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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바 시작 前(전)

 

일을 시작하기 위해 검색을 통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알아봤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초기 자본이 꽤 드는 일이라는 걸 이때 알게 되었다. 우선 운전면허와 화물운송종사 자격증이 필요했고, 택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차가 필요했다. 운전면허는 있고, 화물운송종사 자격증은 필기시험만 치르면 딸 수 있어서 큰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차였다. 택배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큰 트럭은 새것으로 구입하면 2,400만 원. 중고차 시세도 최소가 800만 원이었다. 

 

새 차를 구입할 자금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새 차는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마침 코로나 시국이라 택배 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았고, 차를 받기 위한 기본 대기 기간만 최소 4개월이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시작하려면 중고차를 사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중고차를 살 수 있는 800만 원이 없었다는 점이다.

 

차를 사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뭐라도 해야 했다. 매일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지며 할 만한 아르바이트를 찾아보았다. 

 

여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때는 코로나가 정점을 찍은 2020년,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자영업자라고 해서 사정은 다르지 않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 시장에 모조리 몰리면서, 주변 편의점이나 카페 아르바이트 같은 최저 시급 일자리조차 경쟁률이 10 대 1을 넘어가는 지경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아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터,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한창 직장에서 경력을 쌓고 있을 이십 대 후반의 '늙은' 청년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상황이었다면 어리고 만만하다는 장점이나마 있었겠지만 20대 후반은 아르바이트로 채용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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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게티이미지뱅크>

 

고심 끝에 지원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자리는 커피를 로스팅하는 아르바이트였다. 역시나 최저시급의 아르바이트였지만 무슨 대기업 정규직 채용도 아니면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면접을 동반하는 자리였다. 그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기소개서 양식도 따로 있었다. 아르바이트 하나 하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계속 손가락만 빨면서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중고찻값은 일부 빌린다고 해도 일단 택배 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돈벌이는 필요했다. 절실함을 담아 자기소개서를 썼다. 1년 6개월을 쉬었다.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다. 나 좀 살려줘라, 하는 심정이었다.

 

월 백만 원대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얻고자 쓰는 자기소개서가 천만 원짜리 코인 백서를 쓰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한때 큰돈을 만져봤고 대표님 소리도 들어봤으나 그런 것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르바이트 인력은 노동시장에서 가장 싼 값에 쉽게 살 수 있는 상품이다. 그마저도 공급에 비해 수요가 턱없이 적었다. 자기소개서를 길고 자세하게 적는 게 도움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거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정성을 담아 써냈다.

 

이력서를 넣고 잊어버리고 있던 터에 면접 날은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다. 면접 당일.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면접 장소에 갔다. 면접관은 30대 중후반의 친근한 형이었다. 그에게도 사업 경험이 있었다. 자기소개서의 내 사업 얘기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동네 친구와 수다 떨듯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훅 갔다.

 

"면접 보러 오시는 분이 스무 분 정도 있어요."

 

면접이 끝날 무렵 이 말을 들었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첫 면접자였다 해도 나머지 면접자가 열아홉 명인 셈이다. 고작 한 명 뽑는 자리에 스무 명의 지원자라니.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헛걸음한 게 아닌가. 면접까지 보러 올 정도면 나머지 열아홉 명도 일할 의지가 있다는 걸 텐데 교통비도 주지 않고 간만 보다니. 이게 무슨 악취미인가 싶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그냥 수다나 떨다 집에 가자'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집도 가깝겠다, 자기소개서 썼던 것은 다른 아르바이트 지원할 때 활용하면 되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최선을 다해 내 절실함을 어필하기는 했지만, 면접이 끝난 뒤에는 아무런 기대 없이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 이틀 뒤였나. 면접 본 것도 잊어버릴 때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최종 합격이에요.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는데, 기대하지 않았다 보니 믿기지 않았다.

 

"제가 된 건가요?"

 

두어 번 되묻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합격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가장 절실해서 합격한 건가?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20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뽑힌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고작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였지만 내게는 1년 반이 넘는 공백기를 깨준 소중한 기회였다.

 

2. 알바 시작 後(후)

 

아르바이트는 12가지가 넘는 스페셜티 원두를 레시피에 맞게 정확한 용량으로 배합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볶는 일이다. 일련의 정해진 행위가 반복되는 단순 작업이었지만 매번 새로운 정성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원두는 까다롭고 연약해서 조금만 습하거나 건조해도, 약간의 온도 차이에도 쉽게 변질해 버렸다. 마치 사람 마음 같았다.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면 본래의 향과 맛을 잃고 변해버린다는 점에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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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의 칩거 생활 전, 나는 밝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내게 닿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뢰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돈도 사업도 다 잃은 뒤 경계심 가득한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변해버린 마음이 나도 낯설어 자꾸만 숨고 싶었다.

 

"이건 못 쓰겠네. 다시 만들어봐요."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불 조절을 잘못해 처음 원두를 태웠을 때, 커피를 테스팅 한 매니저는 로스팅한 원두를 모두 버리게 했다. 아까웠지만 시키는 대로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막상 매캐하고 짙은 향을 뿜으며 쓰레기통으로 굴러 들어가는 원두를 보니 아깝기보다는 후련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다 마침내 재만 남은 분노와 슬픔도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살다 보면 원두를 태울 때가 있고, 오래된 원두는 오래된 원두대로 방향제 역할로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태운 원두는 방법이 없다. 아깝다고 붙잡고 있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버려버리고 새 원두를 다시 로스팅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 당시 내 마음도 그랬다.

 

로스팅 아르바이트는 내 마음을 새로 만드는 준비단계였다. 테헤란로에서 양복 입은 돈 귀신 수백 명과 부딪치며 오염된 노동에 관한 감각은 20대 초반의 한참 어린 아르바이트 선배님들과 함께하는 단순노동으로 기초부터 다시 만들어졌다. 돈이면 부모 간도 빼먹을, 서로를 속고 속이다 못해 바늘구멍으로 블랙홀을 팔아먹던 그 세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단순히 내 몸을 움직여 노동의 대가를 받는 담백한 기쁨이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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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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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 전경

출처-<강남구청>

 

사람들과 건전한 관계를 쌓아나가는 것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같이 일하던 매니저와는 친한 형 동생 사이가 되어 아직도 연락을 이어 나가고 있다. 부지런히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20대 초반 동료들의 성실한 모습도 건강한 자극이었다.

 

"희우는 일을 항상 찾아서 하네. 정말 부지런해."

 

"희우가 있으면 주변이 저절로 깨끗해져서 좋아."

 

칩거 생활하는 동안 스스로 '강박'이라 여기던 주변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습관도 여기서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월급은 적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있어 사소한 것으로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조금이지만 사람 좋아하고 활발하던 예전 내 모습을 되찾았다.

 

3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트럭을 살 돈을 다 모으지는 못했다. 근무 시간이 하루 4시간이다 보니 월급이 턱없이 적었다. 월 55만 원 정도의 최저임금 월급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 한 푼도 쓰지 않아도 돈이 거의 모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할수록 돈이 되는 택배 일을 해야겠다는 갈증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월급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하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 칩거 생활 중의 나였다면 자존심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을, 단 한 가지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