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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이었다. 나는 “서른 살, 새내기입니다만” 시리즈를 딴지일보에 연재했다. 그것은 고졸로 살았던 나의 20대에 보내는 소박한 마감이자 조촐한 헌사였다. 아니, 어쩌면 변명이나 다짐이었을지 모른다. 어느새 2023년, 익숙해지지 않는 숫자의 연도를 맞이하고 말았다.

 

 

 

 

서른 살에 대학교에 입학해서 서른네 살에 졸업한 건 그리 대단한 일도, 유난을 떨 일이 아니다. 뭘 이뤘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고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지난 대학 생활 동안, 딴지의 고료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배우고 싶은 바를 배울 수 있었고, 쓰고 싶은 바를 썼다. 조촐한 글을 읽어준 딴지스 덕분이다.

 

4년 전, 가족도 직장 동료도 밥 벌어먹기 힘들 것 같다고 고개를 젓던 ‘30살,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계고의, 문과 졸업생’은 ‘34살, 지방 사립 인문대학의, 불교학과 졸업생’이 됐다. 밥 벌어먹기 힘든 상황은 똑같... 아니, 더 심각해진 것 같지 않은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흐규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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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보고 겪은 대학 현장에서의 체험을 들려드리고자 한다. 이제 ‘대학생 특파원’으로 기사를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대학 생활하며 보고 겪은 것들

 

장면 1. 궁금하면 나무위키를 켜라

 

내가 대학 진학을 포기했던 건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애매한 성적도, 불안정한 여러 상황도 다 그럴듯한 이유로 쓸만했다. 반면 누군가 나에게 ‘그냥 노력이 부족했던 거 아니냐’라고 비판하더라도, 그 비판 또한 타당하다. 그런데 마음속 깊이 나를 옥죄고 붙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사학자가 되지 못할 거라면, 대학도 가지 않을 테야!’라는, 유치하기까지 한 그 결심 때문이었다.

 

그 뒤로 14년이 흘렀다. 인문학의 발전은 이제 의제가 되지도 않는다. 학령인구 감소와 코로나 여파를 정통으로 맞은 지방대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정원 미달에 시달린다. 한 광역시 안에서 어떤 대학이 조금 더 낫니, 어떤 대학이 조금 더 떨어지니, 은근한 호승심의 말들이 오가던 대학가는 이제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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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노컷뉴스> 링크

 

물론 그런 것들을 외면하고자 했다. 어차피 나야, ‘지방 사립 인문대학의 불교학과’라는, 극한의 마이너한 길을 택하지 않았는가? 특히, 경전이나 고전을 다루는 사람들은 내일이면 고속도로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가득할지라도, 묵묵히 고전의 옛 뜻을 밝히는 ‘멋’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냥 묵묵히 가야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헌데, 그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AI 어쩌구, 코딩 어쩌구, 그런 것들은 인문대학에 깊이 침투했다. 그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즉 융합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끼워 넣지 않으면, 대학은 아예 생존할 수 없었다. 대학들은 각종 연구와 사업을 따내기 위해,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개발자 관련 교과목과 전공을 억지로 만드는 학교가 우후죽순 솟아났다. 오래된 농담인 “문송합니다.”가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문계열의 과목을 가르치는 적잖은 전공 교수가 스스로 자신의 밥줄을 무너뜨리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시국의 ‘원격 강의’는 그동안 강단의 위엄과 빳빳한 양복으로 포장된 교수들의 민낯을 시원하게 까발렸다. 교수들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익숙지 않은 건 이해하지만, 십수 년 동안 (불쌍한 대학원생이 디자인만 바꿔주며) 똑같은 강의자료, 워딩만을 반복하던 교수들은 독백에 가까운 2-3시간 풀강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자 기현상이 나타난다. ‘부교재 활용’이라는 미명 아래 각양각색의 시간 때우기 스킬이 펼쳐졌다. 어떤 이는 “나무위키를 보라.”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3시간 내내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어떤 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ChatGPT에서 찾았고, 어떤 이는 초벌 번역을 파파고에 맡겼다. 가장 압권이었던 건, 고전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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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교수가 타인이 쓴 해설서나 교양서를 토대로 강의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고전이나 원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번역서의 한 꼭지라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인문학은 사라졌다. 전공 수업은 과거의 ‘교양’ 수준에 머무르고, 교양 수업은 ‘학점 벌이’용으로 쓰였다. 대학의 모든 학과가 추구하는 황금률은 이랬다. 

 

빠른 지식의 축적, 그리고 취업에 이르는 극한의 효율적인 루트.

 

대학이 취업에 다다르는 관문이 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인문대학, 아니 문사철 대학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대학의 관심사는 수업 하나하나의 퀄리티와 학자를 양산하는 커리큘럼이 아니었다. ‘과거의 유산’ 혹은 ‘최후의 보루’처럼 버티던 문사철 학과들은 다른 학과들의 뒤를 이어 시대적 흐름이라는 명목하에 취업사관학과로 변질되고 있다. 철학과는 폐지되고, 졸업요건으로 논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실은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밀려왔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항의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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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성을 더욱 느낀 점은, 대학의 내부 구성원들조차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길’을 회의적으로 보고, 지극히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과 진로 상담을 한 적이 있는데, “전업 작가나 연구자가 되고 싶다.”라는 나의 말에 그들은

 

“먼저 먹고 살 궁리부터 해 놔야 하는 거 아닐까? 작가는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그런 마인드로 접근해야 하는 것 같아.”

 

“아, 이쪽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그러면 대학원 가야겠네. 학부부터 빨리 졸업하자.”

 

“집안에 돈이 많니? 그 마음은 알겠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버티기가 힘들어.”

 

“흐음, 이 분야는 수요도 없고, 나중에 연구자 돼서도 자리 잡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답변을 해준 그분들께 고맙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분들이 내게 먼저 했어야 할 말은 다른 것이었다. 

 

“어떤 언어를 공부해야 하고, 어떤 책들을 읽고, 어떤 논문들을 읽고, 어떤 학과들이 있고, 어떤 대학원들이 있다. 내가 이 분야는 전공이 아니지만, 이런 부분들은 내가 지도해줄 수 있다.”

 

그것부터 말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훌륭한 연구자와 교수님들조차, 대학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량에 시달리고 있으며, 나아가 대학의 존폐 위기와 함께 그들의 생계 기반도 흔들리고 있음을. 

 

모 대학에서는 연구 과제를 따내지 못하자, 계약이 남아 있는 많은 교수를 ‘건수를 잡아’ 한꺼번에 잘랐다. 그들에게는 ‘출퇴근 불량’, ‘연구실적 부족’ 등의 징계 사유가 뒤따랐다. 이런 살벌한 판에 열정만이 가득한 젊은이가 뛰어들겠다니, 진심으로 걱정해줄 수밖에. 무책임하게 희망을 부추기는 건 어른이자 지식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니까.

 

그러나 무엇을 배우려면 학생이 알아서 해야 하고, 대학은 다만 틀만을 제공할 뿐인 이 사회가 문제없다고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장면 2. 네가 우리의 꿈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태생적으로 게으르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내가 품고 있던 고민이나 의심을 똑같이 한 옛 시대의 논문, 주석서, 해설서를 찾아내면 가슴이 뛰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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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름다운재단>

 

내가 빌려오는 도서관의 책 중에선 입고된 후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이 묻지 않아, 헌책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벨 수 있을 만큼 빳빳한 종이가 살아있는 책들도 꽤 많았다. (개중에는 플라톤의 『향연』도 있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수많은 책을 독식해서 오히려 좋았다. 뭐, 어차피 대학교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공부하는 것 아닌가. 

 

물론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1학년 때는 졸라게 현타가 왔다. 한번 생각해보자. 서른 살 대학생이 10살 어린 동생들과 OT 가서 놀고(트와이스의 TT를 출 때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싶었다), 밥 먹는 문제로 갈등이 생기고, 이성 관계에 어쩌다가 꼬여서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현타가 올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원체 관종이라서 그런지, 어느덧 적응하여 학교 신문편집국도 하고, 밴드 동아리도 하고, 학교 서포터즈도 했다. 논문대회에서 입상도 해봤다. 과탑도 했다. 그냥 하고 싶은 건 다 했던 것 같다. 어디 내놓기에 여전히 부끄러운 몇 권의 책도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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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쓴 책들이다. 

대부분 딴지의 연재물이 바탕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뭘 저런 것까지 하나’라며, 다른 사람 눈에는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나는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자그마한 성취라도 없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공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대학을 벗어나면 약간의 의미도 머금을 수 없는 몸짓이라도, 그것마저 없으면 도저히 대학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흔들리지 않고 내 갈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친구들의 소식이었다. 2000년대의 사회적 담론이었던 ‘88년 세대’의 끝자락을 뚫은 90년생 내 친구들은 이제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동산 시장이 광풍이다, 코인이 광풍이다, 취업 경쟁이 심각하다, 뭐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녀석들은 어떻게든 집을 샀고, 이내 청첩장과 돌잔치 초대장을 보냈다. 

 

뒤이어 다른 소식들도 들렸다. 빅3 회계법인에서 자리 잡았다, 어떤 연예인의 전속 트레이너가 됐다, 대기업의 출세코스를 걷고 있다 등의 무수한 성취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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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발, 졸라 고독하다...

 

그런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나는 대학 생활에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면, 시선을 빼앗기거나 마음속에 고민이 피어날 겨를도 없을 테니까.

 

그러던 중,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고등학교 때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황과 이름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의 소식을 한참 전하던 녀석은 대뜸,

 

“야, 고맙다.”

 

라고 말했다. 저의를 알 수 없었던 나는 반문했다. 그러자 녀석은

 

“네가 하는 일이 진짜 문과가 하는 일이잖아. 우리도 역사 좋아하고 철학 좋아하지만, 못했잖아. 네가 가는 길, 우리는 못 해. 그럴 용기도 없고. 그리고 어쩐지 너는 그런 길을 걸을 것 같았어. 그래서 약간, 너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낀달까?”

 

그리곤 녀석은 전화를 끊기 직전, 술에 취한 목소리로 ‘네가 우리의 꿈이었어’라는 것이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고3 시절, 일찍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교생 중 유일하게 입시 준비를 안 할 때, 가뜩이나 얼마 안 되는 친구들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교생이 모의고사 풀이에 죽어라 매달리는 데, 세상 편하게 이영도의 소설이나 정민의 역사 교양서를 읽어대는 내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을 거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난 작가나 역사학자가 꿈이야.”라고 고백한 적은 없었지만, 가까웠던 친구들은 대강은 알았다.

 

오랜 연락의 단절 끝에, 쑥스러운 말을 흘리듯 던지는 녀석의 전화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좌표를 다시 계산하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그리 ‘쓸모 있는’ 사람도 아니며, 그리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빈약한 통장 잔고에 시달리는 삶을 살 것이라는 판단과 예측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어 있던 거다. 그 기막힌 간극은 이내 서글픔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은가. 나 따위가 누군가의 꿈이 되는, 그런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바뀌었다. 문사철의 길을 희망하는 자들의 꿈은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통찰을 주는 글을 쓴다든가, 지금까지의 학설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가 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TV에 나오는 유명 교수가 된다든가, 혹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든가 하는 편이 낫다. 소박한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무늬만 작가가 되었을 뿐인데도 ‘꿈’이 되는 사회는 그 자체로 인문학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매 학기 수업의 폐강을 함께하며 장례를 지도했다. ‘티베트불교’, ‘불교심리학’ ‘비교종교학’, ‘한국불교사’, ‘불교미술’과 같은 흥미로운 과목, 심지어 ‘한국사’, ‘동양철학’, ‘심리학’과 관련된 교양 과목들이 내외부적 문제로 폐강되는 것을 쭉 지켜봤다. 한때 서가를 가득 메웠던 역사 교양서는 꾸준히 신청도서로 들어오는 자기계발서, 힐링 에세이, 부동산과 투자 서적, 공무원 또는 공공기관 취업 관련 서적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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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이런 인문학의 종말은 대학 안에 있는 나보다 대학 밖에 있는 친구들이 더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나를 ‘죽어가는 세계에 굳이 발을 내디딘 용기 있는 녀석’이라 정의했다. 조선사 교양서 세 권을 쓰고도 ‘이 길이 맞나?’라며 회의하고, 여전히 타인에게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 오랜 부끄러움이, 친구와의 통화 이후로 사라졌다. 다른 녀석들의 삶과 맞춰보는 것 또한 그만두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미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배우고 싶었던 공부를,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뭐가 어찌 됐든 하고 있었다. 역사 속의 인물이 무엇을 성취했는지는 내 책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걸어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 관심을 나에게도 주기로 했다. 성취하는 바가 아니라, 걸어가는 것에 무게를 싣자고. 희망도 절망도 다 먹어 치우는 바보처럼 걷자고.

 

돌아보니 홀로 걷는 것도 아니었다. 코로나 시국 때문에 몇 년 동안이나 유학길이 막혔다가 드디어 미국대학원에 합격한 사람, 아무런 신분보장도 없이 홀로 독일로 떠나 할아버지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우는 사람, 나보다 더 늦은 나이에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한 사람, 아무도 읽지 않는 『시경』이나 『서경』을 줄줄 외우며 고전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이한 사람을 보면 군침을 흘리는 딴지 편집부가 좋아할 만한 사람들만 내 주변에 있었다. 인문학을 하려면 사회적으로 뭔가 하자가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러면 어떠랴.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지난 ‘서른 살, 새내기입니다만’의 마지막 기사에서 어떤 분께서 ‘너무 나이브한 태도가 아니냐’라는 댓글을 다신 적이 있었다. 솔직히 졸라 찔렸다. 맞으니까. 나는 치열하게 살아야 할 현실을 던지고,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대학으로 도피한 셈이니. 그렇게 도피해놓고서도 전력으로 탐구하고 전심으로 쓰지 않았으니. 찔려도 단단히 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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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길을 걷는다. 대학에 오지 않았다면 하지 못했을 결심과 옮기지 못했을 걸음이었다. 올해는 아니지만, 대학원도 갈 것이다. 한해 한해 아주 느리게 성장하는 나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딴지스 여러분과 학력과 이력이 아닌, 오직 글로만 나를 바라봐준 편집부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다 딴지스 덕분이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글로 이야기 나누게 됐으면 좋겠다.

 

고맙습니다.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