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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정이 어려운 개발도상국에 해외원조를 제공하는 금융 기관에 근무하고 있다. 이 글은 몇 주 전 네팔 북서부에 소재한 차멜리야 수력발전소에 출장을 다녀오며 경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네팔 전력청(Nepal Electricity Authority)이 건설한 수력발전소에 대한 '완공평가'를 실시하고자 5일간 다녀온 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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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원조로 지은 차멜리야 수력발전소 완공기념비.

한국수력원자력이 외국에 건설한 첫 수력발전소다

 

1. 현장을 돌아볼 시간입니다

 

발전소 운영진의 설명을 한 시간 남짓 듣고 현장을 돌아보고자 사무실을 나섰다. 가장 먼저 발전 및 송배전 설비를 점검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자금은 사실 이 송배전 설비를 구매하는 데에 지원되었다. 송배전 설비는 한국에 있는 제조업체에서 제조되었다. 송배전 설비 구매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토목공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정은 중국 업체가 네팔 현지 인력과 자금을 활용하여 마무리하였다. 15 MWh짜리 발전기 2대는 정상 운영되고 있었다. 발전 및 송배전 설비의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게 이번 출장의 가장 큰 목표였다. 일단 한고비는 넘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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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및 송배전 설비를 점검하고 있는 기술전문가

 

수력 발전은 댐을 건설하고 거기에 모인 물을 낙차를 이용하여 떨어뜨리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 즉, 수력발전은 댐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전 및 송배전 설비의 점검을 마친 우리 일행은 댐 설비를 점검하고자 나섰다. 수력발전 댐은 발전 및 송배전 설비로부터 약 6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눈에 봐도 가파르게 깎아지른 두 개의 협곡 사이에 수력발전댐은 솜씨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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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멜리야 수력발전소

 

수력발전 댐에 도착하자 발전소 운영진과 기술전문가 2명 사이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홍수기와 갈수기 때 유량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홍수기 때 떠내려오는 엄청난 규모의 퇴적물들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필자는 기술 분야에 아는 바가 사실상 거의 없어서 딱히 이들 4명의 대화에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저, 험준하고 외딴곳에 이렇게 수력발전 댐을 건설하여 운영한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이었다.

 

"수력 발전 댐은 지하에도 볼 게 많죠. 같이 들어가서 토목건축 사항 점검 한번 해보실래요?"

 

발전소 및 수력발전 댐 건설은 우리 기관의 지원 분야도 아니어서 굳이 점검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이 발동한 외부 전문가 2명은 흔쾌히 발전소 운영진의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나 역시 25년이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업장에 출장을 다녀봤지만 수력발전댐의 지하에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지하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거대한 토목구조물들이 여러 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거대한 구조물들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엔지니어들끼리는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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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력발전 댐의 지하에 설치된 토목 구조물을 점검하고 있다

 

2. 1,000km가 넘는 거리를 옮겨왔어요

 

우리 기관은 발전 및 송배전 설비만을 지원했는데 그 설비가 어떻게 여기까지 도착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전소장에게 물었더니 답변이 놀랍다 못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한국산 발전 및 송배전 설비는 인도의 캘커타(콜카타)항에 도착했어요. 거기까지만 운반해 주는 것이 그 당시 계약조건이었죠. 결국 우리 네팔 정부가 캘커타 항구에서 약 1,000km나 되는 거리를 육로로 운반해서 이곳 차멜리야에 발전 및 송배전 설비를 설치했어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나. 무게가 거의 50톤이나 되는 설비를 끌고 이 험준한 산맥을 넘어서 왔단 말인가요?"

 

"네. 이동을 위해서 발전설비를 3개의 부분을 분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이 최소한 15톤 이상은 나가는 엄청난 무게였죠. 이 정도 무게를 지탱할만한 산악도로가 없어서 우리 네팔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없는 도로를 새로 닦고 없는 다리를 새로 놓아가며 이 설비를 옮겨왔어요. 이 발전 설비를 도입하기 위해 지도를 바꿨죠(웃음). 네팔에서도 가장 낙후된 이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그 힘든 일을 해낸 거예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히터가 따뜻하게 나오는 6인승 카니발 차량의 뒷자리에 타고서 넘어오기도 힘든 2,000m가 넘는 산악지역이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다. 수십 톤짜리 발전설비를 뒤에 매달고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이동을 했을 네팔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겠는가? 오로지 자기 자식에게만은 암흑의 세상을 물려주기 싫다는 일념 하나로, 자기 후손들에게는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생각 하나로 그들은 길을 건설했고 다리를 놓았다. 그들은 발전설비를 천천히 옮겼다. 절대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지옥 같은 1,000km 행군은 그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발걸음을 옮긴 네팔 사람들에 의해서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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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국 네팔

빨간 점의 차멜리야 수력발전소와 해안의 캘커타항 

출처-<구글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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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멜리야 수력발전 댐의 전경

 

3. 이분들에게서 우리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네요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첩첩 산골의 하루 햇살은 짧기만 했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기자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발전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것은 5시경이었다. 이미 주위가 어두워졌다. 발전소에서 제공한 저녁도 100% 채식 식단이었다. 발전소 소장, Chief Engineer를 포함해서 발전소 운영진 대부분이 독실한 힌두교도인 듯했다. 점심때 우리 일행을 대접하고자 손가락만 한 민물고기 튀김을 두어 개 얹어주셨는데, 그 작은 물고기 튀김이 간절히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60여 명의 발전소 운영직원들은 이 고립무원의 산골짜기에서 일주일 동안 퇴근도 못 하고 꼬박 숙식하며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강물이 낮에만 흐르고 밤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떤 비상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그저 24시간 대기상태이다. 발전소 직원들은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고 나와 기술전문가 2명이 내 방에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술전문가 2명 중 한 명은 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분이 묻지도 않았는데 한마디를 했다.

 

"여기 사시는 주민분들을 찍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차마 못 찍겠더라고요"

"왜요?"

"글쎄요.. 뭐랄까. 이분들 얼굴에서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보여서요..

제가 값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분들 모습을 허락도 없이 찍는다는 게 죄스럽다고나 할까..."

 

수력발전 댐에서 차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몸집보다도 큰 풀을 베어 등에 지고 산길을 내려가는 이곳 주민들 몇 명이 우리 차량 옆을 걸어서 지나갔다. 얼굴과 어깨 위에 마치 낙인처럼 내려앉은 고된 노동의 흔적은 안쓰러웠다. 하지만, 우리처럼 잠시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손님 같은 사람들이 과연 '안쓰럽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나 역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나 또한 그분들을 모습을 사진에 담지 않은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우리 세 명은 말없이 소주잔만 비우고 있었다.

 

4. 죽기 전에 언제 다시 여기를 와보겠어요?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발전소 직원들 몇몇이 게스트하우스 앞에 모여들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발전소 정문을 나서자마자 지난 이틀에 걸쳐 왔던 험한 산길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이제는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일정만 남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히말라야의 모습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유리창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던 기술전문가 한 분이 잠시 쉬어가자고 청했다.

 

"죽기 전에 언제 다시 와보겠습니까? 우리 차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경치 좀 보고 가시죠."

 

운전기사가 경치가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우리 세 명은 모두 차에서 나와 경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름답다는 둥 멋지다는 둥 서툰 인간의 언어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세 명은 모두 대자연이 수십만 년에 걸쳐서 깎아놓은 멋진 조각품을 조용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처럼 한때 지나가는 여행객이나 평생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한 등산객에게는 멋있고 경이로운 경치에 불과하겠지만, 이곳에 터 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자연환경은 역경이자 재앙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경제학을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내륙국(land-locked country)이 경제발전에 얼마나 불리한 위치에 있는지 말이다. 게다가 험준한 산맥으로 동서남북이 둘러싸여 있다면 엄청난 물류비용에 짓눌려서 경제발전은 그야말로 물 건너간 소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네팔은 이미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팔 사람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수십 톤의 발전설비를 밀고 끌어가며 1,000km가 넘는 머나먼 길을 걸어왔다. 이들이 걸어온 길은 비록 골고다(Golgotha,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루살렘 교외의 언덕)의 길이었지만 마침내 발전소에 도착한 발전설비는 정상 가동하기 시작했다. 네팔 전체 면적의 1/4은 '전기'라는 달콤한 꿀을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맛보게 된 것이다.

 

 

기술전문가 두 분은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당하디에서 나와 헤어졌다. 네팔-인도 국경검문소를 통과하여 몇 시간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닷새 동안의 강행군으로 온몸이 쑤셨다.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엉덩이는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몸은 네팔을 떠나 인도로 돌아왔지만, 출장 동안 마주쳤던 네팔 사람들의 모습, 그들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5.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

 

우리는 종종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가난을 그들의 탓이라고 말한다.

 

"저 사람들이 게으르니까 가난하게 사는 거야"

"열심히 일하면 왜 가난하겠어? 다 저 사람들 본인 탓이야."

"성공하고 부자가 된 사람(나라)들 한번 보라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너무나 가난하면, 너무나 궁핍하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을 경우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상황에 부닥쳐있는 사람(나라)일수록 오히려 더욱더 처절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존엄과 생존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할 때가 있다. 마치, 1,000km가 넘는 산길을 묵묵히 걸어 발전설비를 옮긴 가난하지만 위대한 네팔 사람들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 많은데 왜 세금을 퍼부어서 해외에 원조를 주냐?"

 

는 이런 말은 제발 하지 말자. 이런 말은 무식할 뿐만 아니라 배은망덕한 말이다. 우리나라도 70년 전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난 후 해외원조를 받아 국가 재건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부모님 세대가 몸과 혼을 갈아 넣어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만 그 첫걸음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은 국제사회의 원조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았던 그 당시 우리나라에 원조해주었던 소위 '선진국'에는 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없었을까? 그들도 모두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선진국에도 형편 어려운 사람들 많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시아 변방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바로 그 도움을 받고 목숨을 유지하고 나라를 다시 세웠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최소한 우리나라는 과거에 우리가 받은 도움을 갚아야 한다. 수십억 불에 달하는 엄청난 도움을 받고 나서 이만큼 먹고살 만해졌는데, 이제 입 딱 씻고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배은망덕한 나라, 염치없는 나라는 되지 말아야 한다. 똥 누러 들어갈 때와 똥 누고 나온 다음이 다른 그런 나라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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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해가 졌고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문득 살아 있음이 감사했다. 그 누구보다도 묵묵하고 치열하게 자신들을 둘러싼 역경을 헤쳐 나가며 살아가는 네팔인들을 만났던 이 출장이 감사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설령 지금 내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면, 내 자식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희생하는 나의 인생은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세대가 인생을 살아냈고, 우리도 살아내고 있으며 자식들도 살아 나갈 것이다. 돌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시시포스처럼 말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어폰을 꺼냈다. 유튜브를 켜고 이리저리 화면을 검색하다가 문득 콜드플레이가 부른 Viva la Vida(스페인어로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가 눈에 들어왔다.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흥겨운 리듬 속에 묻힌 슬프디슬픈 가사가 천천히 세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코끝이 찡해지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태운 차량은 드디어 뉴델리에 들어섰다.

 

그렇게 나의 출장은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