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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등 미국의 영상산업은 배우나 스태프 등 각종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인권이 잘 지켜지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영상산업 분야에서 사건이 터질 때 종종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며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미국도 처음부터 각종 노동권이 보장되었던 건 아니다. 현재도 계속 보완 중이다. 그래서 지난 연재물에서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은 어떻게 노조를 결성했고, 어떻게 직업인으로서 자신들이 일하는 곳을 합리적인 곳으로 만들었는지 알아보았다.

 

지금까지의 연재물에서 주로 배우들을 이야기했지만, 영상 현장은 수많은 직군의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 분야의 노조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미국배우조합(SAG-AFTRA)

 

‘스크린 액터스 길드’라는 이름처럼 영화배우, 드라마 탤런트뿐만 아니라 TV 방송기자, 방송 진행자, 성우 등 스크린(방송화면)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면 누구나 노조 가입 자격이 있다. 직전 회장은 가브리엘 카터리스(Gabrielle Carteris)이다. 7080세대들에게는 ‘베벌리힐스 아이들’(Beverly Hills, 90210)의 안드레아 역으로 기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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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공영방송에서

노조 지도자(가브리엘 카터리스, 윗줄 가운데 안경잽이)가

주연인 드라마를 방송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뒷줄 맨 왼쪽의 남자애는 이 글 후반부에 또 등장한다. 

출처-<비벌리힐스 아이들 홈페이지>

 

무대공연종사자 국제연맹(IATSE, The 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trical Stage Employees) 

 

엔터테인먼트 뒤에 숨어있는 연합(The Union Behind Entertainment)이라는 별명 그대로, 화면에는 얼굴이 안 나오지만 영상 촬영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15만 명 스태프들의 노조다.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 등 무대 관련 종사자는 모두 포함된다. 세부적으로는 영화편집자 분회, 영화 로케이션 헌터 분회, 분장담당, 의상담당 노조 분회 등으로 나뉜다.

 

미국작가조합(WGA, Writers Guild of America) 

 

영화 각본, 드라마 대본뿐 아니라 뉴스 대본까지 포함한, 한 마디로 글로서 방송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조다(이 노조는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SGA 노조위원장 로널드 레이건과 손잡고 ‘공산주의자’로 찍힌 영화인들을 조합에서 퇴출시킨 흑역사가 있다).

 

미국감독조합(Directors Guild of America)

 

감독뿐만 아니라 조감독, 부감독. 그리고 CF 감독들도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다 보면, 한국의 업계 종사자들이 이런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한국 실정도 모르면서 미국 노조, 노동권 이야기하려고 앉아있네. 오늘 밤에 당장 영상 찍어서 납품해야 하는데, 이런 거 하나하나 지키면서 영화 언제 찍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 영상업계에서는 어떻게 이런 걸 하나하나 지키면서 찍게 되었는지 최근의 사례를 들어 좀 더 세부적으로 보여드리려 한다.

 

 

‘무노조’ 촬영은 왜 많은 돈이 들었나 : 영화 ‘사크네이도’ 사건

 

2010년대 인기를 끈 샤크네이도(Sharknado)라는 영화 시리즈가 있다. 바다를 덮친 토네이도에 수백, 수천 마리의 상어(샤크)가 흡수되었는데, 이 토네이도가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오면서 흡수된 상어들이 마구 발사되어 사람들을 습격하는 내용의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남주인공(이안 지어링)은 전기톱으로 상어들을 도륙 내고, 여주인공은 사이보그 인간병기가 되어 상어들을 박살 낸다.

 

내용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 안 되는 거 같다고? 그렇게 생각되는 게 이해는 간다만, 위 내용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이래 봬도 미국에서 6편까지 출시된 인기 영화 시리즈다. 도저히 못 믿겠다고? 그럼 그냥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라.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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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작’ 샤크네이도 1편 포스터다.

상어를 마구 발사해대는 저 토네이도 이미지는

인터넷 합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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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상어 전기톱 사건... 이 아니고

샤크네이도 2편의 한 장면이다.

(공교롭게도 샤크네이도 6부작 시리즈의

주연배우 이안 지어링 역시

위에 소개한 ‘비벌리힐스 아이들’ 주연배우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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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트릴로지’가 아니고 1-6편 컴플리트 박스다.

이래 봬도 5년 동안 6편까지 속편이 나온 인기 시리즈다. 

출처-<영화사 보도자료>

 

위 글과 사진에는 한 치의 왜곡도 없다. 이 영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국내 IP TV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한번 찾아보기기 바란다. 다만... 책임은 못 진다.

 

이 영화를 찍은 제작사는 ‘어사일럼’(Asylum)이라는 소규모 제작사다. 이 영화사도 비범한 곳인데, 한마디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짝퉁(일명 '목버스터')만 만들기로 유명한 영화사다.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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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가 개봉하면 ‘트랜스모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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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림’이 개봉하면 ‘아틀란틱 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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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이 개봉하면 ‘엘프의 제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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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이 인기를 끌면 ‘타이타닉2’를 

 

출시해서 장사하는 식이다. 옛날에 한국 영화계에서 ‘박하사탕’이 인기를 끌자 ‘박하사랑’이라는 비디오용 영화가 장사 잘되는 것과 비슷한 수법이다. 작년에 선풍적 인기를 끈 ‘탑건 매버릭’도 어사일럼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순 없었다.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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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각 영화 보도자료>

 

어사일럼 영화사 제작의 주옥같은 영화 리스트는 끝도 없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니 아쉬운 마음은 접어두고 이만 넘어가기로 하자. 

 

암튼 이 ‘샤크네이도’는 짝퉁 영화로 유명한 어사일럼 영화사의 얼마 안 되는 오리지널 히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사일럼은 이 영화로 한몫 단단히 뽑고 싶었는지 매년 속편을 찍어냈다.

 

그런데 시리즈를 이어 나가는 과정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샤크네이도 1, 2편까지는 스태프 노조(위에 소개한 IATSE)와 노사 단체협약 조건을 지키면서 찍었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스태프들의 의료보험 제공, 퇴직금 지급, 오버타임 급여 제공, 유급 식사 시간 보장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그런데 어사일럼 사장인 폴 베일즈(Paul Bales)는 1, 2편을 찍으면서 노조에 학을 뗀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조작, 괴롭힘, 비효율, 바가지 요금 청구, 거짓말, 황제 노동을 당해본 결과, 샤크네이도 3편은 같은 실수 없이 하기로 결정했다.”

 

이 말을 해석해보면 한 마디로,

 

“띠바, 이런 거 일일이 지키면서 어떻게 영화 찍어! 노조 없이 영화를 찍을 거다!”

 

라는 거다.

 

그렇게 그는 3편을 ‘무노조 작업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비노조원 스태프들만 고용을 해서 영화를 찍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사일럼이 듣보잡 소규모 영화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미국의 영화 노조는 6대 메이저 영화사하고만 단체협약을 맺기 때문이다.

 

무노조 작업장 치고, 비노조원에게 잘해주는 직장도 없다. 처음에는 참고 일하던 비노조원 스태프들도 너무나 힘들고 말도 안 되는 촬영 현장에 분노했다. 그래서 외쳤다.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스태프 4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노조 결성을 결의했고, 투표를 붙였다. ‘노조 없는 세상’을 꿈꾸던 제작자 베일즈는 이 40명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런데 사태는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스태프 해고로 모든 것이 손쉽게 끝난 게 아니었다. 어찌 됐든 사크네이도 촬영 현장에서 노조가 결정됐으니 그 노조는 IATSE 산하 단체가 됐고, IATSE는 샤크네이도 촬영 현장 파업을 지시했다. 

 

“앞으로 모든 노조원은 샤크네이도3 촬영 현장을 보이콧 하라.”

 

“샤크네이도3 영화 고용 제안이 오면 거부하고 당장 노조로 전화하라.”

 

뿐만 아니었다. IATSE의 노조 시위대는 뉴욕, 워싱턴DC까지 졸졸 촬영을 따라가며 피케팅을 벌이고 소리를 질러 촬영을 방해했다.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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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PEG(영화 편집자 노조), AFL-CIO 트위터>

 

IATSE의 다른 영화 관련 노조 지부들도 ‘연대’(Solidarity)해서 뭉쳤다. 노조 영화 편집자 분회(Motion Picture Editors Guild)가 나선 것이다.

 

“영화를 찍기만 하면 다냐? 다 찍은 필름 가위질 안 하면, 극장에 내걸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 모든 영화 편집자 노조원, 또는 예비 편집자 지망생들은 샤크네이도3 후반작업을 보이콧 하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편집자 노조원뿐만 아니라 예비 편집자(prospective members)에게까지 보이콧을 지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삥’ 편집자 지망생이 돈만 보고 샤크네이도3 후반작업에 참여할 경우, 이 편집자는 앞으로 절대 노조에서 가입을 안 받아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런 내용의 협박인 것이다.

 

“샤크네이도 일하고 앞으로 평생 ‘3류 편집자’로 살고 싶니? 앞으로 메이저 업계에 들어오고 싶지 않나 봐?”

 

미국 영상업계 노조의 비정함과 단결력을 알 수 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샤크네이도3 촬영 현장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하다. 개판, 아니 상어판. 어사일럼은 파업과 시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비노조원들만 고용해가면서 영화를 완성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촬영 일정 지연 및 추가 제작비 지출은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노조원을 고용해서 영화 찍은 것보다 얼마나 돈을 아꼈을지는 모를 일이다. 아니, 돈이 아껴지긴 했을까 싶다. 게다가 이런 곡절 끝에 완성된 샤크네이도3의 꼬락서니는 참담하다. 직접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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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샤크 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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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검... 레이저 전기톱”

출처-<샤크네이도3 캡처>

 

다시 말하지만, 위 화면 캡처에는 한치의 왜곡도 없다.

 

 

법을 무시한 게릴라 촬영의 비극 : 영화 ‘미드나이트 라이더’ 사건

 

‘샤크네이도’ 사건은 희극(코미디)로 끝났지만, 비극으로 끝난 사례도 있다. 2014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미드나이트 라이더’ 사건이 그것이다.

 

‘미드나이트 라이더’는 유명 록가수 그레그 알만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다. 주연에 윌리엄 허트, 조연에 일라이저 더쉬쿠가 캐스팅된 상태였다. 이 영화의 제작사도 ‘샤크네이도’처럼 소규모 제작사가 제작하는 독립영화였기 때문에 노조와 노동협약을 체결할 의무가 없었다. 그리하여 감독 랜달 밀러는 프리랜서와 비노조원을 중심으로 촬영에 착수했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고는 2014년 2월 20일에 발생했다. 원래 촬영 시작일은 2월 24일이었는데 스태프들은 그보다 일찍 조지아주 동부 시골의 한 철길로 이동했다. 촬영 전 간단한 ‘카메라 테스트’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밀러 감독은 ‘카메라 테스트’ 중 갑자기 철길 위에서 ‘잠깐만’ 촬영을 하자고 지시했다. 감독은 철도회사 쪽에 허가를 받아두었고 안전이 확보됐다고 스태프들에게 전했다. 촬영 장면은 주연인 윌리엄 허트의 꿈 장면이었는데, 병원 병실이 철길로 변하고 병실 침대가 철교에 묶여있는 가운데 윌리엄 허트가 깨어나는 내용의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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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욕포스트>

 

이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촬영할 예정이었다. 스태프들은 지시대로 철교 한가운데에 철제 침대를 설치하고, 침대에 윌리암 허트가 누운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촬영 중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차다!!!”

 

실제 열차가 촬영 중인 철교로 굉음을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촬영이 철교 한가운데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도망갈 곳도 거의 없었다. 혼비백산한 스태프들은 허둥지둥 카메라를 챙겨 철교 옆에 매달렸지만, 철교 한가운데 설치된 철제 침대를 치울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열차 소리가 들린 후 덮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6초. 결국 열차는 시속 93킬로미터로 침대를 들이받았다. 산산조각난 침대 파편이  스태프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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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CCTV에 찍힌 사고 직전 모습. 허둥지둥 달려가는 윌리엄 허트와 스태프들의 모습이 보인다.  철길 오른쪽을 보면 문제의 철제 침대가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출처-<ABC 20/20>

 

그 결과 촬영 보조였던 사라 존스(Sarah Jones)가 열차에 깔려 현장에서 사망했다. 분장 담당인 조이스 길라드 등 8명은 철제 침대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주연배우 윌리엄 허트도 침대에서 급하게 피하다 찰과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만 하더라도 영화계에서는 ‘불행한 비극’이라는 분위기였다. 윌리엄 허트를 비롯해 모든 스태프는 죽은 이를 추모하기 위해서라도 사고를 수습하고 얼른 촬영이 재개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이런 분위기는 뒤집혔다. 사고가 난 촬영은 철도회사와 지자체에 허가를 받지 않았던 ‘무허가 촬영’이었던 것이다. 

 

밀러 감독은 해당 철교에서의 촬영을 여러 차례 촬영 허가 신청을 했지만, 철도회사는 안전을 문제로 두 번이나 촬영 허가를 거부했었고, 결국 어떻게든 촬영을 해야 했던 감독은 막가파로 스태프들에게 거짓말까지 한 후, 철교에서 빨리 ‘게릴라 촬영’을 한 것이었다. 이것이 비극이 발생한 전말이었다.

 

영화업계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사고를 전후한 감독과 제작사의 태도였다. 사고 불과 일주일 전에는 이 영화 제작자(감독의 부인)가 취직을 희망하는 예비 여성 스태프들에게 취업설명회를 하면서 “전에 영화를 찍을 때 노조 관계자가 와서 이건 하고 이건 하지 말라고 이래라저래라했다”며 “나는 내 식대로 영화를 찍는다”고 말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일주일 뒤에는 감독과 제작사가 홍보업체를 고용하여 언론 대응에 나섰다. 사고 발생 불과 2개월 후인 4월 14일에는 영화 촬영을 재개하겠다며 배우와 스태프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문제는 위에도 언급했듯 이 영화는 소규모 제작사의 독립영화였고, 영화배우들은 출연 계약을 이미 한 상태였다. 스태프들이 비노조 계약직 프리랜서였던 것은 물론이다. 배우도 스태프도 돈을 받으려면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감독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사고에 대한 법적 판단이 나올 때까지 영화 촬영 재개를 막을 어떠한 법률적, 노조, 업계 차원의 수단도 없었다. 

 

이에 대해 스태프 노조(IATS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작사는 촬영을 재개하겠다고 허가를 신청한 적도 없다.”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촬영을 막을 방법이 없다. 촬영에 참여하느냐 여부는 그들(비노조원)들이 결정할 일이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IATSE가 가만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영화 관계자 1만여 명이 윌리엄 허트(주연배우)의 페이스북에 몰려가 촬영을 보이콧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영화의 실존 인물인 가수 그레그 알만이 감독과 제작사에 편지를 쓰면서 영화는 끝장이 났다.

 

“영화인으로서 욕망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도리(your obligations as a human being)를 다해야 한다. 사라와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영화 재촬영을 당장 그만두는 것이 인간으로서 도리다.”

 

영화는 끝장난 후에 법적 처벌까지 가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사고 5개월 후에 영화감독, 제작자, 그리고 제1 조감독이 과실치사죄 및 불법침입죄로 기소됐다. 1년 후에는 제작자(아내)가 불기소되는 대신 감독(남편)이 책임을 지고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받았다. 제1 조감독은 자격정지 10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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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치사죄로 체포된 랜달 밀러 감독과 조디 사빈 제작자. 두 사람은 부부였다. 

출처-<웨인카운티 구치소>

 

영화 스태프 노조는 사라 존스의 죽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 운동(Safety for Sarah movement)을 추진했다. 그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 ‘촬영 현장 안전 앱’이다. 이 앱은 노조원, 비노조원 상관없이 영상 촬영 현장에서 안전상 우려가 발견될 경우, 앱을 클릭하면 노조에 즉시 신고가 되고, 노조 측에서는 대응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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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현장 안전 앱

 

  

안전 규정을 무시한 대가 : 알렉 볼드윈 총기 오발 사고

 

영상 현장에서 지킬 걸 지키지 않아 사고가 일어난 사례는 더 있다. 사고는 최근 영화 ‘러스트’ 촬영 현장에서 일어났다. 2021년 영화배우 알렉 볼드윈이 영화 촬영 중 진짜 총을 발사해 촬영감독이 사망하고, 다른 1명이 중상을 입은 ‘엽기적 사고’가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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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를 발사한 직후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주연배우 겸 제작자 알렉 볼드윈

출처-<LA타임스 캡처>

 

혹시라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독자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알렉 볼드윈은 2021년 10월부터 주연배우 겸 제작자로 서부영화 ‘러스트’를 찍고 있었다. 촬영 중 볼드윈이 카메라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발사하는 장면을 찍으려 했는데, 소품용 권총에서 공포탄이 아닌 실탄이 발사돼 버린 것이다. 카메라 저편에 있던 촬영감독 할리나 허친스는 즉사했고, 옆에 있던 감독도 중상을 입었다. 1993년 영화 ‘크로우’ 촬영 중 영화배우 브랜던 리가 총기 오발로 사망한 이후, 할리우드에서 29년만에 처음 발생한 촬영 중 총격 사망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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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 중 사망한 촬영감독 할리나 허친스

출처-<할냐 허친슨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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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 촬영중 총기 오발로 사망한 브랜던 리. 아버지 이소룡처럼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이 사고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였다. 군대를 다녀온 분이라면 총기 안전 수칙에 대해 잘 알 것이다.

 

“모든 총기는 실탄이 장전된 것처럼 취급하라.”

 

한국에서도 아는 상식을 총기 소지가 가능한 미국의 영상업계가 모를 리 없다. 위에 소개한 스태프 노조(IATSE) 는 총기를 사용하는 촬영 현장에는 별도의 노동안전위원회(Labor-Management Safety Committee)를 설치하고, 총기 안전 가이드라인을 매일 점검하도록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총기안전수칙(‘건 세이프티 프로토콜’이라고 한다)이 ‘러스트’ 촬영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총기 소품 담당(업계 용어로 ‘아머러’(Armoror)라고 한다)은 ‘러스트’가 첫 영화 촬영인 쌩초보였고, 촬영 중 대기하다 심심한 스턴트맨들이 빈총을 쏘다가 진짜 총알이 발사되는 사례도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기 오발 문제는 ‘러스트’의 노동안전위원회 아침 회의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고 스태프들은 증언한다.

 

공교롭게도 문제의 장면을 촬영할 때의 촬영 스태프들은 비노조원들이었다. 촬영 전날 밤, IATSE 노조원인 카메라 조작 스태프 등  7명이 ‘못 해 먹겠다’고 때려치고 나갔기 때문이다. 

 

사연은 대략 이랬다. 

 

서부영화라 멕시코 사막에서 촬영하다 보니 스태프가 묵을만한 숙소는 촬영장에서 1시간 이상 떨어져 있었다. 카메라맨들이 하루에 12시간씩 촬영한 후 왕복 2시간씩 숙소로 운전하다 보니 스태프들의 피로가 가중되었다. 결국 이런 장면 촬영에 숙련된 베테랑 노조원들은 ‘노동 조건을 개선하라’고 뛰쳐나갔고, 촬영 스케줄에 쫓긴 제작진은 근처에서 비노조원을 데려다 찍다가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사격장도 마찬가지지만 총기를 사용하는 촬영 현장은 취해야 할 안전조치가 많다. 총기 안전상태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총기와 탄약을 분리, 총기 사선(fire lane)에서 사람 및 물체가 없도록 조치하기, 안전사고 발생 시 대피 및 조치(exit) 등을 취해야 한다. 정신없는 촬영 현장에서 초보 스태프들이 이런 조치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장면 촬영 당시에도 조감독은 총기 한정마다 약실과 탄창을 확인하는 총기 검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총기가 수북이 든 소품 상자에서 총을 하나 그냥 꺼내줬다는 것이다. “콜드 건!”이라고 외치면서... 탄이 장전되지 않은 빈총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총은 “핫 건”(탄이 장전된 권총)이었고,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사망한 촬영감독 허친스는 IATSE노조 지역 대표였다. 허친슨은 평소 ‘파업하겠다’고 외치는 노조원들을 달래는 한편, 촬영 현장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허친스의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마지막 사진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태그가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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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할리나 허친스 인스타그램>

 

"Standing in #IAsolidarity with our @IATSE crew here in New Mexico on RUST."

(뉴멕시코 러스트 촬영 현장 스태프들은 IATSE노조와 함께 연대(solidarity)합니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현실적 이유

 

위 사례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미국 노조를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업장에서 안전 규칙을 지키며, 현장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만약의 사고를 예방하고 결과적으로 사측에도 이득이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최근 미국 영상업계는 유례없는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의 출현으로 영화 소비 주기가 빨라지고 영화 수요도 더욱 많아졌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해 1년 가까이 지연된 스케줄을 벌충하기 위해 미국 영상촬영 현장은 K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빨리빨리’로 진행되고 있다. 필자가 지난해 출연했던 한 드라마는 그 주 촬영분을 그 다음 주에 방송하는 벼락치기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의 미국 영상 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빨리빨리 촬영 상황도 ‘러스트’ 오발 사고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미국 영상 촬영 현장은 스태프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근무 시간과 식사 시간을 준수하고, 코로나19 안전조치를 비롯해 안전사고를 방지하고, 급여 지출을 문서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위와 같은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일터가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스태프와 노동자들은 도구나 소품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마소처럼 채찍질하면 오히려 사고가 생긴다.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죽는 산업재해도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발생한 SPC 공장 노동자의 안타까운 사고가 근본적으로는 이 글에서 소개한 사고와 다를 바가 없다. 

 

①사측이 정한 무리한 일정에 쫓겨 노동자들이 한계를 넘어선 초과근무를 하다가 인명사고가 났다. 

 

②인명사고를 전후해 크고 작은 사고가 났고, 근로자와 노조는 여러 차례 안전 규칙 위반을 경고했다.

 

③그러나 사측은 “내 식대로 한다”며 무시했고, 인명사고 후에도 사측은 조업을 계속하는 한편 홍보업체를 내세워 면피하려 했다. 

 

④노동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조업을 재개했다. 

 

⑤법적인 심판은 앞으로도 몇 개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상태다.

 

⑥하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하는’ 사측의 행동에 주변이 분노를 분출하고 있다.  

 

노조가 만능 해결사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미국도 대공황이라는 시행착오를 겪어본 후 1938년 제정한 것이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 of 1938, FLSA)이고, 이 법에서 규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단결권이란 말을 하고 싶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권’이나 ‘사회정의’ 같은 추상적 개념을 믿어서 FLSA를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대공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노동자들을 한계까지 쥐어짜면 큰 사고가 나고, 그런 사고를 막으려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듣는 방법은 노동법과 노조이고, 그래야 결과적으로 사측도 돈을 절약하고 이득을 본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대공황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와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개혁, 노동개혁 입법과정을 자세히 보시려면 필자의 지난 기사 ‘개혁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 루즈벨트는 연방 대법원과의 5년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나(링크)’를 참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려한 화면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스태프들의 땀과 눈물을 존중해줬으면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 업계의 사람들은 대체로 돈보다는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 작품이 공개될 때의 보람 때문에 이 일을 한다. 그런 사람들의 고생에 대해 ‘열정페이’ 말고 최소한의 합당한 대우와 인간적인 대접을 해줘도 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 영상업계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어떤지 필자가 밑바닥에서 개인적으로 받아본 ‘인간적 대접’에 대해 다음 편에서 다뤄보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