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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의 시작 

 

“진짜 괜찮은 코스가 있어. 길이 엄청 편안하고 좋아. 진짜 둘레길 같다니까. 너희들 이번에 다녀오면 나한테 완전 고맙다고 할걸?”

 

“정말?”

 

“아, 그렇다니까. 서울에서 보는 단풍이랑 달라. 절경이야, 절경. 힘도 하나도 안 들고.”

 

“... ... 가볼까?”

 

“가자,가자!”

 

영탄이의 말에 모두들 얼굴이 환해졌다.

 

“12월 되면 그땐 겨울이야. 말 나온 김에 11월 마지막 주말에 가자. 그래도 가을 끝자락이니까. 단풍도 끝물이 아직 남아있을 거야.”

 

“좋아, 나는 시간 괜찮아.”

 

“나도.”

 

“나도.”

 

“바로 기차표 예매해 놓자.”

 

“좋아, 좋아.”

 

그렇게 ‘민주산악회’의 4차 등반 계획이 얼떨결에 잡혔다.

 

장소는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D-데이는 11월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2. 50대, 친구의 의미와 위대한 도전  

 

민주산악회는 약 2년 전, 고등학교 동기 동창 몇몇이 모여 술 마시다 만든 사조직이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재수와 삼수를 거치고 각각 다른 학교에 진학하면서 몸이 멀어졌고, 소식도 뜸해졌다. 그러다 누군가가 초상이라도 당하면 그제서야 장례식장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또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으면 그제서야 결혼식장에 모여 술을 마셨다.

 

연말이면 동문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누군가는 일찍 자수성가해 큰돈을 벌었고, 누군가는 아버지로부터 큰 회사를 물려받았다. 변호사가 된 친구도 있고, 의사가 된 친구도 있다. 대기업에 들어가 해외 출장을 다니는 친구도 있고, 선생님이 된 친구도 있다. 어떤 친구는 보험상품을 들고 오기도 했고, 신림동 고시원에 틀어박혀 있다는 친구의 소식도 들렸다.

 

각자의 세상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모두들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이 새끼 저 새끼를 입에 달고 낄낄거렸다.

 

그런데 동문회라는 곳은 역시,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예언하셨던 것처럼,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내가 동문회와 멀어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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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브라질 상파울로 중간에서 만나는 요런 느낌이랄까 

<사진 출처:  Tuca Vieira>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 탐색전이 끝나면 곧이어 술자리의 단골 메뉴인 먹고사니즘 이야기로 본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여기가 동문회인지 100분 토론장인지 헷갈릴 만큼 정책과 정치 비판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고교 시절, 역사책 속에서 접한 부당함에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하던 열혈청년들은 이제 자신의 처지에 따라, 또 이익에 따라 지지하는 색깔과 성향이 확연히 갈라져 있었다. 심심치 않게 언쟁이 벌어졌고, 감정이 격해져 민망한 싸움도 일어났다. 화를 참지 못하는 친구들은 ‘다시는 네놈들을 보지 않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 뒤로는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나가지 않았다. 십 대 때 같은 학교를 다녔다고 모두가 평생 동안 친구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가끔 연락하며 일 년에 두어 번 만나 회포를 푸는 것으로 만족했다. 때로는 세 명이 모이기도 했고 네 명이 모이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다섯이 모이기도 했다.

 

동문회가 아닌 이곳에서도 먹고사는 이야기는 결국 정치 이야기로 번졌지만, 다행히 이 친구들은 생각도, 정치성향도 비슷한 덕에 쌈박질은 피할 수 있었다. 생각이 비슷하니 정치토론은 오히려 짧게 끝났고, 다른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게 됐다.

 

가을엔 소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았고 봄이면 꽃구경을 나가 맥주를 마셨다. 음악에 진심이었던 친구들은 새로 산 오디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아저씨들의 공통된 주 관심사는 가족과 자신의 건강이었고, 건강하고 혈기왕성했던 그 때로 이야기가 자주 흘러갔다.

 

고등학교 때 겪었던 수많은 사건 사고와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우리는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절 좋아했던 음악을, 영화를, 스포츠를, 우리는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그 열정을 품고 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쓰다듬어 주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고등학생이었던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난 듯 즐거웠다.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모여 술 마시는 것 좀 그만하고 뭔가 다른 일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근교의 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막걸리나 한 잔씩 하고 헤어지자는 의견이 제일 힘을 얻었다. 그저 두 다리만 있으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다들 가볍게 생각한 것 같다. 마침 나도 가벼운 하이킹에 빠져있던 때라 적극 찬성했다.

 

작년 가을, 처음으로 친구들과 관악산으로 등산을 다녀왔다. 쉽지 않았지만, 괜찮은 척했다. 올봄에는 북한산 족두리봉과 비봉에 다녀왔다. 나보다 체력이 조금 더 약한 친구들이 합류하는 바람에 얼결에 중간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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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모두가 함께 이뤄낸 위대한 도전이었다.

50대의 등산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북한산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예순이 되기 전에 히말라야에 다녀오자고 결의했다. 조금 더 자주 만나서 이 산, 저 산 부지런히 다니다 보면 체력도 길러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히말라야도 분명 가능할 거라고 했다. 솔깃했다. 즉석에서 회장과 총무를 뽑아 조직을 정비하고 이름을 ‘민주산악회’로 명명, 우리끼리 사조직을 출범시켜버렸다.

 

육중한 몸뚱이에 비루한 체력을 가진 난, 그저 헉헉대며 겨우겨우 따라가는 수준일 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목표를 꿈꾸며 활기찬 중년을 맞이하게 된 것 같아 가슴이 웅장해졌다.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꿈꾸는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는 나야말로 정녕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3. 나 따위도 할 수 있다 

 

코로나는 ‘민주산악회'의 활동에도 큰 제약을 주었다. 히말라야 등반 계획을 수립한 이후, 일 년 반이 지나도록 함께 등산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다. 원래 뜸했던 모임은 강화된 방역조치 덕에 더욱 뜸해졌다. 다들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마친 10월이 되어서야 한 번 모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너무너무 좋은데, 둘레길 수준이다’ 특히 ‘끝내주는 막걸리 집이 있는데 얼른 돌고 거기서 이른 저녁 먹고 올라오면 딱이다’라는 영탄이의 말에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 당일치기 내장산 단풍여행이 급조되었다.

 

내장산은 난생처음 가보는 곳이라 마음이 설레었다. 한동안 콧구멍에 바람을 넣어보지 못했던 탓인지 다들 진심으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2주 전부터 기차표를 왕복으로 끊고 기다렸다.

 

‘남쪽이라 따뜻하려나? 아니지, 겨울산이라 추울지도 몰라.’

 

‘신발은? 등산화를 신어야 하나?’

 

‘에이, 둘레길 수준이라잖아. 경량 트레킹화로도 충분할거야.’

 

‘아… 그러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지?’

 

‘가방엔 뭘 싸지?’

 

겨울산이라곤 중학교 2학년 때 태권도장에서 관악산 다녀온 경험이 전부였던 나는 생각이 미치는 모든 것이 염려스러웠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땀이 잘 마르는 기능성 셔츠를 제일 안에 입고, 그 위에 공기층을 확보해 줄 도톰한 옷을, 그리고 그 위에 바람이나 비를 막아줄 수 있는 고어텍스 점퍼를 입으라고 했다.

 

친구분들과 등산으로 건강을 관리하시겠다며 한동안 등산 장비 장만에 집중하셨던 아버지의 옷장을 뒤져 점퍼와 배낭을 챙겼다. 아내를 졸라 동네 마트에 가서 겨울 트레이닝복 바지와 퀵 드라이 셔츠를 샀다. 배낭 안에 여벌의 양말과 셔츠, 모자를 챙겨 넣었다. 땀이 나면 닦을 수건을 두 개 챙기고, 만일을 대비해 휴대폰 보조 배터리도 넣었다. 겨울산에서는 장갑이 필수라는 말에 3천 원짜리 코팅 목장갑도 샀다.

 

그래도 가방에 공간이 남길래 혹시 모를 추위를 대비하여 가벼운 점퍼를 하나 더 접어 넣었다. 친구들과 나눠먹을 에너지바도 여러 개 챙겨 넣었다.

 

있는데 안쓰는 것보다 없어서 못쓰는 것이 더 괴로울 것이라는 마음에 랜턴과 핫팩도 챙겨 넣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작년 봄 북한산에 갈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젠을 챙겨간 적이 있었다. ‘꽃 피는 봄에 그걸 도대체 왜 가져왔냐’ 고 영탄이에게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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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체감상 등반 난이도. 

세르파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사진 출처-링크>

 

짐을 싸느라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데 아내가 나를 보고 말했다. 걷는 뽄새를 보니 발이 돌아갔는데, 어디 아픈 거 아니냐는 거였다. 발꿈치가 살짝 뻐근했지만, 괜찮다고(자고나면 괜찮을 거라고) 얼버무렸다. 예리한 것. 나는 통풍 발작이 오기 전에 족저근막염과 비슷한 전조증상이 먼저 온다. 그러면 걸음을 걷기가 불편해서 아픈 발이 바깥쪽으로 돌아간다. 그것을 아내가 포착한 것이다.

 

나도 살짝 걱정됐지만 자고 나면 진짜로 괜찮아질 거라고, 괜찮아져야 한다고 빌었다. 어제 H가 일이 생겨서 못 간다고 하는 바람에 멤버가 세 명으로 줄게 되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만일 나까지 빠진다고 하면 영탄이와 L, 둘이만 가게 될 텐데, 그렇게 하긴 많이 미안했다. 어쩌면 다들 실망한 나머지 모임 자체가 폭파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 그리고 친구들과의 모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둘레길 수준으로 쉽고 부드러운 길’이라고 했으니 조심조심 다녀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며 늦가을의 단풍을 구경하고, 친구들과 함께 힐링하자고 했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그 ‘어마어마한 맛집’에서 시원한 막걸리와 남도의 진미를 마음껏 즐기고 돌아오자고 했다.

 

“야, 우리 회사에 정읍 출신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그러더라. 도대체 서울 사람들은 왜 맛집이라고 줄 서서 먹는지 모르겠다고. 전라도는 아무 데나 대충 들어가도 다 맛있대.”

 

그날, L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다. 내장산의 붉은 단풍. 그리고 남도의 식도락. 이번 여행의 목표는 분명했다. 무리만 하지 않으면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4. 무언가 잘못됐다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8시 20분에 출발하는 KTX를 타려면 8시엔 용산역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하러는 느지막이 다녀도 놀러는 부지런히 다니는 것이 국룰 아니던가.

 

정읍역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햇살은 화창했고, 남도의 바람은 일 년 반만의 우리 산행을 반겨주는 듯 포근했다. 처음 본 정읍 시내의 첫인상은 밝고 단정했다. 도시는 언덕이 없이 편평했고 건물들이 높지 않아 더욱 넓고 밝아 보였다.

 

시내를 빠져나가니 곧바로 숲길. 도로 좌우로 내장산 국립공원 주차장이라는 푯말이 서있는 큼직한 주차장을 서너개나 지났다. 그런데 이미 가을의 절정이 한참을 지나버린 듯 기대했던 새빨간 단풍은 보이지 않았고, 그 커다란 주차장은 주말이 무색하게 한산했다.

 

“길이 좋으니 여기서 내려서 걸어서 들어가자.”

 

우리는 내장산 국립공원 제3주차장 앞에서 택시를 내려 국립공원탐방 안내소 쪽으로 걸어들어가기로 했다. 공기는 말할 수 없이 맑고 상쾌했다.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기분 좋게 쓰다듬었다. 이슬이 내린 바닥은 살짝 젖어있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서걱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었다. 저 멀리 산속엔 케이블카가 줄을 따라 달려나가고 있었다.

 

“와, 케이블카도 있네. 우리도 케이블카 탈까?”

 

“하하하, 무슨.”

 

싫다는 말이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좀 걸어야지.”

 

한참을 걸어 국립공원 내장산 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내장산 탐방안내소 앞에 게시되어 있는 등산로 안내도다.

 

‘우리가 어디에 있나…’

 

나는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가 찾고 있었다.

 

“이렇게 한 두시간 쯤 올라갔다가 네 시간쯤 내려오면 시간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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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영탄이와 L이 등산로 안내 표지판에 대고 손가락을 휘휘 저으면서 코스를 짜고 있었다.

 

‘두 시간을 올라갔다가 네 시간을 내려온다고?’

 

둘레길이라더니 이게 무슨 소린가. 설령, 백 번 양보해서 등산을 한다고 해도 두 시간을 올라가면 두 시간만 내려오는 게 정상 아닌가?

 

“저기요, 잠깐만.”

 

당황한 나머지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택시 내리고 나서 벌써 4킬로나 걸어왔어.”

 

“이제 여기가 정문이야. 얼마나 걸었다고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둘레길 간다며?”

 

“애휴, 저기 700미터 밖에 안돼. 그것도 안 걸으려고?”

 

영탄이가 말했다.

 

‘700미터? 얼마 안되는 건가?’

 

이게 높은 건지 아닌지 감이 안왔다. 천 미터도 안 되니 그리 높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등산 한 번 하지 뭐. 그리 높은 것도 아닌가 본데…’

 

포기도 빠르고 눈치도 빠른 나는 태세 전환도 역시 빠르다.

 

“그래서, 어떻게 간다고?”

 

코스가 궁금해서 물었다.

 

“저 위에 까치봉 보이지? 거기로 갔다가 내려올 거야.”

 

“까치봉?”

 

표지판을 찾아보니 내장산의 정상은 신선봉(神仙峰)으로 높이가 763.2m. 그리고 우리가 가려는 까치봉은 713m였다. 저 정도는 가볼만하겠다 싶었다.

 

“그래, 알겠어. 가자.”

 

“점퍼 벗어서 가방 정리하고, 가볍게 올라가자.”

 

산행에 익숙한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점퍼를 벗어 배낭에 매달고 얇은 티셔츠 차림으로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난 혹시나 춥지는 않을까 경량 패딩 조끼는 벗지 않았다가 그것은 괜한 기우일뿐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올라가는 길은 긴팔 티셔츠만 입고서도 땀이 났다.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가는데 뭔가 그동안 했던 등산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 등산로가 처음에는 완만하다가 점점 가팔라지고, 또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면 평지도 나오고 내리막길도 나오고 그러지 않던가?

 

까치봉 가는 길은 달랐다. 시작부터 쉬지 않고 몰아쳤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리막은커녕 평지도 나올 생각이 없었다. 오르막 다음엔 더 가파른 오르막이 나올 뿐이었다. 배낭을 멘 등은 이미 축축하게 땀이 배었고,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혹여 가을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까 했던 염려 따위는 사치일 뿐이었다. 챙겨 쓴 모자는 벗어서 손에든지 오래. 수건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훔쳤다. 수건이 얼마나 축축했는지 나중에는 수건으로 땀을 닦는 건지, 얼굴에 땀을 바르는 건지 구별이 안될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