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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법인에서 내가 하던 일은 심판이었다. 수천조에 달하는 큰돈이 오가는 기업 대출 시장에서, 나의 역할은 돈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올바른 정보가 유통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통해, 경제적으로 먹고살만하고 신분 문제도 해결했으니 나에게는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한 마음보다는 아쉬움이 늘어갔다. 더 늙기 전에 플레이어로서 경기장을 누비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오랜 고민 끝에, 꽤 이름 있는 은행으로 이직하기로 결심했다(아, 참고로 저는 미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새 직업, 대출 포트폴리오 매니저

 

이직 후 은행에서 내가 맡은 직책은 대출 포트폴리오 매니저다. 어떤 직업이든지 타이틀을 영어로 달면 왠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상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하는 일은 욕 받이에 가까웠다.

 

담당하는 대출은 일반 소매 대출 (흔히 지점창구 등을 통해 이뤄지는 대출)이 아닌 기관 대출. 기관 대출은 대출 하나당 금액이 최소 500억에서 수천억이 넘어간다. 나같은 쩌리가 승인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모든 신규 기관 대출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경영진이다. 물론 높으신 분들은 바쁘시다. 그래서 실무자들로 구성된 별도의 투자심의위원회가 존재한다. 

 

고객을 상대하는 RM(영업직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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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aproasia>

 

투자심의위원회에는 여당, 야당, 그리고 욕 받이가 있다. 여기서 ‘여당’은 투자기회를 물어오는 영업직 관리자 (RM, Relationship Manager)를 뜻한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 묘사되는 월가의 뱅커, 금융인들은 대게 이들이다. 언제나 잘 다려진 수트를 차려 입고 (재택근무 중에도 수트를 입는다), 온화한 미소를 간직한 채 교양 있고 유머러스한 화법을 구사한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고객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골프를 치는 것이다. 고객을 상대하다 투자 기회를 얻으면, 곧바로 투자 계획서를 작성해 투자심의위원회의 심사를 받는다. 투자심의위원회의 최종 승인을 얻은 이들(RM)은 두둑한 인센티브를 받는다. 투자 승인은 실적이고, 실적은 곧 돈이기에, 당연히 영업직 관리자(RM)들은 자신이 물어온 투자계획을 승인받는 것에 필사적이다.

 

잘못된 투자를 막는 CO(신용 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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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심의위원회에는 ‘야당’이라 불리는 신용 담당관 (Credit Officer)도 있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투자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사전에 발견하여, 잘못된 투자가 이뤄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있다. 여담으로, 우리은행의 최고 신용담당관은,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 발생 2년 전부터 모든 담보대출관련 상품과 손절한 걸로 유명하다. CEO가 직접 나서서 모기지 상품 대출을 해주라고 압박을 넣자, 사표를 던지고 장기 휴가를 떠나버렸다. 이렇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념을 가지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수한 신용담당관이 된다.

 

신용 담당관은 태생적으로 반골이다. 영업직 관리자(RM)가 투자심의위원회로 계획서를 제출하면, 신용 담당관들은 일단 무조건 반대하고 본다. 어떤 경우에 손실이 발생하고, 왜 이 투자를 해서는 안 되는지 조목조목 기록한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신용 담당관들은 손실이 얼마나 적게 발생했는지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받는다. 최종적으로 투자 계획에 동의하더라도, 반대했다는 기록을 남겨놔야 실제로 손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덜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욕받이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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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월스트리트>

 

투자심의위원회가 개최되면, 여당 (RM)은 무조건 찬성하고, 야당 (신용담당관)은 무조건 반대한다. 서로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보니, 회의는 엉망진창이되기 일수다.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여당과 야당은 존나 싸운다. 싸우다가 감정이 격해져 고성이 오가고, 회의 중간에 정치질을 해서 암투를 벌이기도 한다. 물론, 이 싸움은 경영진에 의해 철저히 의도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욕 받이’ 로서 나의 역할이 시작된다. 꼭 해야 하는 투자라고 판단되면, 나는 여당을 도와 투자계획서를 보강해나간다 (내가 직접 작성할 때도 있다). 내가 관리하는 다른 자산들에 비해 이 투자가 얼마나 매력적인 기회인지, 현 시장 상황에 미뤄봤을 때 야당의 반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설득해 나간다. 

 

이렇게 여당 편을 들면 야당인 신용담당관들에게 욕을 먹고, 그에 대한 반박 자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투자라고 판단이 되면 싸움에서 빠져 있거나 야당 편을 든다. 이러면 여당으로부터 쌍욕을 처먹게 되지만, 어쩔수없다. 

 

내가 받는 인센티브는 내가 관리하는 포트폴리오의 규모에 비례하고, 그 포트폴리오에서 발생한 손실에 반비례한다. 투자가 늘어날수록, 내가 관리하는 포트폴리오의 규모가 커지고 이에 따른 인센티브도 늘기 때문에 신규 투자는 기본적으로 내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관리하는 자산에서 손실이 많이 발생할수록 내가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는 기하급수적으로 깎인다.

 

포트폴리오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업무적으로 엄청난 지옥을 맛보게 된다. 임원들에게 불려 다니면서 상황을 브리핑하고, 어떻게 손실을 최소화할 것인지를 주제로 법무팀, 청산 전문팀과 마라톤 회의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군대에서 공포탄을 오발사하거나 장비를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욕을 처먹는다. 회의가 끝나면, 정신이 너덜너덜해져서 인센티브고 뭐고 다 필요 없는 상태가 된다.

 

밖에서 봤던 포트폴리오 매니저라는 직업은 기업 대출 시장의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구단의 프런트나 지원 관리팀 역할이었다. 기업 대출 시장이라는 거대한 판에서 실제로 큰돈을 움직이는 것은 사모펀드들이었다.

 

주류에서 밀려난 '은행 대출'

 

과거의 기업 대출은 대부분 은행을 통해 이뤄졌다. 은행은 예금자로부터 예금을 받아다가, 돈이 필요한 기업에 대출해주는 중계기관이다.  

 

은행 입장에서 봤을 때, 예금은 원재료이고 대출은 예금을 가공하여 만든 상품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겪으면서, 은행에는 방대한 자본관리규제가 도입되었다. 은행이 더 많은 원재료 (예금)을 사용하게 해서 더 적은 상품 (대출)을 팔게 만드는 것이 이 규제의 핵심이다. 

 

은행이 기업에 새로운 대출을 해주기 위해서는,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대비해 많은 충당금을 쌓아둬야 한다. 충당금으로 더 많은 예금을 묶어야 할수록, 대출에 소모되는 은행의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은행은 점점 기업 대출을 해주기 어려워졌고, 결국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사모펀드 대출'을 찾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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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춘코리아>

 

그에 반해, 사모펀드는 이러한 자본 관리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 이들은 일반 고객들로부터 예금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규제당국 눈치를 보지 않고 시원하게 대출을 해줄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기업 대출 시장이 수천조로 늘어난 것은, 사모펀드들이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모펀드들이 대출에 사용하는 자금은 어디서 나올까?

 

사모펀드가 굴리는 돈의 상당 부분은 국부펀드나 연기금과 같은 큰손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늘어나는 기업 대출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상당 부분의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빌린다. 놀랍게도, 은행이 기업에 직접 대출해주는데 적용되는 이자율보다, 사모펀드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기업에게 돈을 빌려줄 때 적용되는 이자율이 훨씬 싸다. 은행이 기업에 직접 대출을 해주려면 온갖 자본 규정의 제재를 받지만, 사모펀드가 은행에서 받아온 자금을 기업에 대출을 해주면 규제를 피할 수 있다. 

 

그 결과, 몇 년 전부터 비은행금융기관(NBFI)에 의한 기업 대출이 은행에 의한 대출 규모를 넘어서는 일이 발생했다.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은행 대출 규제를 엄격하게 관리하려다가 오히려 사모펀드를 통한 야매 대출이 늘어났다.

 

미국의 금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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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토마토>

 

나도 은행에서 사모펀드에 대출해주는 일을 한다. 사모펀드는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을, 다시 기업에다가 대출해줘서 돈을 번다. 실질적으로 큰돈을 움직이고, 멋진 인수합병 거래나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설계하는 것은 사모펀드다. 내가 하는 일은 사모펀드 뒤에서 (구단 프런트 직원처럼), 인수합병에 소모되는 자금의 일부를 대거나 관리하는 정도다. 지난 1년간, 은행에서 쩌리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 덕에 급격한 경기 변화를 1열에서 직관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그러니까 2022년 1월 기준금리는 0%였다. 이때 우리 팀의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하면 큰 금액의 대출을 빨리 찍어낼 수 있을까였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 은행들의 예금은 무려 5천조가량 늘어났고, 늘어난 예금의 대부분은 사실 연준의 자금이었다. 코로나 기간, 자금시장이 경직될 모습을 보이자 연준이 은행들에 막대한 예금을 꽂아 대출해줄 수 있도록 등을 떠민 것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창고에 원자재 (예금)가 썩어날 만큼 늘어난 셈이다. 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익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늘어난 예금을 빨리 판매(대출)해야 했다. 당시 은행의 RM (영업 관리자)들은 매일같이 고객을 찾아가, 돈 좀 가져가 달라고 영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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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BC>

 

그러다 작년 3월부터, 연준은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올리기 시작한다. 이러다 말겠지 싶었지만, 금리가 0.5%, 0.75%씩 계속 오르더니 0%였던 기준금리는 이제 4.75%가 되어버렸다. 일찍이 눈치챈 메이저 은행들은 대출 최대 확장에서 신규 대출 발행 금지로 태세를 전환했다. 연초에 열심히 명함을 뿌리던 영업관리자들은, 내부규정 (신규대출 발행금지)으로 인해 고객사의 연락을 받지 않고 아직 잠수 타는 중이다(2023년 들어, 이전보다 자금 사정이 다소 나아지긴 했다).

 

아. 금리가 오르는데 왜 대출을 안 해 주냐고? 금리가 오르면, 늘어난 이자소득을 노린 은행들은 대출을 더 많이 해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금리 인상기에는 내부적으로 야당(신용담당관)의 목소리가 커지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신규대출을 늘리기보다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현금 유보금을 쌓아두려고한다.

 

게다가, 대출을 발행하는데 꼭 필요한 예금은 계속해서 줄고 있다. 연준이 코로나 시기에 마구 찍어냈던 유동성을 거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양적완화 축소 금액은 하루 수십조에 달한다). 아무리 대출로 인해 거두는 수익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에필요한 원재료(예금)가 부족해지면 은행은 대출을 해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은행쪽의 자금조달은 사실상 올스톱상태이다.

 

내가 담당하던 포트폴리오 기업들은, 연초 대비 두 세배 오른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씩 결딴나는 중이다. 내가 모시는 상사는 이로 인해 작년 한 해 동안만, CEO로부터 전화 세 통, 이사회 소환 1회의를 달성했다. 상사의 흰머리가 늘어날수록, 내가 해야할 업무도 부쩍 늘어남은 물론이다.

 

일단 오늘은 세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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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토마토(링크)>

 

다행히 우리 팀에는 기적이 일어났다. 난타당하고도 적시타를 허용하지 않아 이닝을 뽀록으로 마친 구원투수처럼 한 해를 무사히 넘겼다. 또한 내가 일하는 은행은 성과 달성자 모두에게 작년에 약속한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격무가 늘어나 퇴사 의욕이 마구 샘솟던 중, 금융치료도 완료된 상태다.

 

다만 그와 동시에, 불경기를 이유로 전체 인력의 10%에 달하는 직원을 해고했다. 해고대상자들에게는 달랑 2개월 치의 급여만이 지급되었다. 한쪽에서는 돈을 뿌리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을 쳐내는 게 미국 은행의 현실이다. 과연 내가 이 회사에 몇 년이나 더 붙어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저 큰 손실이 발생하지 않아, 달달한 인센티브나 몇 번 더 타 먹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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