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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장잔고 20만 원

 

28살 1월의 나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정의하는 삶의 궤도를 이탈한 지 오래였다.

 

스펙: 직업, 없음. 대학 졸업장, 없음.

경력: 몇 개의 사업 경험 +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생활 1년 6개월.

 

‘멀쩡한' 삶을 사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과 멀어진 지 너무 오래된 상태였다. 남들이 살아가는 그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거라는 걸 분명히 안다. 그런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 큰 힘이 되고 기적을 만들 수도 있을 거다. 다만 그 ‘어떤 사람’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 분명할 뿐.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28살에 재수라도 해서 그럴싸한 학교에 간다고 한들 졸업할 때쯤엔 나와 함께 일해야 할 선배들보다 나이가 훌쩍 많아진다. 제때 멀쩡한 학교를 졸업해도 취업하기 힘든 판에, 사수보다 나이 많은 신입을 뽑을 회사가 몇 군데나 있을까? 취업을 한다 해도 남들이 차를 사고 경기도 소형 아파트나마 살 수 있을 때쯤, 등록금 대출을 겨우 갚고 있겠지. 다시 ‘정상'의 궤도에 발버둥 쳐 합류한다 해도 남들보다 한참 늦어버린, 기회비용이 너무 거대한 상태. 보통의 삶에서 이탈한다는 건 그런 거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선택하지 않았던 그 길과의 거리는 복리처럼 불어나 나중에 뒤돌아보면 손에 닿을 수 있었던 지극히 평범한 삶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아득했다. 그러나 이 삶은 어디까지나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그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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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커뮤니티 20대가 말하는 평범한 삶의 기준

출처-<링크>

 

통장 잔고 20만 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뱅킹 앱에서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직장도 없고, 부모에게 물려받을 사업도 없고, 번듯한 대학 간판도 없는데 이제는 돈도 없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전 재산이 20만 원인 히키코모리 고졸 백수였다. 전두환의 생전 공식 통장 잔고(29만 원)보다 내 통장 잔고가 더 적다니. 너무 충격적이라 잠깐은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더 문제는 이 상황이 될 때까지 내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쩌다 내 삶이 이렇게 됐나. 죽음을 앞둔 것도 아닌데 지난 삶이 빨리 감기한 영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역설적으로 내 통장에 20만 원만 남은 이유는 고졸이거나 멀쩡한 직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않은 선택을 과감히 저지르고 성과를 냈던 경험에서 오는 우월감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 갖고 있던 자신감은 오히려 내 멘탈을 약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장에 수천만 원을 쓰고도 고작 월 200만 원 버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큰돈도 벌어봤고, 사업을 하며 크고 작은 성공을 수없이 겪어봤지만 정작 인생의 위기 앞에서 단단해지는 연습은 하지 못했다.

 

대학입시를 거부했지만 한 번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헤르만 헤세를 만난 후 1,0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틈틈이 기록을 남겼다. 10대 시절부터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 그들을 도우며 수많은 사회운동과 봉사활동을 주도했다.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해당 주제로 블로그를 오래 운영했었는데 그러던 중 어느 정권 때는 엉뚱하게도 사복 경찰에게 수사받으며 사상검증을 당하기도 했다. 군 제대 후에는 사업에 뛰어들어 한때는 한 달에 수천만 원의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다 진심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업 동료가 돈을 빌리고 잠적해 모든 것을 잃었다.

 

8천만 원.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의 액수. 하지만 그 돈의 액수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잃은 돈은 8천만 원이었지만 지금까지 내 모든 것을 걸었던 사업과 그 사업 앞에 펼쳐진 수많은 프로젝트와 기회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많은 돈을 벌고 있었기에 사실 그 돈을 잃었다고 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인생을 걸었던 사업을 잃은 것은 도저히 극복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큰 상처였다. 그때 내 안의 무언가가 망가져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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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봉준호·미셸 공드리·레오스 카락스 영화 '도쿄!'> 

 

그 후 1년 6개월 넘게 내 방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연애도 하지 않았고 그럴싸한 수익 창출 활동도 하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집에 처박히던 무렵 내 통장에는 2,000만 원이 있었는데 그 돈을 쓰기만 하며 그저 살아있기 위해 살아갔다. 그러나 통장 잔고 2,000만 원이 20만 원이 된 걸 본 순간, 오랫동안 내 몸을 떠나있었던 정신머리가 되돌아왔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스물여섯이던 나는 스물여덟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업가라는 직함을 포함해 내가 이룬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잊혔다. 고졸이라는 학력은 도전정신의 증거가 아닌 결함이 되었다. 지독한 허기를 채우듯 게걸스레 읽어댔던 수많은 책의 어떤 구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원점(제로 베이스). 너무나 가진 것이 없고, 텅 비어버려 오히려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것이 새롭고 위험한 신생아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돈이었다. 돈이 다가 아니었지만 결국은 돈이었다.

 

잃어버렸던 8천만 원만 온전히 내 힘으로 다시 벌어보자. 그리고 사업이든 장사든 다시 도전해 보자.


그렇게 나는 여러 고민 끝에 택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 택배 일할 건데 왜요?

 

택배 일에 대해 생각할 때 처음으로 떠올랐던 건 이십 대 초반에 만났던 전 여자친구다. 그 친구는 집에 돈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비싼 악기를 전공으로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예술대학 중 한 곳을 다니고 있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 직업이 바로 택배 기사였다. 이미 지나간 인연의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친구에게 아버지는 극복하기 힘든 열등감이고 상처였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택배 일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쉽게 무시당하곤 하는 육체노동인 한 편, 딸에게 비싼 악기와 레슨비를 지원하며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돈을 버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장 없이 가장 빨리 잃었던 8천만 원을 벌 수 있는 합법적인 일. 그런 일이 무엇인가 고민할 때 가장 먼저 택배가 떠오른 건 그 친구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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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김명진 기자/한겨레> 

 

두 번째로 떠올랐던 건 뭘 하며 돈을 벌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있던 어느 저녁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택배기사다.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택배기사로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표정이 참 여유롭고 좋아 보여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택배 일 어때요?"

 

어떻게 생각하면 무례하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이 질문에 그는 시원스레 이렇게 답해주었다.

 

"진작 안 한 게 후회돼요."

 

바로 이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도 모르게 급히 되물었다.

 

"왜요?"

 

"그게, 생각보다 벌이가 좋더라고요. 힘들긴 한데 다른 일에 비해 들이는 시간 대비 돈을 많이 벌어요."

 

막연히 돈이 되는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이건 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때부터 택배 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나 택배 일할 거야.’

 

우선 주변에 선언부터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결심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반응들이 돌아왔다.

 

"택배와 관련된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거야?"

 

친구들을 만난 날, 택배 일을 하겠다고 하자 한 친구가 이렇게 물어왔다.

 

"아니, 그냥 택배 일할 건데?"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내 친구들은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택배 일이라는 게 대체 뭘 말하는 거야? 무슨 사업인데?

 

"아, 그냥 ‘택배 일’, 사업 같은 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물건 사면 갖다주는 그거!"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겨우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내 말뜻이 무언인지 깨닫는 그 순간 친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창백해졌다.

 

"… 택배 기사?"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오는 한 친구에게 더 이상 말할 의지도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다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런 일을 하려는 거야?"

 

"제정신이야?"

 

"너 정말 사업이 제대로 망하긴 했구나?"

 

조롱하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이렇게 물어오는 친구도 있었다.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내가 무슨 외계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친구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라왔고 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을 진지한 업으로 삼는다는 건 그들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 부모님에게 반항하고자 재미로 한두 달 한다면 모를까, 직업으로 삼는 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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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나의 경제적 상황과 배경은 친구들 것과는 아주 달랐다. 뜬금없고 조금은 민망한 고백이지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중산층으로 보이는 가정에서 자랐다. 소위 ‘강남 8학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강남 사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 때문인지 ‘잘 사는 집 아이'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 집은 잘사는 집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우리 집보다 훨씬 잘 산다는 건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조건과 배경으로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는, 최소한의 예의와 교양을 지키는 분위기. 흔히 ‘강남 8학군에는 왕따가 없다’는 속설을 뒷받침하는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나와 내 친구들의 경제적 격차는 어린 시절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느 집에나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정이 있고, 우리 집도 다르지 않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는 주식투자로 전 재산을 날렸다. 그 일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그때 너무 어렸던 터라 알 수 없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친가로 보내져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다 자라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는 마치 남의 집에 입양된 것처럼 한동안은 모든 게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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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코노믹 리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집은 항상 자산보다 빚이 더 많았고 스무 살 무렵까지도 가족 네 명이 15평도 안 되는 낡은 상가주택에 살았다. 고등학교 때는 집을 뛰쳐나가 고시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다. 그때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처음 해봤다. 군 제대 후에는 스피닝과 운동 강사를 했으며 이후 무자본 창업을 하여 최저시급도 못 벌 때도 있었지만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일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게는 항상 돌아갈 집이 있었고, 정말 길거리에 나앉을 상황이라면 내게 손을 내밀어 줄 가족들이 있었다. 아무리 독립적인 인간이고, 혼자 잘 살아왔어도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이제는 내가 가족의 그늘이 되어주어야 한다. 많은 힘듦이 예상되지만 그런 고민할 여유도 없다. 나처럼 대학 입시에 편승하지 않은, 취업률을 포함한 청년 통계의 가장 어두운 부분마다 위치한 궤도 밖 인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친구들이 경악스럽다는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택배 일이 하루빨리 하고 싶어졌다. 그들이 밑바닥으로 여기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그 자리에서 오로지 내 몸과 내 정신력으로 땀 흘려 돈을 벌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1년 반이라는 인생의 공백기에 영원히 멈춰있게 될 것만 같았다.

 

정말 절실히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