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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영남에서 영재로 소문났던 김령(1577~1641)이란 MZ 선비가 있었습니다. 현직 관리조차도 대필을 부탁했을 정도의 실력자였던 그였지만, 당시 불공정했던 과거 시험으로 인해 14번이나 도전, 끝내 과거 합격이란 영광을 얻어냅니다.

 

그런데 그토록 원하던 과거 합격을 하고서도, 김령은 걱정만이 앞섰습니다. 악명 높은 신임 관리 신고식 때문이었습니다. 김령은 임용을 1년 넘게 미루기도 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까지 오자 어쩔 수 없이 첫 출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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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각종 신고식은 고통스러웠고, 이후 선배들의 후임 길들이기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 김령의 일기엔 우울만이 넘치며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리하여 김령은 사직서를 낼 기회만을 엿봤고, 때가 왔다고 판단했을 때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사직서를 아무리 내도 인사과에서 수리하지 않았고, 상사에게 사직하겠다고 찾아가도 오히려 더 큰 업무를 받아왔습니다. 그렇게 사직서를 갖고 밀당하다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그는 승문원에서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으로 옮겨갑니다.

 

 

 

지난 기사

 

1. 과거 시험장부터가 지옥이다

 
 
임진왜란 이후 과거 시험이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선배 관료는 후임 관료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부터 보시길 추천!

 

 

 

 

 

만성피로, 각종 질병, 인간관계 스트레스에 시달린 직장인 김령

 

1616년 3월 12일~21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12일 : 사직서를 아무리 내려고 해도 윗선에서 족족 막아버리더니, 이제는 사직서를 내지도 못하게 한다. 심란하기 짝이 없다. 한편 다가오는 14·15일에 연회를 열기로 했는데, 내가 부모님 기일이라 상복을 입고 있어 연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러 승지가,

 

“이 모임은 단순한 연회가 아니라, 승지들이 모여서 회의를 겸하는 자리일세. 자네의 사적인 일로 나랏일을 회피하겠다니, 가당치도 않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반드시 자리에 나오게!”

 

라면서 나를 혼냈다. 아, 정말 정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더니 아침부터 직원을 보내 빨리 출근하라고 성화까지 부렸다.

 

15일 : 매일 같이 직원을 보내 참석을 강요받았다. 나는 정말로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연회 자리에서 기녀들은 춤추고 음악은 높이 울렸지만, 나는 상복을 입었으므로 여흥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내게 벌주를 수없이 주었다.

 

21일 : 나는 오늘 병가를 올리고 곧바로 사직서도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우부승지가 나보다 먼저 병가와 사직서를 올려버렸으니, 이번에도 사직서를 낼 시기를 놓쳐버렸다. 우부승지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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젭...알...

 

김령이 어린 시절부터 재주가 있던 것도, 실력으로 대과 급제자 33인 안에 든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2월부터 3월까지 매일 같이 사직서를 올렸지만, 업무력이 워낙 출중했던지 인사과나 상사나 절대로 그를 놔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조선 사회에서 치트키처럼 통용되던 부모님 상사(喪事)와 관련된 이유를 대도 오히려 혼이 났습니다. 이쯤 되면 밉보인 게 아닌가 싶죠.

 

아무래도 당시 승문원에서 김령의 이미지는 이랬던 것 같습니다.

 

“능력은 확실히 있는데, 센스도 싸가지도 없는 데다가 틈만 나면 도망갈 궁리만 하는 놈”

 

김령이 근무하는 그 자리는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그 점은 동료들도 잘 알았겠죠. 하지만 수십 일 동안 매일 같이 사직서만 써 대는데도 짤리지 않는 그 모습이 충분히 고까웠을 겁니다. 그 와중에도 사대부로서 해야 할 처신은 똑바르니, 술자리에서 엄근진하게 예법을 지키고 술을 먹기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그를 보호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직장생활 2년 차, 그에게 남은 건 자도 자도 사라지지 않는 만성 피로와 각종 질병, 그리고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 인간관계였습니다. 그야말로 찌들어 버린 직장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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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해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합니다. 아무리 직장생활이 싫어도 그렇지, 다른 사대부들은 그럭저럭 잘하는 벼슬살이를 그토록 싫어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병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직장생활의 부조리함 때문이었을까요?

 

 

MZ선비 김령의 세 번째 현타, 정치와 임금

 

김령이 이토록 현기증 날 정도로 사직서에 집착한 근본적인 이유는 세상과 정치에 대한 실망 이 그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는 관직에 나가기 전부터 여러 차례 선비 집단의 상소 제출을 주도하는 스피커로 활동했는데요. 상소 제출을 주도했다는 건 그만큼 집권층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는 거죠. 그가 과거 합격 후 1년 넘게 출근을 하지 않았던 건 일종의 항의인 면도 있습니다.

 

1613년 5월 19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역모 사건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한창이라 각종 과거가 연기됐고, 수험생들 또한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번 달 13일, 대부분의 관리가 모두 대궐에 엎드려 대군을 죽이라 주청하였으나, 임금께서 허락지 않으셨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역모에 대해서 뭘 알았겠냐만, 상황이 간단하지는 않다. 만약 대군이 목숨을 보전한다면 임금님의 덕이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연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김령이 1614년 3월에 첫 출근을 했으니, 이 일은 김령이 과거에 급제하고 임용되기 전 고향에 내려와 있던 때 발생한 일입니다. 영창대군(선조의 적자)을 둘러싼 역모 사건이었죠. 이 일로 많은 사람이 줄줄이 엮어서 죽임을 당했죠. 이때 김령의 스탠스는, ‘아무리 역모가 있었다 한들 임금께서 설마 어린 동생까지 죽이시겠어?’였습니다. 하지만 여론의 압박이 이어지자 광해군은 결국 영창대군을 포기하죠. 이 일에 항의하기 위해 김령은 신입답지 않은 ‘출근 거부’를 이어갑니다. 항의의 대상은 광해군이라기보단 대북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령이 히키코모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사건이 이어집니다.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한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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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냐야지..... 띠발...

 

1617년 12월 7일, 2월 18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조정에서 역적의 어머니가 대비(大妃)일수는 없다며, 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그 내용도 대단히 날이 서 있다.

 

“하루빨리 문제의 근원을 없애야 합니다.”

 

“대비를 감싸고 도는 사람들도 똑같이 역적입니다.”

 

“역적의 어미를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나라의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김령의 신입사원 시절, 조정은 대북파의 폭주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직권을 남용하며 공정한 인재 선발이 훼손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수차례 역모 사건을 조작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래디컬한 성격이 집단이 되었죠. 

 

당시 조선은 명과 후금이 대립하던 위기의 순간이었음에도 집권 여당인 대북파는 외교와 내정 모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도, 오직 반대파를 숙청하는 권력 다툼에만 정치력을 기울였습니다.

 

MZ 관리 김령은 생각했을 겁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힘을 가진 자들은 자기 자리를 보전할 궁리나 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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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망해가는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처럼, 망해가는 정당에 입당한 청년 정치인처럼, 그 또한 혁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임원과 중진의 모습에 좌절했습니다. 절망적인 체험과 관찰 끝에, 김령은 일기에 ‘나라를 망친 권신들의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적습니다.

 

이때부터 김령은 문고리를 닫아걸고 내려온 벼슬을 모두 손절치며 히키코모리가 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옳지 않은 결정을 한 왕을 신하로서 미워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추진한 대북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도 없으니,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는 뜻이었죠.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새로 들어선 인조 정권은 곧바로 김령에게 벼슬을 내렸습니다. 김령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1623년 4월 25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4월 18일 : 서인(西人)들이 편 가르기를 하면서 자기편을 끌어들이는 모양새가 점점 심해지니, 앞으로 어떻게 이를 막을 것인가.

 

4월 25일 : 어사의 편지를 읽었다. 내가 다시 벼슬에 제수되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흔들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8월 13일 : 내가 또 벼슬을 받았다. 서인들이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전에 이미 부임하지 않았던 적이 있으니 이번에 피할 도리가 없지만, 몸은 병들었고 욕까지 먹고 있으니 갈 마음이 도통 나지 않는다. 정경세가 편지를 보내, “우리가 여러 사람에게 강력히 주장해 그대가 이 직함에 임명된 것일세. 빨리 서울로 올라와 우리와 함께하시게.”라고 했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김령은 대북파도 싫어했지만, 반정 후 권력을 잡은 서인도 싫어했습니다. 반정의 명분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특히, 인조가 쿠데타의 계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현명한 자를 뽑아 왕으로 세운다’라는 반정의 정당성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 정권에 대해서도 비협조적인 태도로 잘 피해 나가는데요. 심지어 서인이 아닌 남인의 거두 정경세가 영향력을 발휘해 그에게 요직을 내리고 편지까지 보냈음에도 비웃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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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내려오는 모든 벼슬을 거절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냅니다. 60대에는 어린 시절부터 괴롭히던 마비 증세가 심해져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렇다고 선비의 도리마저 다 포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인조와 서인 정권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청이 조선을 침공한 두 차례의 전쟁 때 모두 의병을 조직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죠. 

 

선비라고 다 똑같은 선비가 아니라서, 누구는 잠깐 의병 조직한 것으로 관직을 타내기 위해 여기저기 로비를 해댈 때, 김령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조직했음에도 전쟁이 끝나자 다시금 히키코모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참 유니크한 사람입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의 살아온 바를 콕 짚어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관직 생활을 혐오하면서도 과거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불공정과 부조리에 분노했으면서도 때론 자신도 그 불공정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음에도 외교부에서의 일을 싫어했고, 왕(광해군)이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왕을 멋대로 바꾸는 것도 잘못됐다고 생각했으며, 정당한 과정을 통해 등극한 왕(인조)이 아니라도 왕이 위험해 처했을 때 신하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하지만 모호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두까기 인형처럼 아무리 학연이 얽혀 있는 사이라 하더라도 비판할 건 비판했고, 동시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소신일 수 있습니다. 젊은 날 가슴에 품었던 꿈을 펼칠 수 없게 막는 거대한 벽을 조우했을 때, 이윽고 자신의 미력한 몸으로는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누군가는 벽을 돌아가거나 뒤돌아서서 다른 길을 걷습니다. 또 누군가는 기어코 그 벽을 넘어버리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그 벽 앞에 서서, 다만 길을 멈췄습니다. 나라의 정치도, 회사 생활도, 인간관계도 모두 그의 마음속에는 옳지 않은 것투성이였으나, 그는 타인이 바라보는 존귀함을 포기하고 스스로 존엄해지는 길을 택했죠.

 

이렇게, 한 명의 젊은 인재가 히키코모리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많은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죠. 여러분이 젊은 날 품었던 꿈은 어떠셨나요? 과연, 지금 그 꿈은 어떻게 펼쳐지고 있나요? 김령의 삶을 통해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참고문헌

 

(1)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front/index.do)

(2)오용원, 「『계암일록』을 통해 본 17세기 예안 사족의 일상」, 퇴계학논집, 2013.

(3)이근호, 「『계암일록』을 통해 본 김령의 정치 활동과 정세 인식」, 역사와실학, 2014.

(4)황패강, 「계암 김령의 삶과 문학」, 퇴계학과 유교문화, 2001.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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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