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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물들은 정말 몰라서 한 삽질이었다. 앞으로 두 편은 지금보다 편안하게 일하고 싶어서 선택했던 삽질이다. 선택했다는 건, 이 또한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 저질렀다는 말이다. 바보짓을 기록하는 이유는, 나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데 나의 삽질을 반면교사 삼길.

 

새로운 기술, '용접'

 

2019년 3월, 4월에는 일이 없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노가다 자리를 소개해달라고 전화를 돌렸다. 한 달 뒤, 그중 한 명에게 회신이 왔다. 용접을 배울 수 있는 인테리어 업체로 처음 석 달은 수습기간. 그 기간은 월급 200만 원, 그다음부터 조금씩 급여 인상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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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차이즈 식당이나 카페의 메뉴판을 만드는 곳. 메뉴 보드 뒤편에는 이런 철제 구조물이 있다.

 

내 나이 쉰. 노가다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 지금까지 했던 일은, 정밀한 작업과는 거리가 먼 ‘거푸집 해체’ 일. 그런데 용접이라니? 용접봉을 몇 번 잡아보긴 했지만 겉핥기식으로 배워 실전에 사용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저개발 국가에서 일하다 보면 속이 터지는 일이 많다. 용접공이 용접봉을 잘못 챙겨 왔다고 해발 3천 미터 산 두 개를, 장장 일주일에 걸쳐 왕복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그래서 돈을 주고서라도 용접봉 잡는 법을 직접 배워야 했다. 다만 한국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아 땜빵 수준으로 배웠다. 인테리어 업무는 나처럼 대충 용접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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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 몇 번으로 문짝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던 곳

 

실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낙하산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왕 지인 찬스를 쓴다면,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고 출근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다.

 

K-자본주의. ‘배우면서 일한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다. 특히 규모가 작은 조직이라면, 생초보를 들여 자기 회사 사람으로 키울 만한 자력이 부족하다. 그게 가능하려면 업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회사여야 한다.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배울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건 아니다. 다만 당시, 같이 일하던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들에게 지쳤고 무엇보다 비교적 노동강도가 약한 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

 

8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 진학률 평균 30%. 현장 기능직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방끈이 짧다는 것을 한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 한가운데 먹물 냄새 풀풀 풍기는 낙하산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나 같아도 얄미웠을 거다.

 

게다가 출근하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첫 출근 날, 내가 쓴 책을 챙겼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오로지 낙하산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십여 년 넘게 타지에서 험한 일을 하다 온 놈이라고. 그러니 일단 지켜봐 달라고.

 

내 의도가 어쨌든 간에, 나는 내 잘난 맛에 사는 놈이 되었다. 용접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고 어필했는데 그것도 딱히 도움되지 않았다. 책으로 공부한 놈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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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이, 서울>

 

첫 번째 임무를 맡았을 때 일이다. 거래 업체 한 곳에서 에어컨 스탠드 제작 요청이 들어왔다. 위치는 홍대 근처. 나의 초, 중,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장소다. 별생각 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여긴 내가 살던 곳, 이 집은 동네 친구가 아직도 살고 있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놨다.

 

같이 현장에 나갔던 부장의 눈빛이 탁해졌다. 당시 홍대 주변에 산다고 하면,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는 집안이라는 뜻이다. 내가 편안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들은 상경해서 죽을 고생을 하며 용접 기술을 배웠고, 용접공에게 그 지역은 ‘돈 많은 고객님들이 사는 곳’이었다. 의도치 않게 그들의 콤플렉스를 건드렸다.

 

어느 날은 내부 인테리어 수리 차 모 케이블 방송국에 갔다. 차에서 내려 약속 장소까지 길을 헤매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공장장이 물었다. 

 

"전에 와본 적 있어?"

 

"아, 예. 방송 출연 때문에 몇 번 왔었죠."

 

참 어렵다. 매 순간 레이더를 켜놓을 수도 없는 노릇.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위화감이 들었을 때 공장장이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그때부터 안절부절 혹시나 더 실수할까 불안한 마음에 입을 잠갔다.

 

회사는 배우는 곳이 아니다

 

회사는 사장, 공장장, 부장 이렇게 세 명이 전부. 그래도 안산에 꽤 큰 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공장이 없는 소규모 용접 업체 두세 곳이 회사에 얹혀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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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의 업체가 더부살이하던 회사 중 한 곳이다. 이들의 주 고객은 SPC. 제빵사들에게 화장실 갈 시간도 안 준다는 악독한 기업. 그 현장에 나도 두어 번 지원 나간 적이 있다. 옆 공간에서 빵을 만드는 동안, 우린 쇳가루를 날리며 철제 구조물을 자르고 용접했다. 지금도 건설 현장에 간식으로 나오는 빵 대부분을 여기서 공급한다. 

 

하여튼, 밉보이지 않기 위해 나름 애를 많이 썼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다른 업체 부장님. 따로 불러 비드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근데 배워도 연습을 못 하니 실력이 늘지를 않았다. 우리 회사 공장장과 부장은 대놓고 말했다. 

 

"회사가 학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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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을 해나가면 위 사진처럼 용접물이 녹아 동그란 원형이 생긴다. 이것이 비드(Bead). 비드를 일정하게 만들어야 제대로 용접이 된다. 금속의 속까지 충분히 비드가 들어가야 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과정이다.

 

용접 일을 하면서 수백 번 데이고, 강한 빛에 눈이 마비되고, 용접할 때 나오는 가스 때문에 얼굴 껍질이 벗겨지는 고통을 겪었던 용접공들. 용접의 ‘용’ 자도 모르는 낙하산이 뭐가 예뻤겠나. (물론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난 너희와 다르다는 걸 자꾸 드러냈던 나에게 공짜로 일을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난 한국 주요 도로를 거의 몰랐다. 구매한 각종 자재는 가공 공장으로, 가공된 것들을 다시 가져와 용접으로 형태를 만든다. 마지막 단계는 고객에게 배달하는 것. 당연히 도로명을 외우고 있어야 배달이 가능한데, 난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못 찾았다. 내 머릿속은 네팔 카트만두, 스리랑카 콜롬보, 인도 델리 주요 도로로 가득했다. 아직 한국 지도가 업데이트되기 전. 무엇보다 햇볕이 강한 나라에 있었던 탓에 망막이 손상된 상태다. 용접 일을 하기에 불리한 조건이 많았다.

 

낙하산부터 이미 꼬일 대로 꼬인 관계는 잘 풀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어가 능숙해야 한다. 한국어가 부족한 우리 아내의 한국어 학당 학비도 빠져나가는 상황. 생각보다 빨리 실력이 늘지 않아 그녀도 꽤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공장장이 말한다.

 

“나중에 마누라 등골 뽑아 먹으려고 그 돈 투자하는 거지?”

 

이 양반들, 내가 그만두고 나가길 바라는 건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상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고역이 되어 갔다.

 

목표는 현장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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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기신문>

 

30분 일찍 출근해 몰래 용접 연습을 했다. 고물상에 넘길 잡철 쪼가리로. 하지만 그 정도 성실함으로 그들의 편견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처음부터 용접의 길로 나갈 생각이었다면 인력사무소를 다닐 때, 소장에게 말했으면 편했다. 그때는 일 잘하고 근태 좋은 모범적인 직원이었기 때문에. 배우고 싶다고 말하면 용접 일이 많은 현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다니면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가늠해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만하다는 확신이 생기면 실업급여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지자체나 건설 근로자 공제회 등에서 위탁 운영하는 교육 기관을 찾았을 것이다. 내가 형틀 목수가 된 코스도 이랬다. 

 

안산 건설 기능학교에서 20일간 120시간 (형틀 목수)교육받았다. 2년 반 동안 관련 일을 하고 교육받고, 교육받은 지 1년이 지나도 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용접의 경우는 더 심하다. 주간 교육 과정으로 보면, 100일간 700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위 과정을 끝내고, 일 잘한다는 평가까지 받아야 초보자 일당을 받고 현장에 배치받을 수 있다. 

 

나름의 생존법(feat.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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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먹물 냄새를 지우는 중이다. 그 예로, 연초에 무거운 망치를 구매했다. 밀워키 22온스 망치. 형틀 목수가 보통 사용하는 망치는 16온스. 망치 머리 무게만 계산하는 거니까 실제로 40% 이상 더 무거운 놈이다. 

 

F(힘)=ma(질량X가속도)

 

힘(F)을 세게 하기 위해서 질량(m)이나 가속도(a)를 늘려야 하는데, 나는 질량 늘리는 것을 선택했다.

 

왜 바꿨냐는 주변 동료들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거푸집 해체(바라시) 일을 할 때 느낀 건데…(중략)”

 

물리 공식을 꺼내면 재수 없는 놈이 되겠지. 먹물기를 쫙 배고 바라시 일할 때의 이야기를 했다. 바라시공들은 거푸집을 연결하는 웨지 핀을 뽑기 위해 작은 망치를 사용한다. 그리고 건물의 수직 부하를 받는 동바리를 해체할 때 사용하는 것은 중 망치다. 어차저차 이런 이유로 무거운 망치를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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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바리(현장 용어로 '삿뽀도(Supporter)'). 속대에 구멍이 있고 겉대에 나사가 있다. 건축 부자재를 수직으로 받치는 역할을 한다.

 

 

고개를 끄덕끄덕. 별 거부감 없이 들어준다. 이렇게 난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도, 얼마 전에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로 하는 말이 귀에 박혔다.

 

“쟈는 말하는 거 들으면 너무 뻐긴다. 안 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