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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일주일이었다. 실리콘밸리 뱅크(SVB) 파산 사태를 전한 지난 기사([긴급 진단]현직 미국 뱅커가 본, SVB 파산 사태 : 금융위기 이후, 최초의 대형은행 파산이다-링크)가 나간 이후, 미 금융계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그중 굵직한 사건들만 우선 추려보자.

 

1) Signature (자산 100조 규모, SVB의 약 절반 규모) 은행 지급정지 사태.

 

2) First Republic (자산 200조 규모, SVB와 비슷) 은행에도 유동성 위기 의혹이 제기됨, 주가가 90%가량 급락.

 

3) 글로벌 메이저 은행인 Credit Suisse 사실상 구제금융의 형태로 UBS에 인수.

 

SVB은행 파산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규제당국과 연준의 적극적인 개입에도 불구하고 점차 다른 은행들로 확산되고 있다. 하나하나 자세히 디벼보자.

 

1. 일단 수습은 FDIC 가 했다

 

현재까지 지급정지 사태에 빠진 은행은 SVB, Signature 두 곳이다. 이 은행들을 현재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FDIC (예금보험공사)이다. FDIC는 금융 시스템에 혼란을 차단하기 위해 두 은행의 모든 예금에 대해 지급을 보증하는 한편, 모든 자산과 채무를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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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예금에 대한 지급보증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미국의 경우, 25만 불의 예금까지 지급을 보증한다. 25만 불을 초과하는 예금의 경우, 원금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문제는, SVB와 Signature의 경우 예금액의 대다수가 이 한도를 초과하는 큰손들의 자금이라는 점이었다. FDIC는 금융 시스템 정상화를 위해, 두 은행의 25만 불을 초과하는 모든 예금에 대해서도 지급 보증을 결정했다. 적어도 예금자가 이번 사태로 인해 손실 보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

 

채무에 대한 지급보증은 좀 다른 이슈다. 은행이 발행하는 대출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출일에 원금을 전부 빌려주는 것이고(주택담보 대출처럼), 다른 하나는 채무자가 원할 때 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신용카드대출, 마이너스 통장처럼).

 

FDIC는 망한 은행들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모든 지급보증 채무도 승계하기로 했다. 덕분에 두 은행으로부터 유동성을 공급받기로 한 채무자들도, 문제없이 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규제 당국 입장에서도 이렇게 두 은행을 가능한 정상적으로 유지시켜야, 나중에 자산 매각 시 제값을 받고 팔 수 있으니까.

 

2. 급성장 급추락

 

SVB와 Signature 은행의 공통점은, 이 은행들이 특정 업계 큰손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SVB는 실리콘 밸리 벤처회사들을 주 고객 삼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회사다. 뉴욕에 위치한 Signature은행도, 뉴욕 부동산 업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급 성장했다.

 

당신이 수십, 수백억의 자금을 굴리는 큰손이라고 해보자. 수백억이라는 돈은 객관적으로 큰돈이기는 하지만, 메이저 은행 입장에서는 그렇게 절대적인 돈은 아니다. 고객의 수가 너무나도 많은 메이저 은행에서는, 이런 큰손들에게 사실 해줄 수 있는 서비스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기껏해야 지점 방문 시 VIP 라운지로 모시는 정도.

 

그런데, SVB와 Signature에서는 이들 큰 손들을 아주 극진히 모셨다. 뱅커를 붙여 자주 접대하는 것은 물론, 업계 다른 큰손과 연결을 시켜주는 등의 부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단순히 금리 좀 더 쳐줘서, 큰손들과 이들 은행이 밀착된 게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이들 은행이 예금자들에게 지급한 평균 금리는 온라인 은행들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큰손들의 마음을 얻은 덕에, 두 은행은 부동산 / 벤처 호황을 등에 업고 단기간 내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달이 차면 기운다. 부동산 / 벤처산업이 침체되자, 두 은행들의 큰손들은 예금을 인출해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급격하게 증가하던 두 은행의 예금은 한순간에 감소세로 접어든다.

 

3. SVB는 최약체였다는 뜻이다

 

SVB와 Signature 은행 사태의 본질은 유동성 위기다. 밀려드는 예금 인출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급 불능 상태에 빠졌다. 지금 유동성 위기의 파괴력을 언뜻 체감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지난 2008년도 금융위기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쇄 부도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출 상품에서 대규모 디폴트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은행들이 휘청이는지 잘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 사태. 한국에서 발생한 IMF 사태야말로 대표적인 유동성 위기다. 당시 외환위기를 일으켰던 주범은, 외국으로부터 단기 자금을 빌려다가 기업들에게 장기 대출을 해줬던 종합 금융사들이었다. 동남아시아 발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외국자본들은 한국에 파킹 해뒀던 단기 자금을 인출해간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러한 변제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자산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산은 있었다. 문제는, 그 자금의 대부분을 이미 해외 설비 투자 등으로 써버렸다는 점이다. 돈은 있었지만 당장은 현금화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러한 유동성 위기로 인해,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했다. 유동성 위기가 경제 전반에 미칠 수 있는 데미지는 결코 작지 않다.

 

유동성 위기가 골 때리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할수록, 문제가 점점 더 커진다는 점이다. 재무적으로 건전한 은행이라도, 한번 신뢰를 상실하면 예금자들의 인출 러시가 이어진다. 찝찝하니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예금이 인출되면, 문제가 없던 은행도 유동성 위기에 처한다. 아무리 아니 땐 굴뚝이라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면 불 없이 연기가 피어오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의 유동성이나 지급 능력에 대한 환상이 있다. 예금의 일부를 현금으로 보유하는 지급 준비율 같은 제도가 있고, 자산 / 채무의 만기일을 일치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복잡한 리스크 관리 규정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안전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제 상황이 정상적일 때 이야기다. 예금의 10%를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은, 일반적인 예금 인출 요구를 감당하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SVB사태 당일, 하루 동안 전체 예금의 30%가 인출을 시도했다. 그 인출 요구를 전부 수용할 수 있는 현금을 갑자기 마련하는 것. 불가능하다.

 

채권이나 대출처럼 보유한 자산을 매각하면, 필요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금화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채권은 마치 공산품같이 거래하기 편한 금융상품인 반면, 대출은 감정하기 힘든 수공예품이다. 국채와 달리, 은행이 보유 중인 대출을 급히 매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자산을 매각하면 제값을 받고 팔지 못한다. 결론, 은행이 한번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 이를 자체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좋되는 거다.

 

SVB / Signature Bank 사태 같은 유동성 의혹이 발생했을 때 이를 견딜 수 있는 은행은 진짜 몇 안 된다. 바꿔 말하면, SVB / Signature Bank가 나자빠진 건 그들이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유동성 위기라는 전염병이 계속 퍼져나간다면 차례로 고꾸라질 은행들, 정말 많다.

 

4. 방어선 : First Republic에 배팅한 40조

 

나 같은 조빱 뱅커 나부랭이도 아는 사실을 높으신 분들이 모를 리 없다. 연준과 미 재무부가 다른 은행들의 한도 초과한 예금들에 대해서도 지급 보증해 주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만약 이게 현실화된다면, 적어도 예금자가 은행으로부터 돈 떼일 일은 없다.

 

보도 직후, 재넷 옐렌 재무부 장관은 모든 예금 지급보증을 확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공식 부인하긴 했지만(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게, 발언 장소가 상원 청문회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섣불리 긍정했다간, 정부 개입을 탐탁지 않아 하는 야당 의원들이 들고일어났을 게 뻔했기 때문) 미국 금융당국은 필요시에는 언제든 개입하여 예금을 보호해 줄 것이다.

 

연준은 은행이 보유한 자산을 현금화 시켜주는 프로그램을 가동, 각 은행의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이건 사실상 양적완화로 봐야 하지만, 연준은 절대 아니라고 하니 그냥 넘어가자).

 

미국 메이저 은행들은, 유동성 위기의 다음 타깃으로 지목된 First Republic을 대상으로 40조가 넘는 예금을 꽂아주기로 했다. 이는 은행 업계 자체에서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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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과 동료 은행들의 지원을 받은 First Republic 은행은 과연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번 사태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First Republic이 버틴다면, 사태는 진정세로 접어들 것이다. 정부 / 은행 입장에서는, 더 큰 다른 은행에 매각해서라도 First Republic를 빨리 정상화시키려고 할 것이다.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First Republic, 줄이어 다른 대형 은행이 파산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것이다.

 

5. 필터 확대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 SVB, Signature Bank 그리고 First Republic의 공통점. 자산이 2500억 달러(약 300조) 이하였다는 것이다. 미국 금융당국은, 금융위기 발생 이후 자산 2500억 달러 이상의 대형 은행들에 대한 규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왔다. 이 필터링에서 빠져나왔던 세 은행은 자기 마음대로 돈을 굴릴 수 있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앞으로 중견 은행들에 대해서도 규제가 더욱 강화될 것이다.

 

6. 금융 디스토피아

 

이번 사태에 가장 식겁했던 이들은, 중견 은행 / 지역 은행에 많은 예금을 예치시켜 둔 큰손들일 것이다. FDIC의 지급 보증으로는 안심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예금을 보다 안전한 메이저 은행으로 옮길 가능성이 크다.

 

예금은 은행을 성장시키는 핵심적인 재료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은행들에 넣어두었던 예금이 대형 은행으로 옮겨감에 따라, 앞으로 큰 은행은 더욱 커지고 작은 은행들의 성장은 지체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

 

믿을 만한 메이저 은행들이 더 커지는 것이, 금융 시스템을 더 안전하게 만들까? 스타크래프트를 생각해 보자. 마린메딕 세 부대를 컨트롤하는 것은 한 부대를 컨트롤하는 것과 난이도가 아예 다르다. 규모가 커질수록 정교한 컨트롤은 어려워진다. 제아무리 대형 은행이라도 마찬가지다. 운용해야 할 자산의 규모가 늘어날수록, 은행 / 펀드의 수익률은 떨어지기 쉽다.

 

더 큰 문제는, 은행의 몸집이 커질수록 그 은행이 망했을 때 충격파가 비례한다는 거다. SVB나 Signature의 지급불능은 충격적인 일이긴 했지만, 그 여파는 수백조 정도였다. 당국이 개입하여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천 조짜리 은행이 망한다면? 이건 금융계의 체르노빌 사태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일부 메이저 은행에 편중된 자산을 분산시키면서도 그 자산들이 보다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메이저 은행들이 지금보다 더 커지는 것은, 고객에게도 금융 시스템 전체에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7. CS는 왜 몰락했는가

 

크레딧스위스가 규제당국에 의해 UBS에 합병된 것은, 메이저 은행이 망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재앙적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크레딧스위스는, SVB나 Signature Bank와는 차원이 다른 글로벌 메이저 은행이다. 전 세계 메이저 은행 TOP5에 꼽히던 은행이었으니까. 이런 메이저 은행이 기업은행 시총의 절반쯤 되는 가격으로 경쟁사인 UBS에 팔렸다.

 

사실, CS는 SVB사태 몇 년 전부터 중병을 앓아오고 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대출 한번 잘 못 해줬다가 (2021년 아케고스 캐피털의 빌황형님께 돈을 빌려줬다 마진콜로 포지션 청산한 일), 6조에 가까운 손실을 보았던 데에 있다. 손실의 규모는 그 자체로도 천문학적이지만, 진짜 심각한 데미지는 신뢰 상실로 인한 자금 이탈이었다. 잘나가던 투자은행에서 하루아침에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는 은행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각종 추문( 비리 연루, 전 경영진 사찰, 자금 세탁 등등)에 연루되면서 지난 2년간 냈던 과징금이 5조가 넘는다.

 

CS의 특이한 구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CS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스위스에서 CS는 굉장히 보수적인 회사다. 실제로 CS 본사 관리자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엄근진이다. CS의 자산 대부분은,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스위스 채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스위스로부터 예금을 받아다가 이를 월가에서 운용하는 뉴욕 오피스 트레이더 중에는 상남자 / 마초들이 유독 많다. 돈만 잘 벌면 모든 게 정당화되는 분위기 같은 게 있다. 이처럼 유럽의 본사와 미국의 지사가 다른 분위기 속에 운영되는 글로벌 기업은 생각보다 많다(독일 자동차 회사들, 유럽계 제약회사들과 은행들). 하지만, CS만큼 그 간격이 큰 기업은 보질 못했다. 유럽에서는 보수적인 CS가, 미국에서는 공격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둘 사이에서 나쁜 균열이 생긴 것이다.

 

작년 한 해 동안, CS의 예금은 무려 40%나 감소했다. CS의 위기를 감지한 큰 손들이 계속해서 발을 뺐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SVB와 Signature사태가 터지면서, CS는 아예 관짝으로 들어가게 된다. SVB사태 직후부터 스위스중앙은행은 60조가 넘는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CS를 소생시켜보려 했으나, 예금 인출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CS가 침몰해 수습할 수 없는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금융당국 주도로 UBS와 CS는 합병했다. 절대 망하면 안 되는 중요 은행을, 더 큰 은행에게 떠넘기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큰 은행에 자산을 몰아주는 건 결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CS는 이미 오랫동안 중병을 앓았다. 자력 회생은 불가능한 상태. CS가 누운 관뚜껑에 마침내 못이 박히고 나서 시작될 재앙을 생각하면, 이번 합병은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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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은행도 망한다, 이제

 

SVB, Signature, First Republic 그리고 CS까지. 이번 사태로 가장 절실히 깨달은 것은, 금융기관에 있어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 투자자들은 은행이 정말로 망해버리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금융 시스템에서 은행은 중요한 축이기에,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신뢰가 있기에, 돈을 맡기는 거기도 하고.

 

그런데 신뢰라는 보호막을 한 꺼풀 벗기고 나니, 이들 은행들은 너무나도 맥없이 그리고 빠르게 주저앉아 버렸다. 철옹성 같아 보이던 보유 자산은 사실 허상이었고, 밀려드는 의심과 예금인출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은행은 없었다. 망한 은행들이 심각하게 투자를 잘못해서 망한 게 아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빠르지만, 다시 회복되는 것은 더디다. 이번 사태의 완벽한 극복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여기까지.

 

궁금한 게 있으면 댓글 남겨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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