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신변에 관한 이야기로 대신한다. 최근, 7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관두었다.
미국에서는 2021년, "대사직의 시대 (Great Resignation)"가 도래했다. 미국 노동청 발표에 따르면, 올 4월 사직한 직장인의 수는 역대 최다를 달성했다. 이 수치는 올 하반기에 여러 차례 갱신될 정도로 직장에 사표를 내는 직장인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사직의 시대"보다는 "대이직의 시대"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사직이라는 말에는 "관두다"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두드러진다.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역대 최저수준이다. 이는 직장을 관둔 직장인 중 많은 수가 곧바로 재취업한 것을 의미한다. 현재 커리어를 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이직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대이직의 시대"가 더 유효한 표현이다(물론 "대사직"의 일부에는 펜데믹 상황을 계기로 조기은퇴를 선택한 미국의 자발적 실업자들도 꽤 포함된다. 그들은 이직을 선택하지 않지만, 필자와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더 적합한 표현을 쓰고자 한다).
이번 글은 대이직의 시대에 동참했던 한 직장인의 수기다. 원래 같으면 개인 신상이 드러날 정보 (단체명, 연봉, 직급 등)을 제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급된 조직이나 업계에 속한 누군가는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으로 이미 실명, 경력 다 까발려졌다, 회사를 관둔 마당에 그딴 게 뭔 상관이냐"는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많은 디테일들을 남겨두었다. 내가 했던 고민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들이니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길 바란다.
1. 직장 사춘기
개인의 자아란 비대하다. 내 머릿속에 나는 좋은 인간이고, 능력 있는 인간이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좁밥이고, 치사하다. 내가 생각하는 자신, 혹은 되고 싶은 나와, 직장 속의 나의 실제 모습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이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는 상태, 이를 직장생활 사춘기라고 하자.
내게 처음 이 직장생활 사춘기가 찾아왔던 건, 매니저로 승진했을 때(5년 차)이다. 내가 속했던 회계법인의 직급은, 파트너 - 디렉터 - 매니저 -시니어 - 어쏘 - 애널리스트였다. 군대와 비교하면, 파트너는 "별" 장군에 해당하고, 디렉터는 "대령", 매니저는 "대위"쯤에 해당할 것 같다.
매니저가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는 파트너가 될 수 없으리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매니저까지는 업무능력만으로 승진이 결정됐다(동기 중에 승진이 가장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매니저 이후 승진에는 영업 성과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기업은 성장에 목을 맨다. 이런 기업에 더 많은 일감과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영업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실무능력에서 영업 쪽으로 바뀐다. 매니저가 되고 나서 많은 영업 미팅에 다녔다. 그러면서 영업에 별 재능이 없다는 것과 주요 고객들은 이미 재능 있는 디렉터(대령)들이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인 내가 그들을 갑자기 밀어내고, 새로운 일감을 왕창 따와 파트너를 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장군이 될 수 없는 군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 속에서 나는 겉돌기 시작했다. 나는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해가 지나갈수록 내가 맡은 업무의 양은 늘어났다. 맡은 실무의 양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내가 출셋길에서 멀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러한 생각은 애초부터 좀 잘못된 생각이다. 원래 대다수 군인은 별이 되지 못한다는 게 첫 번째 잘못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이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두 번째 잘못은 별들에게도 당연히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군대에도 2성 장군, 3성 장군이 있듯 파트너들에게도 당연히 상사는 존재한다. 모든 샐러리맨은 언젠가 한계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 이상으로 각자 맡은 직책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남은 30년(?)의 직장생활을 이대로 매니저 혹은 디렉터로 일하며 은퇴하기엔 너무 긴 시간 같았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돌파구가 필요해 보였다.
2. 불행은 인간을 강하게 한다
고민을 하는 사이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둘째가 태어났다. 동시에 출판일도 떠맡게 되었다. 인생이 바빠지니까, 머릿속으로 혼자 미래를 고민하는 시간은 줄었다. 커리어 따위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지난 2년이 지나갔다.
본격적으로 돌파구를 찾기 위한 시동이 걸렸던 것은 악연으로부터다. 올여름 나는 미국의 모 공기업과 이직면접을 보았다. 직급은 똑같은 매니저. 연봉이 크게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직을 고려했던 건, 보다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고만고만한 커리어를 이어갈 것이라면, 워라벨이 좋은 공기업에서 일하는 편이 나아보였다. 무엇보다도 공기업에 가면 영업에 대한 걱정 없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일해도 되지 않겠냔 생각이 들었다.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1, 2차 면접이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연봉 얘기도 나왔다. 예산문제로 연봉이 다소 낮게 책정되어 있어 미안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애초에 연봉 상승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나는 괜찮다고 얘기했다. 덕분에 이직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마지막 3차 면접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면접에는 임원 한 명과 매니저 한 명이 자리했는데, 그중 매니저가 자꾸 시비를 걸었다. 투자은행이나 펀드 쪽과 면접을 보다 보면, 대응을 보기 위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아이큐 테스트용)을 던지거나 압박하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지원자 개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언성을 높여 화를 내는 예는 없었다. 대응을 보자는 거지, 면접자에게 꼽을 주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경력직 면접에서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런데 공기업 면접에 나왔던 매니저는
"너는 이런이런 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같은데 왜 지원했냐",
"너 같은 애가 지원할 자리가 아니다",
"나중에 신입 포지션이 열리면 지원이나 해봐라"
라는 식으로 쉴 새 없이 불만을 쏟아부었다. 발언하면서 감정이 격해졌는지, 나중에 가서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건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거였다.
같이 동석했던 임원은 매니저의 발언에 당황해하면서, 매니저를 계속해서 제지하고(그 와중에도 매니저는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준비해온 면접 질문을 읽어 내려갔다. 한 명은 계속해서 시비를 걸고, 다른 한명은 누가 봐도 관행적인 질문을 이어가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졌다.
아직도 그 매니저가 왜 그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를 대했는지 모르겠다. 도저히 구직자인 내가(게다가 임원도 동석했는데) 상대방을 자극할 발언을 먼저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경력에 문제가 있었다면, 서류에서 걸렀으면 될 문제였고, 능력이 의심스러웠다면 테크니컬 인터뷰를 했으면 될 문제였다. 내가 정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냥 안 뽑으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인 반응이었다.
인터뷰를 망치고 그 사람 신상을 털어보았다. 놀라운 이력들을 발견했다. 나에게 꼽을 줬던 매니저는 MIT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월가의 유명 투자은행에서 트레이딩을 했다. 한때 진짜 잘나갔던 아재였던 것이다. 그러다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 도중 해고되었고, 이후 옮긴 회사 역시 금융위기 당시 없어졌다. 당시에는 이미 40대 중반이었던 데다가 영어도 매우 억양이 심했기 때문에 수년간 재취직에 실패했다. 몇 년 뒤에는 월가 트레이딩 경력을 살려 투자 자문회사를 창업했는데, 대차게 말아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또 몇 년 노시다가 몇 달 전에 공기업에 매니저로 재취직을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관심법이다. 그 아재는 20살쯤 어린 똑같은 동양인인 내가 본인과 같은 직급에 지원했다는 게 불쾌했던 것은 아닐까. 그 아재의 잘나가던 커리어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절단났던 것은, 그 아재 탓은 아닐 것이다(이후 10년 동안 제대로 된 직장에 재취업을 못 했던 것은 본인 탓이 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이 불행을 겪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막대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불행을 겪고 나서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것이다. 나에겐 빌런이지만, 그 아재는 어쨌든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녀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본인 커리어의 정점을 찍어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나도 더 늙기 전에 뭐라도 내세울 만한 경력을 쌓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불행이 닥쳐도 버티지.
두 번째 생각은 두려움이다. 지금처럼 승진을 못 해서 불행한 현실이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 그 아재처럼 흑화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콤플렉스를 토해내는 빌런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이러니하게도, 워라벨을 추구하려고 지원했던 공기업 면접에서 커리어를 개선하기 위한 동기(Drive)를 얻었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와 같은 불안, 그리고 '저렇게 살진 말아야지'와 같은 두려움.
이를 추진력 삼아 나는 본격적인 커리어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계속>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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