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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봄. 야마구치구미 본부에 가까운 고베수이죠경찰서(神戸水上警察署)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 대열을 이뤄 선 경찰관들을 앞에 두고 살짝 고개를 떨구며 진지한 표정을 지은 한 남자의 모습이 찍혀 있다.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 1913.3.28 - 1981.7.23). 이제 전국적으로 그 이름을 떨치는 야마구치구미 3대째 오야붕이다. 맙소사. 야쿠자 세계에 몸을 담은 오야붕이 조직의 본고장 근처 경찰서에서 일일 서장을 맡은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왜 이렇게 연출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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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일일 경찰서장을 맡게 된 타오카 카즈오

(1959.4. 고베수이죠경찰서)

출처-<트위터>

 

1. 경영 감각과 따뜻함이 있던 오야붕?!

 

1950년대 야마구치구미는 고베항을 본거지로 항만 하역 업계 거인이자 산하의 연예 사무소도 잘나가며 승승장구하여 ‘무장상인대’라고 불리곤 했다. 사업적 성공은 야마구치구미가 다른 사업자 상권을, 폭력을 이용해 약탈하고 자신의 나와바리를 확장하며 시노기(먹고 살기 위한 생업)의 길을 넓힌 과정이... 아니었다. 

 

이 연재에서 전에 언급했듯 원래 항만하역 업계에서는 짐의 주인인 하주(荷主)가 각 항구를 거점으로 하는 하역 회사에 하역을 위탁, 그 하역 회사가 일의 하도급을 던지고 1차 하청 업체가 일손이 모자라거나 일이 위험하거나 하면 해당 업체가 다시 도급을 2차 업체에 맡긴다. 말하자면 다층적 하청 구조가 확립되어 있었다.

 

야마구치구미가 본거지를 둔 고베항 역시 다층적 하청구조가 만연했다. 2차대전 전에도 있었던 이런 항만 노동 생태계 속에서 근대적 야쿠자는, 소위 말하는 하층 노동력을 통솔하는 역할을 하였다. 야마구치구미 역시 그 여명기에 그런 전형적인 근대 야쿠자 조직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타오카 카즈오가 쿠미쵸(組長, 두목)의 자리를 물려받는 즈음, 야마구치구미는 항만 노동계의 구태의연한 노동 구조를 깨려 노조 결성에 앞장서는 한편 업체 간의 결속을 북돋웠다. 하역 노동의 지위 향상에 일조했다.

 

야마구치구미가 애를 쓰던 또 하나의 사업인 연예 관련 산업에서도 승승장구한다. 연예 사업에 관여하는 일반적인 야쿠자의 전형은 어디까지나 ‘동네의 가오’에 지나지 않았다. 동네에서 공연이 열릴 때마다 보안 일을 맡거나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오는 연예인이 자기들 나와바리에서 공연을 치를 때에 중개해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야마구치구미는 달랐다. 라디오나 후엔, 티브이를 통해 온 나라를 무대로 활약하는 스타가 속속 탄생하는 추세가 조성, 야마구치구미는 현대식 내지 그에 가까운 종합 연예 기획사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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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카 카즈오(왼쪽)와

일본의 배우·가수·코미디언인 에노켄(오른쪽)

출처-<위키피디아>

 

주목할 것은 위와 같은 사업상 성공이 ‘야쿠자다운’ 폭력과 가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효율성과 그에 기초한 수익성을 중시하면서 여기다 싶으면 인간적인 따뜻함을 발동시킬 줄 알았던 타오카 카즈오의 탁월한 경영 감각이 그를 사업가로서도 성공하게 했고 일일 경찰서장까지 맡게 한 요인이었다.

 

2. 사업 부문의 호위 무사 역할을 한 폭력 부문

 

타오카는 사업체에서 '야쿠자색'을 뺐다. 그 상징이 바로 오카 카요시(岡精義) 영입이다. 그는 야쿠자가 아니었다. 항만 하역업에 밝은 회사 경영인이었다. 오카 등용이 상징하듯 야마구치구미는 폭력 부문과 사업 부문으로 나누어진다. 폭력 부문 야마구치구미는 항만 하역업종 계열사와 연예 관련 계열사로 구성되는 사업 부문을 지배한다. 말하자면 '야마구치구미 홀딩스' 같은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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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카요시(岡精義)

출처-<트위터>

 

타오카가 구축한 ‘폭사(폭력 및 사업) 분업체제’는 야마구치구미가 전국 규모로 성장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적재적소 원칙에 기초하여 사업은 사업가(라 해도 형식적으로는 확연한 야마구치구미 구성원)한테 맡김으로써 업계 내부의 구태의연한 관행과 노동 환경을 개혁하며 외부(고객)에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로’,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항만 하역업계에서는 우선 고베 지역내에서 공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 뒤 전국항만하역진흥협회(전항진)의 인맥을 지렛대로 오사카항·나고야항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요코하마항·도쿄항까지 진출을 꾀할 정도로 성장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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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오카 카즈오

출처-<링크>

 

연예와 관련해서는 전국 각지에 산하 연예 기획사를 조직하면서 서일본(대략 오사카 이서 지역) 전역에 공연권을 확립하고 더 나가 일본 전국을 시야에 담고 있었다. 야마구치구미의 폭력 부문은 사업 부문 확장에 따르는 사업 밖의 요인, 즉 자기 나와바리를 지키려는 각지 조직의 저항에 맞서는 ‘방위력’으로서의 색채가 강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3. 거대 기업 총수 타오카 카즈오

 

야마구치구미의 성장 원동력은 타오카의 사업 감각과 그한테 조직의 사업 부문을 맡긴 오카 키요시의 수완이다. 1950년쯤부터 60년대 중반까지는 카오카 카즈오에게 있어 가장 잘나갔던 시기였던 터이다. 모두에서 언급한 사진이 찍힌 때가 바로 그 야마구치구미 절정기다. 당시 타오카는 이미 고베항 선내하역 조정협의회(神港船荷役調整協議 )를 비롯해 공적인 성격을 띤 여러 기관에서 위원을 역임하는 등 ‘양지’에서도 그 지위를 착착 굳히고 있었다.

 

그도 그릴 것이 50년대에 접어들면서 항만 하역 사업이 순조로이 커가다가 59년 항만운송사업법이 개정됨에 따라 이차 이상의 하청구조가 해소되며 야마구치구미 계열의 모든 선내 하역 업체들이 1차 하청으로 승격하는 동시에 해당 사업 분야에 있어 거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1964년도 신고소득 중 하역 작업으로 인한 수입은 미츠토모기업(三友企業) 8억7,000만엔, 스미이운수(住井運輸) 7억 2,000만엔을 비롯해서 그룹 전체 60억엔 남짓이다. 그 당시 60억 엔이면 일류기업 못지않은 매출액이다. 제일공업 등 선박 정비 관련 회사 매출까지 더해 야마구치구미는 거대한 기업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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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카 가즈오(중간줄 왼쪽에서 세번째)와

그의 조직 측근들

 

야마구치구미의 수익원은 항만 관련 사업만이 아니다. 연예와 관련해서도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일례로 야마구치구미의 연예 관련 회사 중 핵심인 고베예능사는 1958년에 2,180만 엔의 공연 수익을 올렸고, 1964년에는 무려 1억 3,280만 엔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 외에 더오사카예능사·야나가와예능 등이 막대한 이익을 거둬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항만 관련 사업이 됐건 연예 사업이 됐건, 실은 위에 소개한 1964년은 야마구치구미 사업 부문 '투톱'의 최절정기였고 그 이후 수익은 조금씩 떨어졌다. 그 배경에는 야마구치구미가 사업체를 성장시킨 사회환경 혹은 노동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즉 60년대에 접어들도록 본격화한 초고속 성장, 그에 동반한 노동 조직과 현장의 변화가 야마구치구미 사업 기반을 흔들기 시작한다.

 

4. 고도성장기 야마구치쿠미의 운명

 

일본 현대사를 되돌아볼 때 2차대전 후 고도성장은 뺄래야 뺄 수 없는 대목이다. 고도성장 속에서 대량소비 시대 막이 열렸고, 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의식이 바뀌었다.

 

그 변화의 파도가 노동 현장마저 흽쓴다. 고도성장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규모의 공장에서는 공정마다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직함은 현대식으로 개편됐다고 하나 구태의연한 오야카타(親方, 스승)-코가타(子方, 제자) 관계가 일반적이었다. 기계화・자동화가 심화하기 전 각 공정 내 작업마다 숙련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기술을 가르쳐 주고 배우는 농밀한 관계가 있었다. 야마구치구미가 기반을 두던 고베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더불어 노동 현장에서 툭하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노동자를 관리하는 야쿠자 역할이 작지 않았다.

 

그런데 6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도성장이 본격화함에 따라 고베항을 드나드는 화물량이 급증하자 기존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 특히 스크랩(쇠부스러미나 금속 폐품)·목재·유지(油脂)·가축용 먹이 등 하역에 시간이 걸리는 화물 수입이 대폭 늘어나서 체선(滯船)・체화(滯貨)가 일상이 된다. 이런 현상을 맞이하면서 항만 하역 업계에서는 값싼 노동력과 낡은 노동 관행에 기대어 기술혁신을 게을리한 것이 그 원인이 아니냐는 반성이 일었다. 당시 항만 하역 현장에서는, 예컨대 곡식을 담은 가마니를 배에 싣고 내리는 작업을 할 때는 갈고리에 가마니를 걸어 어깨에 얹어 메어 옮기는 식이었다. 인부의 근육만이 동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입된 기계는 벨트 컨베이어(belt conveyor)였다. 연이어 하역 노동 기계화 주역인 포크리프트(forklift, 지게차)도 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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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 컨베이어

출처-<위키피디아>

 

당초 이런 움직임에 베테랑 노무자들은 "저런 것들은 쓸모없지…. 직접 하는 게 더 빨라"라든가 "좁은 데서 그런 건 오히려 장애물이 될 뿐이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러다 드디어 하물 노동 현장에 소형 크레인이 도입되었고, 이에 따라 팔레타이징·단위화 등등 하역 기술에 어두운 노동자에게는 미지의 개념이 현장을 날아다니는 현상이 일어났다.

 

종전에는 그때그때 무게도 겉모양도 달랐기 때문에 화물선에 어떤 짐이 어떤 식으로 실려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서 어떻게 멜지를 하역부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짐이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박스에 담겨 컨베이어 위를 흘러가게 됐다. 이제 하역부의 노련함은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기계화가 진전하면서 선내하역과 연안하역이라는 하역 노동의 구분 역시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런 구분에 기초한 나와바리 역시 애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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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리프트

출처-<링크>

 

5. 기계화에 따른 하청업의 대변화

 

기계화의 진전은 하청 체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기계화 초기에는 하역 하청업체가 기계 임대업자로부터 운반 기계를 빌리고 그때그때 필요한 하역 노동을 하도급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하역 노동 현장에서 기계가 널리 보급되면서 임시적인 청부 작업 정도면 기계 임대 업체가 지게차나 컨베이어를 조작할 수 있는 기사와 함께 그들 기계를 임대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이르러 야쿠자가 일용직 노동자를 관리하며 수요에 응해 공급하는 구조 자체가 그 존립 기반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박차를 가한 것이 바로 '컨테이너화'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컨테이너 터미널을 기점으로 한 해상 컨테이너 수송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됐는데 고베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컨테이너 부두나 물자별 전용 부두가 정비되며 대형 하역 기계를 도입했다. 이런 변화는 적시에 많은 노동자를 동원하고 통괄(統括)할 필요성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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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움직임에 호응하듯 60년대 후반에 들어 중요한 법 개정이 잇따랐다. 먼저 66년에 항만운송사업법 개정이 있었는데 이에 따라 각 업체가 맡은 항만 하역의 최소 70퍼센트를 자체적으로 실시해야 했다(즉 도급할 수 있는 작업량이 30퍼센트로 제한). 두 해 뒤에는 항만하역기업 면허 기준이 엄격화됐다. 60년대 초 항만 하역에서 일용직 노동자 의존율은 50퍼센트를 밑도는 정도였는데 법 개정 결과 선내 하역, 바지선에 의한 운반 작업, 연안 하역으로 나뉘었던 항만 하역이 일관화되며 일용직 노동자 의존율은 한 자릿수까지 급락했다. 항만 하역 면허 보유 업체 수 역시 약 3,500에서 2,500까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흐름은 고베항을 본거지로 하던 야마구치구미를 직격한다. 야마구치구미는 선내 하역 특화 하청업체로서 성장해 왔으나 항만 하역의 하청 구조가 깨짐에 따라 일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남겨진 길은 아예 철퇴(撤退)하거나 대규모화・합리화를 통해 살아남는 것밖에 없었다.

 

어느 길을 가든지 간에 이제 야쿠자가 항만의 가오로 기세를 부리는 시대는 끝이 난 셈이다. 야마구치구미 역시 새로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야마구치구미는 전부터 진출하려다 잘 되지 못하고 있던 토건업에 본격 진출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18)~고베(神 )】

 

연재 부제목이 '야쿠자100년사'인데도 사실상 야마구치구미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연재. 애독해 주고 있는 분들이면 야마구치구미가 고베에서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린 뒤에도 쭉 동지를 본거지로 하며 성장해 갔단 점은 이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일본에선 가끔 이와 같은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요즘 오사카가 자꾸 얼른 결혼하라 그래서 시끄럽다..." 여기에 나오는 '오사카'는 독자분들도 아시는 그 오사카이고 어휘 분류상은 지명이죠. 그럼 위 말은 오사카라는 도시가 나한테 결혼하라고 재촉한다는 걸까? 혹시 행정기관으로서의 오사카부(府)나 오사카시(市)가 미혼자들에게 (무슨 혜택을 미끼로) 결혼하라고 촉구하는 문구인 걸까? 아닙니다. 방금 그 오사카는 오사카라는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오사카에 사는 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끼리 이야기하다 딴 지방이나 도시에 사는 친척을 가리켜 해당 지명으로 대신하는 일은 자주 있죠. 그리고 지명은 해당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조직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어 일본에서 이른바 신(新)좌익(60년대 구미나 일본에서 학생, 청년 노동자로 구성된 정치 세력)으로 분류되는 여러 파 중 요요기(代々木도쿄내 지명)라 하면 일본 공산당계의 민주청년동맹(약칭 : 민청)을 가리킵니다. 카스미가세끼(霞が, 도쿄내 지명)는 주요관청을 뜻하는 게 일반이죠.

 

'가꾸마루(革マル,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의 약칭)'가 요요기를 급습한 사건에서 경찰이 사건에 관여한 학생·노동자 등 5명을 체포, 기소한 모양이다" 하면 가꾸마루(참고로 보도기관들은 이 단체를 과격파, 경찰은 극좌 폭력집단으로 부름)가 막연하게 요요기라는 동네를 마구 털었단 뜻이 아님은, 감이 좋은 독자분은 이미 알아챘겠지요. 그렇습니다. 위 말의 정확한 의미는 "가꾸마루라는 과격하고 툭하면 폭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는 극좌 집단이 요요기에 본거지를 둔 일본공산당의 청년 조직을 때렸다"는 거죠.

 

이렇듯이 지명이 그 지명이 가리키는 곳에 사는 사람이나 거기를 본거지로 하는 조직 등을 대신해서 사용될 때가 종종 있지요. 그럼 야쿠지 업계에서 '고베' 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그렇죠. 고베를 거점으로 전국적으로 그 이름을 떨치는 야마구치구미를 이르지요. 이제 독자 여러분도 "우리가 오사카에 진출하면 고베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라는 대사의 취지가 어떤 건지, 확실히 아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