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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혈연

 

우리는 살면서 많은 빌런을 만난다. 쉬는 날 카톡 보내는 상사, 꼭두새벽부터 쿵쾅 뛰어다니는 윗집, 내 플레이스테이션을 빌려 가 팔아먹은 친구. 이 정도는 소소하다. 문제는 지독한 빌런. 심지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인생이 상당히 고달프고 외로워진다.

 

아버지는 내 인생 최대 빌런이었다. 10대에는 두려웠고, 2-30대에는 증오했다. 그 무렵, 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후로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이제 내 나이 40줄. 원망의 감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대신 한 인간의 영역에서, 그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 그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쯤 되면 눈치채시겠지만 나는 관점에 따라 제법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불행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빈곤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아니다. 세상엔 많은 언론사가 있고 많은 정치인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켜주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으니까. 

 

나의 이 소박한 이야기가, 꽤나 독특한 근현대사를 가진 한국에서, 한국인의 가난과 불행을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위로받을 분이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 시작.    

 

#1. 내 아버지는 참전용사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사회자가 게스트에게 질문했다.

 

당신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입니까.

 

어린 시절, 나에게도 좋은 기억들이 꽤 있다. 다만, 가장 오래된 기억을 묻는다면, 그건 나쁜 기억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어머니 머리채를 잡고 벽에 쿵쿵 박아댔다. 어머니의 비명에, 나는 하지 말라며 울부짖었다. 서너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난,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 (부모밖에 없겠지만) 아버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다.

 

"하지 마!! 이 개새끼야!!!"

 

나를 돌아본 아버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술 때문인지, 흥분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뭐라? 애미나 애새끼나 똑같네에?!"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쳐지도록 기분 나빠지는 기억. 가장 오래되었지만, 동시에 슬프게도, 가장 생생한 기억이다. 그 이후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기억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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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링크>

 

어느 날, 어머니는 당신의 트레이드마크, 긴 생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리고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뽀글뽀글하게 볶았다. 궁금했다. 왜 그 예쁜 긴 머리를 잘랐는지.

 

나: "엄마, 왜 머리를 브로콜리처럼 볶은 거야?"

 

모: "이게 신경 안 쓰고 해서 좋다."

 

나: "옛날에는 안 그랬을 거 아냐?"

 

모: "그럼. 긴 생머리였지... 저 인간이 내 머리를 손으로 휘휘 감아서 손잡이마냥 써서 다 짤라뿟다."

 

나: "혹시 그때 기억나? 왜 엄마를 그렇게 때린 거야 아버지는?"

 

모: "모르지, 니는 길을 좀 들여야 한다면서 막 때렸지."

 

나: "길들인다고? 동물도 아니고 우째 길을 들이는데?"

 

모: "그 미친놈 속을 내가 우째 알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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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링크>

 

결혼 전,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용사였다. 타국에서 아껴 모은 돈으로, 한국에 돌아와 땅과 집을 사고, 가족들에게 보탬이 된 것을 자랑으로 여겼더랬다.

 

그 당시, 아버지의 돈은 모두 큰 아버지가 관리했다. 그때 사놓은 땅 명의자를 바꾸지 않고 들고 있다가 나중에 팔 때,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 땅의 주인이 누구고, 누가 농사를 지었는지 그 마을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지만, 정작 서류상 땅 주인이 돼 본 적 없는 아버지는 결국 소유권을 얻지 못했다. 당신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산 그 땅은 큰아버지의 몫이 됐다.

 

전쟁터에 나간 동생의 목숨값을 형이 관리하고, 자신의 것처럼 쓰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지금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있다. 그렇게 술을 드시더니, 알콜성 치매가 왔다. 정신이 없으신 와중에 옆 침대 환자, 간병인에게 허풍은 여전하다.

 

"내가 집이 세 채나 있어. 땅도 엄청시리 많고..."

 

당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그 자부심으로 살아온 분이었다.

 

#2. 내 어머니는 바닷마을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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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외할아버지는 남자 아이가 첫째로 태어나기를 내심 기대했고, 항상 여자가 첫째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린 아이가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무거운 그물을 당길 때도, 그녀의 아버지는 여지없이 호통을 쳤다. 바다 일을 배울 때마다 소녀는 울었다. 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어른들 몰래 책을 구해 어딘가 숨겨 놓으면, 아버지는 기어코 책을 찾아내 불에다 던져 땔감으로 사용했다.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나가거나, 생선을 잡지 않을 때는 밭일을 했다. 장녀가 맡은 임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 그때의 누나들이 그랬듯, 어머니는 국민학교 졸업 후 공장에 취업했고, 남동생 두 명과 막내 여동생을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나에게 어머니는 딱딱하고 고지식한,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억척스러운 삶을 강요받고, 자신을 갈아 희생한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친구들의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상냥하지 못했다.

 

#3. 만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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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바다에 놀러 왔다 어머니를 만났다. 결혼 전, 동네에서 유명한 점집 세 군데를 들렀는데, 모두 똑같은 말만 했다고 한다. 

 

"두 사람, 너어무 안 맞아. 결혼하면 나중에 힘들데이~!"

 

실제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울 거면 결혼을 왜 했노?" 라는 질문에 어머니는, 

 

"결혼 안하면 집에 불 지를 끼라고 하더라."

 

고 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보다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족 중 경제 활동 하는 사람이 없으면 군 면제가 가능했고, 당시 어머니는 큰외삼촌 군 면제를 위해 서둘러 결혼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 어머니뿐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갑작스러운 결혼. 굳이 점집을 찾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되는 전개.

 

결혼은,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두 번째 희생이었다.

 

#4. 익숙한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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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 中>

 

아버지가 일찍 집에 들어오시는 날이 정말 싫었다. 일찍 오는 날에는, 같이 식사를 해야 했고, 아버지와 마주 앉은 날이면 안 울어본 날이 없었다.

 

고기를 구워 먹던 날이었다.

 

"다른 반찬도 좀 챙겨 묵으라."

 

어머니가 젓가락으로 반찬 종지를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때도 반주를 걸치고 술이 얼큰하게 오른 아버지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이기이기?! 편식하지 말라고 했제!!

니는 형이 돼가꼬 왜 그 꼬라지고?!"

 

고기를 구워 먹는데 고기를 먹으면 왜 편식하는 게 되는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마냥 무섭고 악마 같은 존재여서, 항상 밥상머리 앞에서 머리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어머니는 가만히 있었다. 그의 행패를 교육의 일환으로 봤던 것인지, 항상 묵인했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한마디 툭, 던졌다.

 

"와 그라노. 자꾸 그라면 애가 마음의 문을 닫는다."

 

남의 아이를 보면서 하는 말 같기도 하고, 평소에 무뚝뚝한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고급스러운 표현이었다. 조금 놀랐다. 마음이 동하던 찰나, 아버지는 찬물을 끼얹었다.

 

"뭐시기, 마음의 문?! 닫으라 캐라!!"

 

술에 취해 눈과 얼굴이 붉게 번들거리던 아버지의 말은, 앞으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잔인한 말은 내 가슴을 정통으로 찔렀다.

 

마냥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원망으로 바뀌기 시작한 날이었다.

 

#5. 인색한 칭찬

 

일이 끝나면 아버지는 직원들을 데리고 근처 술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술집으로 새기 전에 어머니가 잡으러 간 날은, 집에 일찍 들어와 술을 꺼내 혼자서 식사했다. 술 취한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은 항상 나였다. 요즘 말로 하면, 감정 쓰레기통. 그날 하루 동안 느꼈던 나쁜 감정은 오롯이 내게 향했다.

 

당연히 칭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놀라운 점은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도 칭찬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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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링크>

 

초등학교 6학년, 운동회에서 달리기 2등을 했다. 특별히 행복하거나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촌 형의 아내를 만났다.

 

"오늘 운동회 했다며, 잘했어?"

 

"달리기 2등 했어요."

 

"아이고~! 잘했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여줬다.

 

"어여 가서 맛있는 거 사 묵으라!"

 

만 원이라는 큰 액수는 둘째치고, 누군가 머리를 쓸어주며 칭찬해 준 것이 내 인생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문화 충격. 그제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건, 칭찬을 받는 건 정말 달콤한 일이구나. 가슴이 뛰었다.

 

대문을 열자, 어머니가 보였다.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내 이번에 달리기 2등 했심더."

 

"2등이 뭐꼬? 1등 몬했나."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끝까지 뒤로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다.

 

외로웠다. 한순간이라도 어머니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길 바랐다. 따뜻한 칭찬 한마디 듣고 싶었다. 어린 소년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른의 손길 한 번에, 나는 사랑에 목말라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기가 필요한 나이였고,

 

'나도 칭찬해주세요.'

 

라고, 처음으로 표현한 날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인정을 받는 걸, 그날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떤 걸 해내 보이는 일은 나에게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집은 일과를 마치고, 빨리 돌아가고 싶은 편안하고 따뜻한 이미지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하지만 나에게 집은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시간 중, 대부분은 무관심 속에 있었고, 가끔 말을 걸 때는 높은 언성으로 나의 모자람을 각인시킬 때였다. 부모님의 사랑을 원하지만, 벗어나고 싶을 만큼 불안한 공간. 나에게 집은 그런 곳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