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바야흐로 조선 중기,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사대부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젊어서는 슈퍼 루키 관료였고, 만년에는 선조로부터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덕분이었다.”라는 평까지 들었을 정도로 인정받던 관료였습니다. 훗날 여러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많은 선비에게도 흠모받던 인물이지요. 

 

그는 26세라는 어린 나이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고(중종 시기), 30세에 세자(훗날의 인종)의 스승으로 임명될 정도로 처음부터 실력을 인정받던 인물입니다. 세자의 스승은 정치적 부담이 큰 자리이지만, 잘만하면 미래에 출세가 보장된 알토란 같은 자리입니다. 

 

내 세상이로구나.jpg

내 세상이로구나~

 

시간이 흘러 자신의 제자 인종이 왕이 되며, 더욱 승승장구할 줄 알았으나 즉위한지 1년도 안 되어 인종은 승하합니다. 명종이 다음 임금이 되었고, 아직 어렸던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와 그녀의 오빠였던 윤원형이 권력을 잡습니다. 과거 SBS 드라마 ‘여인천하’를 생각하면 더욱 잘 이해될 것입니다.

 

새 임금의 즉위와 함께 새로운 권력 세력이 등장하며, 전 임금의 스승이었던 유희춘도 더 이상 승승장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죠. 유배 생활은 20년 동안이나 이어집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시기를 기회 삼아, 유희춘은 더욱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다집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구로 학문적 명성을 쌓게 되기도 하죠.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선조가 새 임금으로 즉위하며 유희춘의 인생은 다시 활짝 핍니다. 유배가 풀리고 두루 요직을 차지하게 됩니다. 선조와의 경연장에도 빠짐없이 소환되며 ‘왕 직속 1타 강사’가 되죠. 

 

그런데 말입니다.jpeg

 

그의 일기를 보면, 세간에 알려진 ‘실력 높은 관료, 명망 높은 학자’ 이미지와는 180도 다르게 부정부패를 일삼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우선, 그가 아주 예민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녹봉”

 

즉, 연봉에 일희일비하였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의 시스템을 보면, 관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며 살림을 꾸려가기엔 녹봉이 상당히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크고 작은 부정부패가 팽배했습니다.

 

유희춘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도 어떤 생각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오게 되죠.

 

“보상, 보상이 필요해!”

 

그 첫 번째 스텝은 ‘남의 녹봉에 손대기’였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부터 보시길 추천!

 

 

첫 번째 소확횡, 남의 녹봉에 손을 대다

 

1568년 7월 13일 ~ 16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병조와 광흥창의 담당자들이 여러 번 찾아와 내게 말했다.

 

“선생님, 타인의 녹봉을 계속해서 대신 받아 가시는 건 너무 심하시지 않습니까. 정당하지 않습니다. 박명성의 녹패(녹봉을 받을 수 있는 증명서)를 반납해주십시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녹패를 돌려주지 않았다.

 

유희춘은 박명성이라는 담양 출신 관직자와 가문끼리 친한 사이였는데요. 그런데 박명성의 녹패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그의 녹봉까지도 자신이 꿀꺽했습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겠죠. 

 

이런 상황을 인지한 여러 기관의 담당자들은 유희춘에게 여러 차례 녹패를 반납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합니다. 하지만 유희춘은 알겠다고 하고 돌아서면 모른척했습니다. 위 일기에 언급된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까지도 박명성의 녹봉을 달달하게 타갑니다. 남의 녹봉을 대신 받아 가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음에도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을 정도였던 녹봉에 대한 그의 집념, 대단하지 않나요?

 

유선비.jpg

제목 : 남의 녹봉에게 바치는 사랑시

 

그의 소확횡 스케일은 점점 커졌습니다. 이내 국가의 ‘잉여물’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국가의 재산으로 친목도모하기 

 

1571년 5월 3일, 7월 21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진주판관 신응기와 상주목사 김공억이 봉여(封餘)로 말린 조개 2말·해삼 2말·전복 1첩·광어 4마리를 보내왔다. 한편, 노수신은 내가 봉여를 보내지 않았다고 화가 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1569년 6월 21일, 11월 25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어제 구종(丘從)을 헌릉의 김창봉에게 보냈는데, 오늘 노비가 여러 목재를 실어서 왔다. 한편, 어제는 옥석이가 담양으로 떠났는데, 오늘 담양에서 노비가 아내의 편지를 갖고 왔다.

 

봉여는 ‘남는 진상품’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전국의 특산물을 채집해서 한양으로 보냈는데요. 이렇게 지방에서 특산품을 긁어모은 후, 할당량을 보내고 남은 물품은 지방관이 지인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대부 세계의 ‘핵인싸’였던 유희춘은 전라감사·충청감사 등의 감사급 지방관에서부터 원주·강릉 등 수령급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전국 팔도의 지방관으로부터 봉여를 받았습니다.

 

위 일기가 쓰였던 시점, 유희춘은 전라감사로 나가 있었는데요. 유희춘 또한 남는 진상품을 관료들, 심지어 자신의 일가친척들에게 시원하게 뿌립니다. 이렇게 관료들끼리 봉여를 주고받는 관행은 ‘국룰’이었어서, 훗날 정승에 오르는 노수신은 유희춘이 자신에게 봉여를 보내지 않았다고 단단히 삐지기도 하죠. 나랏돈 법인카드로 골든벨을 울리는 것까진 좋았지만, 사실 그 진상품은 힘없는 백성들이 혹독한 노동 끝에 긁어모은 것이었습니다. 

 

모르쇄.jpg

난 그런 거 모를 거야

 

국가의 예산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유희춘은 국가의 노동력까지 사적으로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관원들에게 수행원 및 수행비서를 붙여줬는데요. 그들이 바로 구종(丘從)입니다. 

 

원래는 관원이 출퇴근할 때 말고삐를 잡거나 경호하는 역할만 맡아야 하는데, 유희춘은 이들을 사적으로 거리낌 없이 이용합니다. 자신의 녹봉을 타오게 하거나, 지인의 장례식 때 상여꾼으로 보내고, 물건을 운송하는 데 이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이 사는 담양이나 해남까지 내려보내서 집안일을 시켰죠.

 

‘소확횡’의 스케일은 점점 더 커집니다. 유희춘은 병역 비리를 이용해 자신의 수입을 채우기도 합니다. 

 

 

병역 비리를 이용하여 재산 불리기

 

유희춘 같은 고위 공직자에게는 약간의 호위 병력이 지급되었는데요. 이를 반당(伴倘) 혹은 반인(伴人)이라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반인들은 실제로 호위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고, 소속된 관료에게 일정한 상납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의무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국방의 의무를 돈으로 수행한 셈이죠.

 

일정한 상납금을 내지 못해 반인(伴人)으로 근무하게 되더라도, 그건 군 복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훨씬 편했기 때문에, 군 복무 인원을 반인으로 빼는 병역 비리는 많이 성행하였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까닭은, 관료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호위 병력을 직접 뽑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일기를 보시죠.

 

1573년 8월 22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임제라는 자가 내게 찾아와 말하길,

 

“영감님. 저를 가짜 반인으로 넣어주시면 제가 꼬박꼬박 상납금을 바치겠습니다.”

 

그가 이런 부탁을 하는 건, 편법으로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법을 어기는 것이라 여겨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s나한테 바라지마.jpg

 

임제라는 사람은 유희춘에게 가반인(假伴人), 즉 가짜 반인으로 자신을 넣어주면 성실하게 상납금을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청탁을 넣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임제라는 자가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정보도 빠삭한 덕분이었을 텐데요. 유희춘은 그의 요청을 ‘법을 어기는 것’이라며 거절합니다. 그런데 다른 상황에서 그 원칙은 히마리 없이 무너집니다.

 

1574년 3월 11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윤심이 그 아버지인 윤복의 요청으로 공문을 써 왔는데, 집안의 서자 윤면중을 윤복의 반인으로 넣어 군역을 피하게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관련 문서들을 증빙하여 병조판서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 해의 일기입니다. 이번엔 임제처럼 생판 남이 아니라, 그와는 인척 가문이었던 윤 씨 가문의 사람이 반인 청탁을 넣은 것인데요. 이때 유희춘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도대체 임제의 청탁은 안 되고, 윤씨의 청탁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둘 다 위법인 건 분명한데요. 이것이 이유일까요? 이유는 조선 사회 친인척은 경제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부정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jpg

 

... ...

 

이렇게 유희춘이 공적인 자원을 사적으로 유용하면서 얻은 수입의 규모는 어땠을까요? 

 

그가 받았던 선물의 총량을 계산하면, 선조 즉위년에 받은 양이 쌀만 186석이 넘습니다. 거기에 공노비, 즉 관아 및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를 사적으로 이용하여 받은 상납금 또한 26석 정도였죠. 이때 그가 받은 녹봉이 51석 정도였으니, 사적 수입이 녹봉을 아득히 압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녹봉이 관료로서의 정체성과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상징적인 수입이었다면, 실제 생계를 채우는 수입은 이러한 ‘부수입’이 담당했다는 뜻이죠. 부수입이 주수입을 압도하는 이 기막힌 현실은 유희춘뿐만 아니라, 위로는 영의정에서부터 밑으로는 아전들까지 모두가 공유하는 ‘경제 생태계’였습니다.

 

이쯤 되면 ‘소확횡’의 수준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데요. 관료들의 사적 유용은 더욱 대담해져, 군인들을 동원해 각종 개인적인 토목 사업을 이뤄내기까지 합니다.

 

1567년 12월 16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곽 부사를 만나러 가니, 그가 군인을 보내 나를 영접했다. 관사에서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에 우리 조상님 묘 가토 작업(묘에 흙을 덮고 잔디를 다시 심는 작업)에 일꾼이 좀 필요한데, 혹시 남는 손이 좀 있는가?”

 

“잘 오셨습니다. 마침 군인 300여 명 정도가 일손이 빕니다. 이들을 먹일 식량도 충분하고요. 제가 인력과 물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잘됐네! 내가 크게 도움을 얻는구먼”

 

성동일.jpg

여윽시 자네야~

 

당시 관료들에게 가토를 비롯한 묘소 관리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는데요. 이를 위해 공식적인 휴가까지 받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토 작업에 지인의 노비들을 빌리는 것은 기본이요, 이처럼 인근 관아에 소속된 군사들을 징발하여 작업하는 것도 빈번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300명이나 되는 군인을 말이죠.

 

이렇게 많은 군인을 징발한 까닭은, 가토 작업과 더불어 묘소 앞에 연못을 파는 작업도 같이했기 때문입니다. 부대에서 전설로만 듣던, “이곳에 연못을 만들라”라는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실제로 연못이 뚝딱 만들어지는 그 일화가 조선시대에는 꽤 흔했던 거죠. 

 

이것이 임진왜란이 터지기 20여 년 전의 일화입니다.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용산의 국방부를 퇴거시켜버린 대통령 부부는 알까요? 군인을 만만하게 대하고 마구 이용하다가, 일순간 와르르 무너졌던 조선의 역사를요.

 

 

공적 자원을 이용하여 내 집 마련하기

 

그런데 이렇게 야무지게 재테크 해봤자, 다시 유배를 가게 되면 말짱 꽝입니다. 그동안 쌓아놨던 재산이 와르르 빠져나갈 것입니다. 장기적 연속성을 갖추기 위해선, 무언가 지속 가능한 수입이 필요했습니다. 예금도 펀드도 없던 농업 국가 조선에서 결국 답은, 부동산이었습니다. 

 

유희춘은 부동산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공권력과 공적 자금을 충실히, 아주 싹싹 긁어서, 꼼꼼하게 이용하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가카식 기법’을 활용합니다. 특히, 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가카식 기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입체_조선복지실록__띠지.png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