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른 아침부터,
볶음밥을 볶고 있는 것인가.
오늘도 평화로운 얼렁뚱땅 우당탕탕 딴지생활.
본격 정체성혼란사내 N잡러 체험기. 금요미식회 백스테이지 <근육병아리의 어쩌다 뉴스공장>, 지금부터 시작한다.
돗대거탑
2009년 초 여름. 근육병아리는 천안 중앙소방학교에서 의무소방원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일선 소방서로 배출되기 하루 전 날 밤. 하루도 안 빼놓고 굴리고 갈구던 훈련 조교가 선심 쓰듯 외쳤다.
"흡연자들, 훈련탑으로 모여"
그날 중앙소방학교 훈련탑 4층엔 어림잡아 80명 정도 되는 교육생이 모였다. 논산훈련소부터 두 달 동안 니코틴을 굶어온 그들이었기에, 오와열을 맞춰선 그들의 콧김은 점차 거세어져 갔고, 천천히 훈련탑 계단을 올라오는 조교의 발소리가 주는 설렘은 헤어진 첫사랑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이코, 이런 이런. 한 보루 사둔다는 걸 깜빡했네. 내가 피던 거 두 까치 남았는데, 어쩌냐? 니네 가위바위보라도 할래?"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연초 두 개비가 달그락거리는 담뱃갑을 흔드는 그를 보며,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아 이래서 전시가 아니면 실탄을 안 주는구나.
와
니코틴이 모멸감을 이기는구나.
어쨌든. 초딩때 문방구에서 잉어엿도 한번 걸려본 적 없는 기구한 뽑기 운을 타고난 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80명의 동기들과 세상 가장 치욕스러운 가위바위보대전에 참전한 근병은,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수많은 전우를 물리치고 어처구니없게도 최후의 2인이 된다.
조교가 하사한 보헴 시가 1미리를,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 78명의 강제적 금연자들 앞에서 맛나게 태우며 생각했다.
세 번 온다는 인생의 기회 중 하나를 이딴 데에 써버렸구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다시 시간을 되돌려 2023년 1월.
기사링크 - 근육병아리의 방구석 오마카세 : 겨울 달큰 특집 - 겸손한 대방어 회식 편
직장인이 된 근병은, 회사에서 회를 썰고 있었다.
근병을 유심히 지켜보던 뉴스공장 작가님.
작가 : 어쩌다가 이런 연재를 하게 된 거예요?
근병 : 뭐.. 어쩌다 보니 글케 되었습니다. 흐허허.
작가 : 요리를 따로 배우신 거예요?
근병 : 아뇨... 그냥 만화책이랑 유튜브 보고...
이거 아주 웃긴 색히구나 라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작가님.
이윽고 날아온 질문,
작가 : 기자님. 한식이나 양식도 가능하세요?
가능(可能). 가능이란 무엇일까.
'옳을 가'에 '능할 능'. 할 수 있거나 될 수 있음.
메인 작가님이 나에게 던진 '가능'이라 함은, 나의 능숙도나 경험치를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의지 같은 것을 묻는 것은 아닐까. 순간 소방학교 훈련탑위에서 허망하게 태워버린 절호의 찬스 카드 한 장이 떠올랐다. 인생의 빅데이터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대신 대답했다.
근병 : (아마도)쌉가능 하죠.
안녕하세요 쌤
그렇게 방송 하루 전날 금요미식회 코너에 전격 투입된 근병.
전화를 건다.
황쌤 : 황교익입니다.
근병 : 안녕하세요 선생님. 금요미식회 코너에서 요리를 맡게 된 딴지일보 김정수라고 합니다.
황쌤 : 오! 안 그래도 도 작가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딴지에 재밌는 요리사가 있다고?
근병 : ㄷㄷㄷ 제가 내일 뭘 준비해 가면 될까요?
황쌤 : 훈제 굴 통조림을 가져갈 건데, 그걸로 볶음밥이랑 떡국을 해봅시다.
근병 : 볶음밥은 그렇다 쳐도, 훈제 향이 떡국이랑 어울릴까요?
황쌤 : 잠깐만요.
괘..괜찮겠지.
겸공의 새벽
다음날 새벽 5시, 충정로 딴지 사옥.
케이터링을 준비하는 카페팀.
생방송 스탠바이 중인 제작진과 출연진.
게스트 전용 숟가락도 스탠바이.
이른 새벽, 비장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곳에서,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아무튼 뭐, 기왕 이래 된 거 내가 할 일을 해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미식회 스탠바이
제철을 맞이한 굴만큼 매력적인 식재료도 드물다.
특히 굴을 회로 먹을 때, 가득 응축되어 있는 바다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맛을 표현하려고 트리스탄이나 이졸데같은 어려운 말들을 끌어왔겠는가.
하지만 알다시피, 생굴은 잘못 먹으면 변기 위에 앉아 휴지걸이를 붙잡고 밤새 울부짖게 되는 무서운 녀석이다.
그렇다고, 양질의 굴이 저렴한 가격으로 풍부하게 자라는 우리나라에서 탈수의 두려움에 이 맛있는 걸 포기하고 산다는 건 너무나 슬프고 원통한 일이다.
그래서 이런 가열 조리 제품은 굴트라우마가 있는 자들에게 훌륭한 제안이 될 수 있다.
역시 쌤도 걱정되셨었구나...
이거시 바로 훈제 굴 본체. 뚜껑을 따자마자 달큰한 훈연향이 와락 올라온다. 방송이고 뭐고 맥주 4캔 순삭 각.
황쌤 : 너무 잘게 썰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씹는 맛도 필요하지 않겠어?
근병 : 쌤 저는 제가 방송 개판치고 씹힐까봐 무서워요.
어쨌든 씐나게 참기름을 두른 뒤,
냄비 바닥에 굴이 눌어붙지 않도록, 신속하고 재빠르게 보크보크. 훈연 향에 참기름 향이 도포되니 막 침이 줄줄 나온다.
엄격한 생수 500ml 샷.
어느 정도 국물에 색이 나오면, 떡 투입. 놀랍게도, 요리가 거의 다 되었다. 이미 완제품인 통조림 굴에 모든 맛의 밸런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
혼신의 달걀 물.
어슷어슷 대파.
감태를 살살 풀어 두면, 토핑 재료 준비도 끝.
온에어
마침내 떨어진 금요미식회 큐사인.
공장장 : 금요미식회. 부활한 코너입니다. 까칠한 미식가. 하지만 몇 년 동안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던, 황교익 맛칼럼니스트 모셨습니다.
황쌤 입장.
홀로 남은 주방.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거대한 사고를 치게 된다면, 지금이 절호의 타이밍 이겠군.
라는 짜릿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노련한 작가님이 나의 맛이 간 표정을 바로 눈치채고 채찍을 날린다.
작가 : 기자님!! 곧 주방으로 화면 넘어올 거예요. 준비한 자기소개 바로 하세요!
근병 : 우어?
공장장 : 요리하는 기자 김정수 씨가 지금 부엌에 가 있습니다. 화면을 잠깐만 띄워주세요.
PD : (인사해주세요!!)
근병 : 아...안녕하세요오오 저..
공장장 : 인사까진 필요없어요 으하하
근병 : 우오어어?
참고로 대본에 있던 근병의 자기소개.
"금요미식회에서 요리를 맡게 된 딴지일보 기자 김정수 입니다. 근육병아리라는 필명으로 요리와 식재료에 관련된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맛있게 해보겠습니다."
공장장 : 굴 넣고, 밥 넣고, 볶네...?
황쌤 : 저게 그래도 김정수 기자가... 파 기름 마늘 기름을 내고 말이죠..
공장장 : 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거 같지 않아 보이니까 다시 화면 스튜디오로 돌려주세요. 으하하핳
생방송 많이 맵더라...
유체 이탈 중. 고장난 표정.
작가 : 기자님!!! (정신차려) 이제 요리 마무리하고 가지고 들어가세요!!
근병 : 우어어?
작가 : 들어가면 요리 서빙하고, 바로 7번 의자에 앉아서 토크 이어가면 됩니다!!
근병 : 우어어어...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스튜디오 안에 있는 나. 장갑도 안 벗고 들어감.
공장장 : 수술 장갑 같은 걸 꼈네요? 으하하하하
근병 : 우어어어어...
공장장 : 오마시따. 이거 오일이 무슨 오일입니까?
근병 : (7번 의자를 빼며) 그게 올리브오일...
공장장 : 아 올리브오일~ 자 이제 나가 주세요.
정신 가출.
근병 : (자까님 나 으트케해유으으으)
공장장 : 아니다 좀 앉아계세요. 으하하하. 내가 궁금한 게 있을지 모르니까!
근병 : 우어어어어...
그렇게, 뉴스공장 첫 출연을 무사히(?) 마쳤다.
딴모닝
아침 9시 15분. 이른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인 겸손공장팀을 위한 딴지 주방장님의 스페샬 아침 식사.
류밀희 기자의 겸손 인스타(링크)와 황교익 Epi-Life(링크) 의 뜨거운 취재 경쟁.
윤기 좔좔 방금 한 밥.
고정 메뉴 고기.
호방한 연두부.
총수님은 거들떠보지 않는 양배추 쌈.
담백 구수 된장찌개.
얼떨결에 상석 착석.
총수 : 야 고생했다. 고기 마이 머거.
근병 : 우어어어어어헝헝
덧
황쌤 유튜브 채널 덕분에 캡처로 굴떡국 레시피는 어느 정도 복원되었으나, 생방송의 매운맛에 영혼이 나가 굴볶음밥은 어디에도 기록이 없는 관계로, 전격 복원해 보는 굴볶음밥 레시피.
재료 단출.
기름에 파와 마늘이 잘 녹도록 최대한 잘게 썰어주고,
황쌤이 선물해 준 마지막 훈제 굴은,
그냥 한입에 바로 때려 넣고 싶지만,
꾹 참고, 다져줌. 굴이 절여지면서 질감이 많이 연해져 있으므로 많이 다져지지 않게 주의. 볶는 과정에서 살이 다른 재료들과 부딪혀 마모되므로, 처음부터 너무 잘게 다져지면 이게 굴볶음밥인지, 전복내장죽인지 애매해짐.
굴의 풍미와 양념이 고대로 녹아있는 오일은 마늘 파 기름 베이스로 활용.
오일을 좀 더 추가해서
파와 마늘이 타거나 튀겨지지 않게 중약불에서 서서히 기름을 내준다.
갑자기 그럴싸한 맛있는 냄새가 난다 싶다면, 파와 마늘의 풍미가 기름에 잘 빠져나왔단 이야기. 요때 다진 굴 투입. 잘 볶아주다가,
찬밥 투입.
이미 훈제 굴과 캔 안의 오일에 조미가 충분히 되어 있으므로, 간은 미리 하지 말고 마지막 단계에서 맛을 봐가면서 살살 추가.
바로 이것이,
유체이탈 생방송 굴볶음밥. 흐어어어어.
다음 화
사진/영상 : 금성무스케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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