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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카프의 위상

  

스치듯 지나가다 TV에서 시카프(SICAF,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란 말이 흘러나왔다. 내게 시카프란 아련한 옛 추억이다. 그런데 2004년이란 연도까지 박혔다. 아련한 옛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애니메이션 축제지만,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3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발'

 

이란 타이틀을 걸고 제법 어깨 힘을 주며 거들먹거렸던 게 시카프다. 2004년이면 이명박 서울시장이 명예조직위원장으로 한참 위세를 떨치던 때이기도 하다(당시 조직위원장은 서울문화사 심상기 대표였다. 당시 서울문화사가 발간하던 잡지에 한 다리 걸쳐서 기억난다).

 

SICAF2004 공식한글 포스터.jpg

 

지금이야 퇴락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같은 곳에서 행사를 개최했지만(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폄훼할 의도는 없다. 행사의 규모가 축소된 게 안타깝다), 당시만 해도 코엑스 태평양관에서 행사를 치렀다. 

 

드넓은 태평양관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으로 행사를 치른다는 건 심장이 요동치는 일이었다. 당시 나도 시카프에 참가했다. 시카프 조직위에서 직접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펜더야, 부스 20개 채워줘”

 

라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만화 관련 일도 해왔기에 시카프의 위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당시 조직위에서 내놓은 금액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당시엔 시카프란 이름 하나가 뿜어내는 그 ‘영롱함’에 취해 나는 무작정 시카프에 달려들었다. 

 

SICAF 공식 캐릭터 망토를 걸친 이명박.jpg

SICAF 공식 캐릭터 망토를 걸친 가카. 

이렇게 오랜만에 가카를 뵙는다.

(출처-<씨지랜드>)

 

2. 김명신(김건희)은 없다

  

나는 ‘밀리터리 대전’이란 타이틀을 달고 국내외 밀리터리 만화를 기반으로 한 전시를 했다. 오시이 마모루의 <인랑> 시리즈부터 시작해 <패트레이버>, <에어리어 88>까지 밀리터리 관련 만화를 배경으로 한 전시를 했다(당시 기억에 남는 게 앞 부스가 김수정 화백의 부스였었는데, 전시 막바지, 김수정 화백이 우리 부스로 와 신기하단 듯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우리와 같이 사진을 찍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시카프는 위상이 달랐다. 상명대나 청강대 학생들이 대학생 부스를 열고는 자기 작품을 선전했고, 만화나 애니메이션 관련 직종을 꿈꾸던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부스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 당시 여고생 몇 명이 내게 찾아와 전시가 끝난 뒤 밀리터리 대전 부스의 전시물을 랜탈할 수 있는지 문의했던 게 기억도 선명하다. 

 

장황하게 2004년도의 기억을 말하는 건 김건희(당시엔 김명신이다. 편의를 위해 이 원고에선 대부분 김건희로 적고 있다) 씨와는 다르게 나는 2004년도에 시카프에 참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김건희 씨와 다르게 내 이름은 2004년 제 8회 시카프에 실려 있다. ‘이성주’란 이름이 2004년 시카프 도록에 분명히 박혀 있고, 활동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중요한 건 김건희 씨가 2004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아, 진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이 당시 전시를 하는 짬짬이 영화제 쪽을 돌아다녔는데, 내 기억 속에 김건희는 없다. 여담이지만 남는 이름은 단 하나다.

 

‘정민영’ 

 

당시 젊은 애니메이션 감독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던 게 정민영 감독이었다. <길>이란 작품을 출품했는데(시카프 오기 전에 이미 도쿄 국제아니메페어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를 한 바퀴 돈 작품이었다), 상당히 신선했다. 철도 건널목을 지키는 철도 역무원의 이야기인데, 그 표현양식에 새로웠다(인형 애니메이션이라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을 거다). 기사를 쓰기 위해 검색해 보니 당시 정민영 감독은 단편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고 한다. 

 

헌데 대상을 받았다는데 기억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김건희(다시 말하지만 당시엔 김명신이다. 편의를 위해 김건희로 쓰고 있다)’란 이름은 없다. 당시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 외고를 쓰고 있었기에 업계 동향이나 뉴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까놓고 말해 대상을 받을 정도라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다. 부스를 20개 운영하며 업계 사람들과 온갖 걸출한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단 한 번도 김건희란 이름이 우리 사이에 거론된 적이 없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어떤 발자국을 남겼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 3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발!”

 

이라며 앙굴렘과 거의 맞먹는다며 어깨에 뽕을 채워 넣던 게 그 시절 시카프였다. 그런데 김건희가 대상을 받았다고? 

 

3. 크로스 체크 

뭔가 좀 아련하고 이상한 느낌이다. 나름의 열정을 바쳤던 시카프가 이렇게 뉴스에 나오니 말이다. 술김에 당시 시카프 조직위에서(2004년 제8회 조직위에서 활동했었다) 전시 기획을 맡았던 선배에게 전화했다.

 

“형! 뉴스 봤어?”

 

“안 그래도 친구나 지인 중에 연락 올 줄 알았다”

 

“김명신 알았어?”

 

“아니잖아. 아닌 사람을 어떻게 아냐? 대상을 받았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지.

 

“그래도 뭐 비빌 구석이라도 있으니 시카프를 판 거 아닐까”

 

“영화제 쪽 담당했던 애라면 이름이라도 들어봤을래나? 난 기억에 없는데... 그런데, 업계 사람은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봐도 경력 자체가 아니잖아”

 

“......구라란 소리네.”

 

“그렇지?”

 

“그래도 당시에 시카프가 경력을 팔 정도로 먹어줬다는 소리네.”

 

“그렇지. 지금이야 이렇지만... 당시에는 거짓말해서라도 경력에 올려놓을 정도였다는 소리가 되는 거지.”

 

당시 나 외에 시카프에 참여했던 지인과 관계자들에게 물어도 최종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김건희 씨가 경력을 조작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게 당시의 시카프였다는 정도가 유일하게 위안을 받을 일이랄까.  

 

2004 SICAF 애니메이션 수상작.jpg

2004 SICAF 수상작

(출처-<SICAF 공식 홈페이지)

 

김건희 씨 덕에 17년 전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녀에겐 출세를 위해 가볍게 이용하는 허위기록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시카프는 누군가에게 피와 땀을 바친 소중한 시간이다. 동시에 부스를 20개 운영했던 나 역시 그렇다. 적어도 그들의 노력을 더럽히진 말자.  

 

당시 시카프에 참가하며 날밤깠던 동료, 지인 관계자들은 연락 한 번 해줬으면 좋겠다. 사람이 또 이렇게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