홍콩의 주요 대학들은 여전히 아시아의 톱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교육에 관한 한 나는 영국의 경험을 사고 싶다. 영국은 1921년에 세계 최초의 대안학교인 섬머힐(Summer Hill)을 만들었다. 영국은 학생들이 노는 결정권 즉 자유가 있는 학교인 섬머힐이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무려 1백 년 전에 ‘학교’의 의미와 ‘교육’의 방법에 대해 새롭게 고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홍콩인들이 지금까지 영국의 통치에 대해 연연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71년에 공포된 홍콩의 교육법에 의하면 수업이나 관련 활동에는 정치적인 노래, 무용, 구호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법은 정치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더욱 추동했다. 

 

교육이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학문의 자유일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학문의 자유는 사회의 발전으로 피드백되었다. 홍콩인들의 두뇌(유전자)는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우리 세대가 받았던 ‘국가’와 ‘민족’ 교육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1989년까지 우리에게는 영화관에서 영화만을 볼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애국가가 흐르는 영상을 보아야 했고 기립해야 했다. 홍콩에 도착했을 때 가장 좋았던 점의 하나는, 영화관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걸어가는 도중에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국민 의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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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7년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될 즈음부터 ‘국가’와 ‘민족’은 홍콩인들의 두뇌를 향해 시시각각 ‘도발’해오기 시작했다. ‘국민교육센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즈음부터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뉴스에 앞서 ‘마음은 조국과 하나’라는 ‘국가홍보영상’을 보아야 한다. 

 

2021년부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안보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등 이제 그들의 두뇌는 완전히 다른 (교육)환경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두뇌(유전자)구조도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홍콩에서의 중국 민족주의 기원을 살펴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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