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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끝냈어야 하는 연재다. 그런데 9월부터 월화수목금금금 일했다. 10월에는 팀을 옮겨 한동안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점심 휴식 시간도 없이 일했다. 11월 들어서 그나마 일요일에는 쉴 수 있게 되었는데 10월 말 발생한 대참사와 그 사후 과정을 보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내가 사는 나라의 작금이 호러인데, 십수 년 전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호러를 쓰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간에 시작한 이야기는 끝내야 하니 마음을 누르며 써 보고자 한다. 

 

1. 싱할라 vs 타밀, 스리랑카 내전의 이유

 

스리랑카가 처음부터 끝까지 막장으로만 달렸던 것은 아니다. 완전한 독립을 하기 전, 실론 자치령의 4대 총리로 당선된 반다라나이케(Solomon West Ridgeway Dias Bandaranaike, 1899.1.9~1959.9.26)는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하고자 싱할라어를 국어(유일한 공용어)로, 불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그러자 북부 타밀지역에서 불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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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웨스트 위지웨이 반다라나이케

(Solomon West Ridgeway Dias Bandaranaike, 1899.1.9~1959.9.26)

스리랑카 국제공항 이름은 이분을 기려 지었다. 

 

반다라나이케는 타밀 지도자들과 민족 사이 갈등을 봉합하고자 몇 차례 회의를 한다. 그러고 나서 연방제가 해결의 한 방법이 되지 않겠느냐고 국민들에게 제안한다. 이 제안에 열받은 한 승려가 '더 큰 국가적 대의와 인종과 종교'를 위해 반다라나이케를 암살한다. 이 사건은 스리랑카 정치인들에게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각인케 하는 계기가 된다. 

 

'소수 민족과의 화합을 시도하면 죽는다'

 

반다라나이케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 Ratwatte Dias Bandaranaike, 1916.4.17~2000.10.10)가 세계 최초로 여성 국가 지도자 자리(총리)에 오른다. 남편처럼 사회주의 정책들을 이어 나가는 동시에 남편과는 달리 스리랑카에 남아 인도 국적을 택했던 타밀족들을 추방해버린다. 

 

그녀는 1972년 5월 20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표하며 스리랑카 공화국을 선포한다. 바로 이때 본격적인 민족분쟁의 씨앗을 그녀가 법으로 만든다. 타밀족들의 대학 진학을 제한하는 것과 싱할라어를 국어로, 불교를 국교로 확정하는 게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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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이 법에 불만을 품은 한 공무원이 갓 조직된 타밀 반군에 합류한다. 그는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이다(Velupillai Prabhakaran, 1954.11.26~2009.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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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도 고만고만했던 타밀반군들은 그가 재조직한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LTTE)하에 모두 집결한다. 2009년, 그가 교전 중 전사할 때까지 LTTE는 전 세계 정보기관들의 추적을 받은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테러 조직이었다.

 

자살폭탄테러라고 하면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같이 정신 나간 것들만 하는 거로 생각할 터인데, 원조는 LTTE이다. 인도 라지브 간디 총리부터, 이들의 자살폭탄테러와 군사작전 등으로 목숨을 잃은 인도 대륙 내 정치인들의 명단은 대단히 길다. 스리랑카 정부군이 속수무책으로 자살폭탄테러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들이 폭탄을 자기 몸에 두르고 스스로 폭파 스위치를 눌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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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타밀 소녀들

 

LTTE의 자살폭탄테러로 스리랑카 고위직이 사망하면 극렬 싱할라 민족주의자들과 스리랑카 군인들이 타밀족들을 학살하고 강간했다. 그 참상을 겪은 타밀 소녀들은 자진해서 LTTE의 전사가 되어 자살폭탄테러에 참여했다. 싱할라족과 타밀족은 함께 나선형 악순환을 이뤘다.

 

이 참상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타밀족들의 시각으로 전파됐다. 전편에 썼듯이 2022년 현재, 스리랑카 전체 인구는 2,300만이나, 전 세계에 흩어져서 사는 타밀족들은 7,500만이 넘는다. 타밀족들 상당수는 말레이시아·싱가폴·영국에 산다. 외국에 사는 타밀족들이 많다 보니 이들 시각으로 개별 사건 보도가 나갔다. 더불어 죄 없는 동족의 죽음에 분노한 전 세계 타밀족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했다.

 

2. 게다가 쓰나미

 

전 세계가 아기 예수님 오신 날을 기념해 흥청망청했던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현지 시각으로 07시경,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해저에 리히터 규모 9.7 지진이 발생한다. 내가 경험했던 지진 규모가 리히터 규모 7.9였다. 7.9로 1만 명이 죽었는데 9.7이면 어땠을까? 진앙(震央) 바로 옆인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에서만 15만 명이 죽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소말리아까지 피해가 미쳐 선박 피해만 117척, 2,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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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스리랑카에서는? 공식 집계된 사망자만 3만 5천 명이다. LTTE가 실효 지배하는 북동부 쪽에는 전 세계에서 스리랑카로 보낸 구호물자가 거의 도달하지 않았다. 스리랑카 정부가 LTTE의 명줄을 늘릴 거라고 반대하여 극히 일부만 전달될 수 있었다. 자연재해에 이런 정치적 결정까지 더해지며 사태는 심각해졌다.

 

지진과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뒤 불과 1주일 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미국 국무부 대변인 입에서 흘러나온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남아시아에 영아 유괴가 급증하고 있다는 경고였다(관련 기사 : South Asia: U.S. "horrified" at child trafficking in tsunami aftermath).

 

그리고 몇 달 뒤부터 타밀족들의 네트워크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젊은 타밀 여성들이 자기 생명을 내놓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쓰나미로 삶의 터전이 박살 났는데도 스리랑카 정부가 복구는 고사하고, 국제단체의 구호 활동조차 금지하는 바람에 타밀 반군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스리랑카 북동부 지방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장기를 내다 팔아 가족의 생계비를 번다는 이야기였다.

 

재난 직후에 부실할 수밖에 없는 영양상태를 고려하면 간을 조금 떼어내도 생존을 담보할 수 없었을 터이다. 몸에서 떼어내면 살 방법이 없는 장기들까지 마구잡이로 나오고 있다고 했다. 3년 뒤 호주의 The Age는 이게 쓰나미 피해를 보았던 인도 대륙 남단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고 확인하는 기사를 내보낸다(관련 기사 : Organ brokers target tsunami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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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섬 위치

출처-<구글맵>

 

3. 스리랑카 정부의 문제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내용이니 앞선 글에서 썼던 내용을 상기하고자 한다.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은 스리랑카 인구의 74.9%를 차지한다. 타밀족이 11.2%, 무어족이 9.2%, 인도계 타밀족이 4.2% 정도를 차지한다(CIA world factbook). 흔히들 영국 식민지 시절에 싱할라족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아 영국이 타밀족들을 대거 스리랑카로 수입(!)하는 바람에 민족분쟁이 발생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수천 년 동안 타밀족들과 싱할라족들은 그 좁은 섬에서 부대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았다. 참고로 타밀족들은 인도 대륙 남부 지역에 살던 이들이고 싱할라족은 북인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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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시의 불치사. 부처님의 치아(齒牙) 진신사리가 있다는 이곳은 싱할라족의 성지다. 부처님은 지금의 남부 네팔에서 태어나서 인도의 비하르주와 우타 프라데쉬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싱할라는 문화로 보나 인종으로 보나 북인도 아리안족 출신이다.

 

전술하였듯이 스리랑카(남한의 65% 정도 크기)에서 타밀족들은 '소수민족'이지만 전 세계적으론 7천 5백만 명에 달한다. 언어는 물론 확연하게 분리되는 문화를 지니고 사는 타밀족들이 말레이시아·싱가포르·홍콩·영국 등에 터전을 닦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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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일보>

 

전 세계에 타밀족들이 많이 산다는 사실로 싱할라족에게는 집단 피해 의식이 생겼다. 싱할라와 타밀이 뭔가 말이 안 되는 짓을 똑같이 하면 싱할라족보다 타밀족에게 더욱 우호적인 국제 기사들이 만들어져 왔다고 믿는다. 심지어 젊은 여성들을 자살폭탄 배달부 겸 뇌관으로 썼던 LTTE(타밀일람 해방 호랑이)에 대한 세계 언론의 비판보다, 테러당했다고 민간인 마을을 불 지른 싱할라에 비판적인 세계 언론 기사들이 더 많았다고, 싱할라족들은 생각한다. 자기들이 다수고 핍박받던 타밀이 소수라는 것은 그 순간엔 편리하게들 잊는다.

 

쓰나미 때도 마찬가지였다. 쓰나미가 닥쳤던 즈음에 남인도 대륙의 빈민가 가정 상당수가 하루에 한 사람당 미화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5인 가족 연간 생활비가 2천 달러가 안 됐다. 그 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장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 위 기사들은 대부분 쓰나미 직후 자기 장기를 내놓았던 장녀들이 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있었다고 지적한다. 왜 장녀냐고? 아들은 대를 이어야 하고, 큰딸은 지참금을 내놓아야 결혼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싱할라들은

 

'타밀에 우호적인 서방 언론들이 타밀족만 불우하게 살았던 것처럼 보도했다'

 

고 공공연하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역시 그 과정에서 정부는 LTTE가 실효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는 구호물자도 보내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은 참 편리하게들 잊는다. 이런 스리랑카 내부 상황은 모처럼 찾아온 경제 발전 기회조차 놓치게 만든다.

 

4.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의 운명을 갈랐던 2005년 섬유쿼터 철폐

 

2005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약 40여 년간 미국과 EU 등 선진국에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자 시행하던 섬유 수입 쿼터제를 철폐한다. 당시에 섬유 제품들이 스라랑카 수출 품목 가장 앞단에 있었다. 

 

2005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섬유 쿼터가 없어졌을 때, 대부분 경제 연구소들에선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의 섬유산업이 흥하리라 예측했다. 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2005년에 내놓았던 '섬유쿼터 철폐 이후 세계 섬유, 의류 무역의 변화' 보고서에서도 최대 수혜국으로 스리랑카를 꼽았었다. 그런데 이때 방글라데시는 기회를 살렸으나 오히려 스리랑카는 내부 요인으로 기회를 놓치고 만다.

 

밑에 사진에 나온 사람은 캔디시 옆 작은 도시인 Gampola의 시장이었다. 2012년에. 이분 뒤로 수평으로 지나가고 있는 무엇인가가 보일 게다. 저기, 섬유공장이었던 곳이다. 스리랑카 중부에는 이렇게 폐허가 된 공장 터가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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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다. 2004년 12월 31일까진 스리랑카에 배정되었던 물량이 있었으니 납기일이 좀 오락가락해도 거기서 생산된 물량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선진국의 의류 업체들이었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SPA 브랜드들이 히트하기 시작했었다. 주문 들어가면 제품들이 빨리 생산되어 서구의 옷 가게에 나와야 했다.

 

그런 판에 심심하면 폭탄 터져서 수출 과정에서 애로가 꽃 피는 나라와 거래할 것인가? 아니면 현지 출장 갔을 때 술 마시기 갑갑하고 돼지고기 먹으면 안 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꾸역꾸역 생산물량과 시점을 맞추는 나라와 거래할 것인가?

 

당시 라자팍사 스리랑카 정부는 쓰나미가 와도 LTTE부터 때려잡았다. 이에 따라 2005년 7월부터 다시 폭탄테러가 터졌던 것과 항복한 LTTE와 타밀 난민들에게 가해졌던 끔찍한 폭력을 생각하면 스리랑카에 있는 섬유공장과 거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럼에도 스리랑카의 싱할라 민족주의 언론은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타밀 테러리스트들을 때려잡을, 자신들의 자주적 권리'를 서방이 훼방 놓고 있다고 선동하기 바빴다.

 

국이 서방 뺨치게 탐욕스럽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중국이 인프라 건설을 해주는 과정에서 나사 하나조차 스리랑카인이 인프라 건설 과정에 참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리랑카가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리랑카는 서방이 자신들을 핍박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돈 나올 일도 없다고 여겼다. 반면에 '인권같이 거추장스러운 이야기는 안 한다'는 중국이 한쪽에서 돈을 흔들고 있었다.

 

중국이 사기 쳐서 스리랑카 국가부도가 난 게 아니다. 국가 부도는 나라 안에서부터 비롯하였다. 이런 싱할라족과 타밀족과의 오랜 역사를 모르면 단편적인 국제뉴스에 속기 쉬운 법이다. 

 

... 스리랑카 이야기를 하는데 꼭 남 얘기 같지만은 않은 요즘이다. 

 

국제부 마실 나갔던 형틀목수 Samuel S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