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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편집부 기자로 일했던 시절이 있었다.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딴지 필진 수십 명이 쓴 글을 매일 편집하는 것이었다. 그중에 전직 딴지일보 편집부 기자 필독의 글도 있었다. 필독도 딴지 기자였고 홀짝도 딴지 기자였지만 함께 일해본 적은 없다. 그의 퇴사로 만들어진 자리에 내가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제대로 말을 나누어 본 기억은 전혀 없다. 가끔 사무실에 놀러 와 죽지않는돌고래(당시엔 부편집장)을 괴롭히는 걸 옆에서 보기만 했을 뿐이다. 

 

딴지 필진 수십 명의 글 수백 편을 편집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저절로 딴지 필진 색인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당시 활동했던 주요 필진의 필명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전문 분야, 글의 스타일, 편집할 때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따위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필독을 떠올려본다.

  

글쟁이.

재밌음.

건드릴 것 없음.

 

그 필독 ‘홍대선’을 그의 저서 <유신 그리고 유신>과 함께 충정로 벙커1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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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마자 고뇌하는 척하는 필독

 

 

‘우리(한국인)는 누구’인지 파헤치려 한다

 

홀짝(이하 ‘홀’) :  요새 뭐 하고 지냈나?

 

필독(이하 ‘필’) : 책을 썼다. 책을 썼고,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홀 : 지금도 쓰고 있나? 다음 거를?

 

필 : 이번에 나온 <유신 그리고 유신>은 일종의 내 라이프 워크(생의 과업)다. 라이프 워크는 뭐냐 하면 ‘한국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게 내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주제인데, <유신 그리고 유신>은 가제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을 쓰기 위한 과정에서 쓴 책이다. 

 

홀 : <유신 그리고 유신>은 그 프로젝트의 프롤로그 같은 거라고 봐야 하나?

 

필 : 프롤로그라기보다는 번외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빠질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인의 얘기를 할 때 항상 거기서 발생하는 미싱 링크가 있다. 가령 ‘우리나라 산업화는 왜 그런 형태였나?’, ‘박정희는 왜 그런 선택을 했나?’, ‘김재규는 왜 그랬나?’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이 없이 한국 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는데, 이걸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갑자기 눈 떠보니까 선진국 됐지?’ 이게 또 설명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그 미싱 링크를 미리 채워 넣기 위한 작업으로 <유신 그리고 유신>을 먼저 쓰게 된 거다. 그다음에 가제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을 계획하고 있고, 이어서 <한국인의 형태>라는 책을 쓸 생각이다.

 

‘우리는 누구인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주제인 만큼 그걸 채우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써 쓴 책이 <유신 그리고 유신>인 거다. 그래서 이 책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홀 : ‘한국인은 왜 이렇게 생겨 먹었나’라는 주제는 유신 없이 설명이 안 된다?

 

필 : 유신이 없어도 설명은 가능한데 유신 얘기를 해야지 미싱 링크가 채워진다는 거지. 고리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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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리 말이야, 고리... 이젠 알겠지?

 

<유신 그리고 유신>은 유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관념으로 보고 그 탄생에서부터 소멸까지의 일대기를 다루는 책이다. 책 뒷면의 소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유신의 생성과 폭주, 부활과 소멸의 150년을 추적한 대서사시”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에서 탄생한 유신은 태평양 전쟁 패망으로 한 번 죽었다가 박정희에 의해 한국에서 부활, 결국 김재규의 손에 의해 소멸됐다는 것.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레귤레이션이다’라고 말하는 검사 가카가 나라를 주무르는 시국 때문인지 몰라도 ‘라이프 워크’에 ‘미싱 링크’가 갑툭튀한 관계로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저자 필독의 생의 과업(라이프 워크)이라 할 만한 하나의 커다란 주제는 ‘우리(한국인)는 누구인가?’인데 이걸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미싱 링크)를 찾아야 한다. ‘산업화와 박정희, 그리고 김재규’에 대한 설명이 그 연결 고리다. 

 

 

유신 지사(志士), 알맹이 없이 멋에만 목숨을 건 자들

 

홀 : 책을 읽다 보면 ‘나 그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너네 오해하지 마라 이거. 이거 얘네가 지금 멋있다는 거 아니야’ 중간중간 이렇게 선은 긋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따라 읽다 보면 한 편 요만큼은 ‘이거(지사) 멋있잖아’ 하게 된다.

 

필 : 그거는 맞다. 멋있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러냐면 그 사람들의 가치는 윤리적 가치가 아니라 미학적 가치잖아. 미학적 가치를 추종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멋은 갖고 죽는다. 멋은 분명히 있는데 멋만 있다는 사실. 그 미학이 윤리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출판사 편집자도 나한테 물어봤다. “왜 이렇게 멋있게 그리셨나요?”

 

홀 : 그러니까.

 

필 : 내 대답은 “멋있게 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 멋있다.” 왜 멋있냐, 이 사람들은 멋만 추구했거든.

 

홀 : 그래서 그렇게 (유신 지사가 등장하는)만화가 많이 나오나 보다. 멋들어져서.

 

필 : 일본이 멋있게는 잘 그려. 메이지 유신 시절의 멋있는 부분을 캐치해서 사무라이의 멋있는 모습, 멋있는 액션을 잘 그린다. 근데 ‘무엇을 위한 멋인가?’에 그 무엇이 없어. 그냥 멋있고 말아. 왜? 미학이 전부이기 때문에. 

 

철학의 커다란 몸통이 윤리학이거든. 존재론, 윤리학, 미학이잖아. 그중에 가장 중요한 몸통이라고 하는 게 윤리학인데 윤리학이 없다. 난 아직도 <원피스>의 해적, 루피 무리가 왜 자꾸 그러고 다니는지 모르겠거든. 걔네 뭐 하는 거야? 걔네 그냥 사람 패고 다니는 거다. 꿈을 위해서, 그 꿈은 멋있으니까. 뭘 위해서? 그냥 자기들이 보물 찾는 거잖아. 도둑질. 그게 멋있기 때문에 자꾸 멋만으로 ‘내 친구가 돼라’ 이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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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악수 청하면서 말이야

내 친구가 돼라.”

 

홀 : 나쁜 짓을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건데 그 과정이 간지나니까. 지들끼리.

 

필 : 그것만 있는 거지. 그게  유신 지사들의 문제점이다. 일본의 유신지사들이 그렇게 본인의 가치를 위해서 죽는 거, 목표를 위해서 죽는 건데 죽고 죽이면서 이 모든 것들이 ‘멋이 있다’라고 생각을 하잖아. 멋이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편 지사도 존경하게 되는 거야. 왜? 똑같이 멋있으니까. 적도 멋있을 수 있잖나.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익현이나 안중근 같은 인물을 포로를 잡아놓고 괴롭히려고 보니까, (최익현, 안중근이) 보통 남자들은 아니잖아.  너무 멋있는 거야 사람이. 그럼 또 엄청 존경하는 거지.

 

홀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 감옥에서 간수했던 사람이라든가.

 

필 : 치바 도시치.

 

홀 : 최익현을 감시했던 사람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어떤 지사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어찌 보면 그냥 소시민들 가운데 일부일 수도 있는 거잖아. 이렇게 아주 말단까지 유신의 관념이 뿌리내린 거라고 봐야 하는 건가? 전체 일본인에 그만큼 강한 영향을 끼쳤다?

 

필 : 당연하지. 현대 일본인도 그 지사적인 멋에 심취해서 만화를 그리잖아. 당연히 (당시 일본인들도) 그랬을 거라고 보고. 

 

당시에 최익현은 전형적인, 그냥 타협을 모르는 조선 선비야. 이 사람은 공자 왈, 맹자 왈을 공부해서 과거 급제 한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 같은 경우에도 무반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힌 사람이고. 두 사람 다 조선의 양반으로서 애국한 거거든. 조선인으로서, 의인으로서, 의사로서, 둘 다 의병장이지. 의병이 뭔데? ‘내가 의병장이다’ 그러면 적은 불의한 놈들이라는 뜻이다. 

 

근데 지사는 아군과 적을 나눌 때 ‘나는 나의 뜻이 있고, 적도 지들의 뜻이 있어’ 하면서 뜻이 있다는 거를 존중하면 지사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안중근은 일본 사람들한테 존경받을 생각이 없는데 일본 애들이 존경하는 거야. ‘저 사람 멋있다’ 정말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토 히로부미 각하를 죽였지만 근데 보아하니 이 남자가 생긴 것도 잘생기고, 서예도 잘 쓰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멋있거든. 그 멋을 인정하는 거야. 이 사람들이.

 

홀 : 이게 윤리적 알맹이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필 : 그렇지. 윤리는 옳은 나와 옳지 못한 적이라고 하는 피아를 나눈다. 얘들은 윤리가 없는 거다. 이 윤리 없음이, 참 이게 힘을 발휘할 때는 무섭게 발휘하지. 러일 전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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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우리 홀짝이가 이해를 해가네 (흡족)

 

‘윤리 없음’이라는 유신의 관념이 러일 전쟁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는 직접 책으로 확인하는 걸로 하자. 본인이 인터뷰 중에도 잘 설명해주긴 했는데, 너무 다 보여주다간 자칫 저자 스스로 스포의 가해자가 될 것 같다.

 

지사(志士)라고 하면 말 그대로 뜻이 있는 사람(선비)을 의미한다. 애국지사는 애국에 뜻이 있는 사람인 거고, 유신 지사는 유신에 뜻이 있는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 시대의 유신 지사는 대부분 칼을 찬 사무라이였는데 그 직업적(?) 특성상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에 상시 노출되어 있었다. 자신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게 인간이 낼 수 있는 멋의 극한에 가깝기는 하다. 

 

그런데 필독이 쓴 <유신 그리고 유신>을 보면 유신 지사들이 추구하는 멋은 어딘가 이상하다.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에서 어디까지나 목적은 뜻에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왠지 목숨을 바치는 행위 자체에 꽂힌 느낌이랄까. 메이지 유신 시대의 유신 지사들까지는 그나마 이해할만한 구석이 없지 않은데 이후 유신의 관념을 이어받아 일본이라는 국가 전체를 전쟁의 폭주 기관차로 만들어간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 ‘어떻게 이런 도라이들이 찬 똥볼이 한 국가를 넘어 월드클라스급 파괴력을 만들었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유신, 자기 파멸의 운명

 

홀 : 유신이 자기 파괴로 치닫게 되는 건 유신의 관념을 품은 사람들에게서 예외 없이 발견되는 속성이라고 봐야 할까?

 

필 : ‘나는 꼭 죽어야 해!’ 이런 지사는 없겠지만 ‘죽어도 상관없어’라고 하는 것들이 모여서 유신은 자기 파멸적인 게 되는 거지.

 

홀 : 그 에너지가 모여서?

 

필 : 그렇지. 그 에너지가 모이면 어떻게 되냐.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전 일본의 국방연구소에서 도죠 히데키(총리대신)한테 ‘진주만 공습하면 우리가 무조건 지는데요’라고 보고를 했다. 이거 몇 번이나 워(war)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인데, 심지어 당시 세계에서 워게임을 가장 잘 돌리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워게임 몇 번을 돌려봐도 일본이 지는 걸로 나와. 그런데도 진주만을 때렸다.

 

홀 : 그건 앞선 성공의 경험(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때문인 요인이 더 큰 건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런 행운조차 우리한테 오지 않을 거지만 가야만 했던 건가.

 

필 : 둘 다. 근데 진주만에서 만약에 성공했다 쳐. 진주만 성공해서 만약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이겼다 치자고. 그래도 일본이 미국에 멸망 당하는 건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생산력이 당시 일본의 12배였는데.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직진하면서 계속해서 어떤 살육과 폭력을 일으키는 괴수로서 나는 유신을 본 거다. 그러한 유신이 몸집을 가장 키우고 가장 그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박정희라든지, 김재규라든지 조선의 선비라고 하기보다는 유신 지사에 더 가까운 한국인들이 일제식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던 거고 그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거지. 

 

그렇게 자기 파멸적인 유신은 결국 김재규라고 하는 최후의 지사를 만나서 죽음을 맞는, 어떻게 보면 또 가장 미학적인 방식으로, 이런 말 해도 될까? 뒤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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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 : 메이지 유신 이후에 태평양 전쟁 패전까지 일본이 가는 모습을 비유하면 마치 도박판에서 자기 판 돈을 계속 올인하는 것 같다. 

 

필 : 계속 올인하는 거다.

 

홀 : 그 운명은 결국 언젠가 질 거라는 거.

 

필 : 언젠가는 지는 거다. 정확한 표현이네. 도박판에서 계속 올인하는. 청일전쟁, 올인이지.

 

홀 : 맞다. 올인했다.

 

필 : 러일전쟁도 올인이지. 다 올인했다.

 

홀 : 심지어 확률이 반반도 아닌.

 

필 : 맞다. 심지어 확률이 반반도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거기까지 됐다 이거야. 그러니까 올인하는 게 습관이 되는 거야. 자꾸자꾸 되니까.

 

홀 : 계속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필 : 중일 전쟁도 만주사변, 원래 안 될 거였는데 됐잖아. 그 운발이 막 터지거든. 장제스가 실수해줘, 그다음에 장쉐량이 알아서 실수해줘, 그러면 도박판에 올인하는 걸로만 국가의 관념이 돌아가게 돼 있는 거다. 그 관념의 실체를 난 유신이라고 본다는 거지.

 

저자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일으켜서 이긴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중일 전쟁은 애초 일본의 승산이 반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겼다. 이길 때마다 판 돈은 몇 갑절 이상으로 늘었고 일본은 다시 그 판돈을 전부 다음 전쟁에 올인했다. 물론 승산은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이겼다. 그리고 다시 올인. 구성원 모두가 단결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인지 그런 결기에 우주의 기운이 보답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우연인지 몰라도 그때마다 상대국에서는 결정적 뻘짓이나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될 운명. 올인을 반복하는 도박꾼에게 단 한 번의 패배는 곧 파산이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유신의 관념이 국가 집단의 거대한 에너지로 응축했고, 그 결과가 일본 제국이다.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맹목적인 광기의 에너지가 어떻게 식민지를 착취하고 자국민까지 착취해가며 자기 파멸로 치닫는지. 

 

 

한국에서 부활한 유신, 김재규와 박정희

 

<유신 그리고 유신> 마지막 장의 주인공은 김재규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부활한 유신에 종지부를 찍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김재규는 최후의 유신 지사다. 필독이 천착하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미싱 링크가 박정희, 산업화, 김재규였는데 그걸 파고 올라가다 보니 메이지 유신까지 닿았고, 그 결과가 이 책이라는 것. 김재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 :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자는 김재규가 아니지만 이 사람한테 민주적인 이념이 있다고 보는 게, 민주주의가 오려면 이 사람(박정희)을 내가 너무 사랑하지만 지금 죽여야 한다. 근데 주군을 죽이고 나는 살아있는 건 너무 추해. 본인도 죽는 게 당연한 거다. 김재규는 정말 이 모든 유신의 역사에서 한 마리 남은 최고의 부나방인 거지.

 

홀 : 차지철하고 박정희 죽이고 난 뒤에 현장을 수습해가지고 박정희를 쏜 차지철을 자신이 처단한 것처럼 꾸며서 권력을 잡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는데…

 

필 : 그 계획이 아예 없었잖나.

 

홀 : 한마디로 어벙한 짓 하다가 빠그러진 건데. 하나 궁금한 게, 진짜 지사적인 끝맺음을 하려면 차지철과 박정희를 쏘고 현장에서 자결하는 방법은 없는 건가?

 

필 : (김재규는) 그 과정에서 죽을 줄 알았던 거다.  차지철, 박정희는 자기가 죽여도 경호 인력과의 전투나 이어지는 과정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말끔히 성공해버리니까 뭘 해야 할지를 몰랐던 거야. 당시 김재규가 어리버리하고 되게 바보 같잖나. 신발 한 짝 잊어버리고. 계산에 없던 거다. 그러다가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체포가 돼서 고문받을 때는 오히려 사람이 의연해졌어. 왜냐면 자기는 이제 죽을 게 뻔하거든. 이게 죽음을 향한 탐미적인 태도라는 거지.

 

여기서 김재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 사람은 박정희를 사랑해서 죽였어. 이 사람을 더 이상 타락시키지 않기 위해서. 두 번째는 어쨌거나 민주주의를 위해서 죽인 건 맞다. 주군을 죽이는 대가로 나도 함께 죽지만 주군과 내가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함께 그냥 한강 물에 빠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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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깊은 한강 물에 같이 빠지겠다는 거지

 

홀 : (책에서) 유신의 정의는 자기가 속한 세계를 바꾼다는 믿음 아래 자기와 타인을 기꺼이 파괴해 버리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걸 김재규가 한 거네?

 

필 : 한 거지. 본인의 세계를 다 안고 파괴하면서, 자기도 죽으면서 끝났잖아. 그래서 이 사람 얼굴이 가장 의연하고 영웅처럼 보일 때가 언제냐면 형장에 걸어 들어갈 때다. 그 전날에 “국민 여러분 저는 갑니다. 민주주의를 마음껏 즐기십시오” 하고 사형 날짜 딱 받아놓고 가장 평온하고 의연하게. 이런 모습이 되게 지사 중에서도 하이클래스 지사라는 거다.

 

홀 :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재규의 지사스러움은 그런 멋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기 주군을 죽이기까지 했으면 스스로 정권을 잡지는 않더라도 수습을 잘해서 정말 민주주의가 빨리 도래하게끔 했어야 완성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걸 안 하고 넘어가니까 전두환이 들어와 버리는… 그렇게 뒤가 없는 짓을 하는 게 일본의 지사들하고 결이 맞다고 해야하는 건가.

 

필 : 그러니까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벚꽃처럼 쓰러져 가는 게 중요한 거지 그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치밀한 설계를 하지는 않는 게 지사거든. 

 

홀 : 전두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독재자였고 국민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독이 보기에는 박정희하고 전두환은 급은 좀 다른 사람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나?

 

필 : 급은 굉장히 다르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중에 하나가 박정희인데, 박정희가 악인인가, 영웅인가 하면 당연히 이 사람은 악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인혁당 사건, 말이 되나? 엄청 잔인하고 참혹한 사건인데. 

 

 

맥락의 이해

 

인터뷰 자리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으나 대부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생략하겠다. 아, 이 양반. 공들여 책 써놓고는 인터뷰 자리에서 책 내용을 홀랑 다 얘기해버리면서도 어찌나 그렇게 신이 나 보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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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보이는가

 

그럼에도 누군가의 맥락을 이해하는 일에 대한 그의 생각은 소개해야겠다. 격하게 동의하는 바다.

 

홀 : 우리나라의 소위 말하는 진보적 유권자와 보수적 유권자가 가장 크게 갈리는 지점 중에 하나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필 : 박정희를 영웅시하거나 악마화하는 거지. 솔직히 악마 맞긴 맞아. 근데 악마 취급만 하는 건 곤란하다. ‘어떤 악마였냐?’의 ‘어떤’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홀 :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엇갈리는데 어떻게든 화해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굳이 화해를 하자면 만날 수 있는 지점은

 

필 :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왜 이런 선택을 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 안으로 좀 들어갔다 나와야 하거든.

 

홀 : 쉴드 친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필 : 쉴드 친다고 오해를 많이 받았는데, 박정희 유신 정권 그다음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책에서 아예 ‘자기 파멸적 관념에 매몰된 괴수’라고 표현했다. 난 이 이상 세게 비판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아예 괴수라고 그랬는데.

 

나는 누구를 옹호한 적도 없고 쉴드를 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인혁당 사건이 얼마나 나쁜 짓이냐고 그게. 너무 공명정대하게 드러난 나쁜 일에 대해서 이걸 나쁜 일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이 사람 마음속에 어떠한 형태의 에너지가 들어가 있었는지를 얘기해보자는 거지. 그 에너지의 결을 한번 우리가 흰살 생선의 뼈와 살을 분리해서 뼈를 세듯이 한번 보자고. 그래야지 나는 이걸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김재규도 마찬가지고. 

 

김재규도 그렇지 않나? 이거(좋은 놈) 아니면 저거(나쁜 놈)지. 근데 꼭 그렇게만 접근할 필요는 없는 거다. 박정희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김재규를 저주하고 박정희 싫다고 하는 쪽에서는 박정희 죽였으니까 김재규를 의인이라고 그래. 정작 마지막 탕탕탕 하는 그 순간까지 둘은 서로를 애정하는 사이였고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이였단 말이야. 심지어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긴 마음에는 ‘나라를 위해서 더 이상은 안 돼’하는 애국심 반, 나머지 반은 아직 아름다울 때 주군을 박제하고 싶은 거야. 더 타락하지 못하게. 그런 것들이 있다.

 

그 맥락을 알아 알아야 우리 현대사의 미싱 링크가 풀린다. 일본도 마찬가지고.

 

 

악마의 글발을 가진 글쟁이가 2년 굶을 각오를 한 결과

 

홀 : 참고 문헌이 엄청 방대하다.

 

필 :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정리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까. 쉽게 쉽게 빨리빨리 재밌게 읽히는 거, 그렇게 쓰는 것에 엄청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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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쓰는 건 엿 먹어라이거야~

 

홀 : 그럼 자료 조사 기간은 어느 정도라고 봐야 하는 건가? 참고 문헌을 다 보고, 연원을 찾고, 줄기를 잡고.

 

필 : 다른 일 하면서 틈틈이 얼기설기 맥락을 잡았는데 작년 봄부터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직업 활동, 돈 버는 거를 완전히 멈추고 완전히 이거만 했다.

 

홀 :  작년 봄부터 1년 동안 이것만?

 

필 : 1년 동안 두 권의 책만 쓴 거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게 시간이 들어가는 책이잖나. 참고 문헌도 그렇고 연구의 깊이도 그렇고. 내가 직업 활동을 하고 돈을 벌면서 이런 책은 못 쓴다. 이 책을 쓸 거면 돈을 안 벌고 있는 상태에서만 쓸 수 있다.

 

홀 : 아니면 돈을 벌면서 쓰는데 시간이 졸라 오래 걸리거나. 

 

필 : 그러면 책 한 권 쓰는 데 한 7년 걸리는 거지. 그럼 내가 7년 동안 쓸 것이냐? 아니 됐고, 그냥 1년 동안 수입이 없는 걸 견디자. 왜냐하면 이건 내가 평생 쓸 책이고 내 라이프 워크(생의 과업)니까. 이걸 내가 털지 않고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좀 그렇겠다는 내 안의 압박감을 스스로 느꼈다.

 

홀 :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네?

 

필 : 그래서 영리 활동을 다 접고 책만 썼다. 영리 활동을 하지 않아야 쉬고 있는 시간에도 책 생각만 하는 거다. 머릿속에서 숙고가 되고.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러면 분명히 책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근데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지. 나는 그냥 먹고 살기 힘들기를 선택한 거다. 

 

그렇다고 이 책이  200만 부 이렇게 나갈 거 아니니까. 나는 이 책을 쓴 대가로 내년도 퍽 굶주리겠지. 아직 신간이니까 모르지만. 그러면 2년을 굶어야 한다는 건데 2년을 굶주리는 건 확정이니까 이왕이면 동시에 두 권을 쓰자. 한 권씩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홀 : 동시에 두 권 쓰는 것도 엄청 빡센 거 아닌가?

 

필 : 빡세니까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지. 빡세니까 영리 활동은 포기해야 하는 거다.

 

홀 : 동시에 진행했나? 아니면 하나 끝내고 다음 거?

 

필 : <유신 그리고 유신>의 후반부와 다음 책의 전반부가 맞물려 있는데 그렇게 썼다. 환승연애 비슷하게.

 

홀 :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쉽게 썼네, 아니네 말하면 안 되는 거긴 한데 이 책이 오래 걸리는 책이라고 말한 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쉽게 쓰여진다는 게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쉽게 쓰여져서 쉽게 읽히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은 쉽게 읽히는데 쉽게 쓰여진 책은 아니거든.

 

필 : 아~ 고생을 많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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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질끈

 

홀 : 읽기는 편하다. 쓴 사람이 고생했기 때문에 읽기 편한 결과물이 나온 거지. 좀 바보 같은 질문인데 왜 글쟁이들이 쓰고 싶은 욕망과 읽히고 싶은 욕망이 있잖나?

 

필 : 아! 그거는 정확하게 말하면 쓰고 싶은 욕망 30, 이게 한국사에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70. 왜냐하면 이건 당분간 굶기로 작정하고 쓴 거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홀 :  다음 책이 몹시 기대된다.

 

필 : 다음 책의 주제는 그거다. 왜 한국인은 이렇게 생겨 먹었나. 한민족이 그게 뭐 단일민족이든 아니면 혼합 민족이라고 하든 그걸 유전적으로 뭐라고 부르든 어쨌든 한반도에 터를 잡은 것 자체가 너무 빡세다. 

 

터를 잘못 잡았다. 옆에는 중국이 있어, 살고 있는 땅에는 목축도 안 돼, 농경은 어떻게 하면 간신히 되는데 너무 생산성이 적어. 여기서 정체성도 지켜야 하고, 전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하고, 먹고 사는 것에서도 살아남아야 하고. 그래서 평시에는 생존의 위기고, 전시에는 소멸의 위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위기 속에서 생겨난 민족적 특징. 나는 위기가 만든 민족성이라고 저는 보거든.

 

홀 : 그 부분에서 갑자기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관점이 딱 떠오른다. 이승만은 소멸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원한 사람이고, 박정희는 생존의 위기에서 우리를 먹고 살게 해준 사람. 

 

필 : 맞다.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에 대해서 그 마음은 이해를 하는 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법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거지. 그조차 이해를 안 해주려고 하면 대화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홀 : 저자 인터뷰할 때 꼭 마지막에 물어보는 게 있다. <유신 그리고 유신>, 왜 읽어야 하고 어떤 사람이 읽어줬으면 좋겠나?

 

필 : 글쎄. 책을 쓴 사람은 누구한테든 책이 많이 팔리면 좋기 때문에 꼭 누가 읽었으면 좋겠다가 없다. 왜냐하면 많이 읽었으면 좋지 누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없는데.

 

홀 : 어떤 사람한테 좀 잘 맞을 수 있다 뭐 이 정도라도?

 

필 : 박정희가 너무 싫거나 박정희를 너무 존경해서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자유, 영웅시하는 것도 자유인데 누가 말리겠나. 그러나 한번 이해해보자는 시도, ‘이 사람 왜 그랬을까?’ 거기에 한 번 동참해 볼 수 있고. 

 

한일 역사의 연결고리, 그 모든 걸 한 번에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작가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좀 자신 있게 썼다. 한일 현대사의 어떠한 속살을 깊이 있게 썼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정도는 어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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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책 많이 사줘요~

 

글쟁이. 지극히 내 멋대로인 기준에 의하면,

글쟁이는 어려운 내용이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편하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쓴다.

글쟁이는 심지어 재미마저 있게 쓴다.

글쟁이는 남이 시키지 않아도 힘들지만, 꾸역꾸역 제 글을 쓴다.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쓴다.

 

글쟁이는,

 

글 쓰는 일을 본업으로 한다.

 

필독은 내가 딴지에서 만난 필진 중에서도 손에 꼽는 글쟁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아직 글쟁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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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그리고 유신>에서 시작해 앞으로 이어질 <한국인의 탄생>과 <한국인의 형태>(둘 다 가제다)는 누가 시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호방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프로젝트다. 한국판 <총,균,쇠>라고 해야 하나. 왜 스케일이 호방하냐면, 일단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 조사가 필요하고, 그 많은 자료 중에서 구슬 알을 하나하나 찾아서 꿰야하는데, 그 레시피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작업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그걸 책으로 쓴 다음에는 ‘나님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해냈다!’며 세상에 당당하게 내놓는 호방한 배포까지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좋다고 막 달려들어 할 만한 인물이 필독 말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유신 그리고 유신>의 관점과 해석에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동의할는지는 예측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지만 설득력은 충분하다. 저자가 풀어제끼는 썰을 따라가는 재미는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 다루기 영 쉽지 않은 식재료를 정성껏 손질해 맛있게 만든 요리인데 소화마저 잘된다. 비유해놓고 보니 좀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영 허튼소리는 아니다.

 

많이들 사서 보시라.

이런 글쟁이는 책을 사서 혼쭐을 내줘야 다음 책을 빨리 쓰거든.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