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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사대부로 임금부터 하급 관료에게까지 학문과 행정 실력을 골고루 인정받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인종의 스승이었으며, 선조가 왕이 된 후에는 경연장에 빠짐없이 소환되어 ‘왕 직속 1타 강사’로도 이름을 날린 인물입니다. 그는 훗날 여러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조선 사회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PNG

나 이런 사람이야~

 

그러나 그가 생전 썼던 일기인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읽어보면, 그가 대외적으로 받았던 평가와는 다른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남의 녹봉을 자기가 가로채기도 하고, 국가 재산으로 다른 관료들과 친목도모를 하기도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타인의 병역 비리를 도와주며 돈을 받고, 자기 조상 묘를 공사하는데 공적 자원과 군인들을 투입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권력을 이용한 재테크 방식으로 유희춘은 재산을 차곡차곡 불려 갑니다.  

 

더욱 기막힌 점은, 당시 이런 부정부패가 유희춘뿐 아니라 위로는 영의정에서부터 밑으로는 아전들까지 모두 공유하는 ‘경제 생태계’의 일부였다는 점입니다.

 

유희춘의 일기에는 더욱 놀랄만한 비리가 계속 나오는데요. 이어서 소개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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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자원을 이용하여 내 집 마련하기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야무지게 재테크 해봤자, 다시 유배를 가게 되면 말짱 꽝입니다(유희춘은 선조의 전 왕이었던 명종 재임 당시 20년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죠). 그동안 쌓아놨던 재산이 와르르 빠져나갈 것입니다. 장기적 연속성을 갖추기 위해선, 무언가 지속 가능한 수입이 필요했습니다. 

 

예금도 펀드도 없던 농업 국가 조선에서 결국 답은, 부동산이었습니다. 유희춘은 부동산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공권력과 공적 자금을 충실히, 아주 싹싹 긁어서, 꼼꼼하게 이용하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가카식 기법’을 활용합니다. 특히, 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가카식 기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유희춘의 후반기 관직 생활 9년 동안, 그는 전라도 여러 지역에 총 4채의 집을 짓습니다. 이 집들은 47칸, 55칸에 이르는 규모로서, 관리들의 가택 규모를 제한했던 법적 규정을 한참 벗어난 집이었습니다. 물론, 유희춘 외에 다른 지방 사대부들도 이런 규정을 지키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유희춘을 비롯한 당대 관료들의 부동산 재테크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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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 12월 16일~17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내가 해남에 집을 지을 결심을 하자, 여러 지인이 벌써부터 도와주고 있다. 지난번 해남현감은 해남의 농부 364명을 징발하여 1명당 기와 22장씩 운반하도록 지시했다. 어제는 이억복이 해남에 있는 자신의 밭을 나에게 희사했다. 오늘은 첨사 이선원이 찾아왔다. 그와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에게 우리 집을 짓기 위해 쓸 재목을 부탁했다.

 

1568년 3월 7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노비 석정이를 대둔산에 보내 2월 20일부터 기와를 굽게 했다. 또한, 가리포에 쌓인 목재는 윤 생원이 공무로 겸사겸사 가면서 배에 실어 왔다. (전라)감사가 보낸 쌀이나 콩 같은 양식과 물자도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이것으로 기와 굽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것이다.

 

집 하나 짓는데 노후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우리네와는 달리,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의도만 있어도 알아서 일이 착착 진행됩니다. 유희춘이 해남에 집을 지어야겠다는 말을 흘리자, 훗날 함경남도 절도사에 오르는 무관 이억복이 자신의 밭을 내줍니다. 또한, 무관 요직을 역임한 첨사 이선원은 나무를 제공하기로 하죠. 어떤 이는 공무차 간 곳에서 목재를 실어다 주고, 전라감사는 든든하게 나랏돈으로 ‘슈퍼챗’을 쏩니다. 유희춘의 집짓기는 매번 이런 식이었습니다. 항상 지인들의 노비를 빌렸고, 항상 지방관의 물자와 인력 지원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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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20명만 더 빌려주시오

 

1571년에는 유희춘이 전라감사가 되는데요. 그러자 해남, 담양, 창평 지역의 지방관과 전라좌수사 같은 지휘관은 유희춘의 집짓기를 지원하는 것이 최우선 업무가 되었습니다. 인사고과를 매기는 상급자가 헤헤거리며 주는 대로 다 받는데,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이 사람 저 사람 하도 많이들 거들다 보니, 도대체 이 집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과연 이들은 이런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유희춘에게 목재를 공급한 이선원은 과거 제주목사로 일할 때, 나무와 면포를 옮기는 개인적인 일에 병사들을 부려서 잘린 적이 있습니다. 즉, 누가 걸고넘어지면 여지없이 문책을 당할 수 있었다는 거죠. 때문에 유희춘도 이런 행태가 잘못된 것이라는 문제의식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일기를 보시죠.

 

1569년 8월 10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사돈인 윤탄지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진도 근처에 간석지(밀물 때는 바다였다가 썰물 때는 드러내는 해안가의 땅)가 있는데, 대충 오십 마지기 정도 됩니다. 만약 진도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을 동원하면 딱 하루 만에 둑을 막아서 그곳을 간척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토산품이나 해물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 진도가 도내의 으뜸이 될 것이며, 저 또한 큰 농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영감께서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분명 타당성 있는 사업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을 부려서 사업을 일으키는 건 정말로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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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째야하나...

 

유희춘은 경제 공동체인 해남 윤 씨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난색을 표합니다. 군인들을 징발해서 사업을 하는 것도 문제인데, 개발이익이 백성이 아니라 특정인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숙고 끝에 승낙하는데요.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진도별감에게 군인 징발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유희춘이 약간 떨떠름한 마음으로 타인의 부정을 도왔듯, 유희춘의 집짓기를 도와줬던 관료들 또한 그러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고발당한 유희춘과 피의 쉴드

 

아무리 핵인싸라도 언젠가는 부정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유희춘의 집짓기가 점점 스케일이 커지자, 누군가 상소를 올려 유희춘을 직격합니다.

 

1571년 7월 15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전직 남원판관 이원욱이 서울로 상경하여 상소로 나를 고발했다. 그 내용은 내가 공직에 있을 때 사사로이 민가에서 잠을 자고, 또한 공적 자금을 유용해서 집을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전직 남원판관 이원욱의 고발은 팩트 그 자체입니다. 유희춘의 집짓기는 불법 그 잡채였으니까요. 이 사건이 공론화되면,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리만 골라서 앉았던 ‘선생님들의 선생님’ 유희춘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과연, 유희춘은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했을까요?

 

1571년 8월 16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박순이 나를 변호하며 말했다.

 

“이원욱의 고발은 아예 근거가 없어 터무니없습니다. 혹 남원에 그런 유언비어가 돌더라도, 그런 말에 어떻게 조정이 현혹당하겠습니까. 요즘엔 간사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하면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뿌리는 게 너무나 흔합니다. 게다가 이원욱은 남원판관으로 있을 때 직무를 잘 다스리지 못해 파직되는 것이 마땅했는데, 그것에 대한 보복이 분명합니다.”

 

팩트만 담백하게 담은 자신에 대한 고발을 유희춘은 직접 해명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조정에 즐비한 자신의 지인들이 알아서 필사적인 쉴드를 쳐줬으니까요. 그중에는 곧 우의정에 오를 박순도 있었습니다. 박순은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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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유언비어이며, 전라감사 유희춘에 의해 잘린 이원욱의 사적인 보복이라는 주장으로 일을 덮습니다. 참고로 박순은 선조가 “소나무와 대나무같이 곧은 절의와 지조의 소유자”라는 찬사를 보냈던 인물입니다. 

 

5년 뒤인 1576년에 유희춘은 창평에도 집을 짓는데, 이 과정에서 창평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작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희춘이 창평현령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아 집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현내에 가득했었는데, 이때도 유희춘은 무사히 지나갑니다. 

 

아무리 죄가 있어도 검찰이 쉴드치면 다 무혐의인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당시 조정에 즐비한 유희춘의 지인들이 피의 쉴드를 쳐주니 유희춘의 행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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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상이로다~

 

 

선물에는 관직을, 거절에는 보복을

 

여기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선물과 뇌물이 녹봉을 압도하고, 선물과 뇌물을 보내지 않으면 오히려 ‘국룰’에 위배되던 시대. 한편으론 뇌물과 사적 유용 문제로 인해 낙마하거나 파직되는 관료가 수두룩하던 시대. 조선 사회의 이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선물을 보내게 되는 동기로부터 찾아봐야 합니다.

 

조선 사회의 경제 체제는 이른바 ‘선물 경제’라고 하여, 상호 간의 선물을 통해 재화를 충족하던 시스템이 강하게 발휘되는 사회였습니다. 잉여생산물은 부족했고, 유통 경제는 별로 성장이 되지 않았기에, 조선에서는 자연스럽게 ‘선물 경제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체제에서 선물 경제를 가장 활발히 발휘할 수 있는 자리는 지역의 생산물을 총괄하는 수령 자리였습니다. 

 

때문에 출세를 위해 인맥이 굉장히 중요했던 조선 관료 사회에서, 자신이 수령 자리에 있을 때 최대한 가용할 수 있는 지역 생산물을 활용하여 여러 고위 관료에게 인사청탁을 위한 선물 공세를 하는 행위는, 선물경제체제인 조선에서 가문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사대부들의 필수적인 생존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선물을 줄 때 항상 뇌물이라는 성격을 밝히는 건 아닙니다. 당장 부탁할 게 없어도 주는 경우도 많이 있었죠. 하지만 당장의 시점에서 그것이 뇌물인지 선물인지 차치하더라도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이에 대한 반작용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뇌물을 옹호하는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절대 ‘노’입니다. 제가 여기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허점이 많은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도덕성에만 의존한 사회는 이렇게 모순적이고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에피소드에서 나왔듯, 『미암일기』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장면은 ‘벼슬자리 청탁’과 ‘부역 면제 청탁’ 장면이죠. 일기가 기록된 9년 동안 그가 벼슬자리 청탁을 받았던 건 49건이며, 그가 누군가를 밀어 넣기 위해 청탁을 했던 건 71건에 이릅니다. 특히, 1573~1574년에 청탁 건수가 가장 많은데요. 이때 유희춘이 고위직에 있으면서 인사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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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령 사돈의 팔촌의 관직 자리를 알아봐 달란 말이지...

 

인사청탁 과정은 때로 숨 가쁘게 진행됐습니다. 아무리 영향력이 있더라도, 이미 결정 난 인선을 뒤집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적당한 타이밍에 슬며시 추천인의 이름을 밀어 넣는 것, 이것이 청탁의 포인트였습니다. 일기에는 그러한 눈치싸움이 잘 드러납니다.

 

1571년 11월 20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자정 무렵, 아내의 조카 이방주의 아내가 편지를 보내왔다.

 

“영감님, 무장(戊長)의 현감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탄핵 되었다고 하옵니다. 빠르게 움직여서 저희 남편을 차기 무장현감 자리로 추천해주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자마자, 즉시 이조참판 강상지에게 편지를 보내 차기 무장현감 적합자는 이방주라는 점을 강조하는 편지를 보냈다. 내일 차기 현감 선발 회의에서 결론이 어떻게 날지, 깊은 밤까지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야삼경, 대부분이 이미 잠자리에 든 그 야심한 시간에 유희춘 집에 노비 한 명이 도착합니다. 그에게는 처조카댁의 편지가 들려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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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이 엄청 서둘렀다니께유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만유!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무장현감 자리가 공석이 됐으니, 우리 남편 좀 밀어 넣어주세요.” 이 편지를 보자마자, 유희춘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데요. 인사 담당자인 이조참판에게 다이렉트로 추천장을 밀어 넣은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청탁이 통했는지 아닌지 전전긍긍하면서 잠을 못 이룹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막 추천했던 건 아닙니다. 유희춘이 추천장을 스윽 밀어 넣었던 최우선 후보는 자신의 친인척이나, 자신과 경제 공동체로 엮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청탁을 넣은 사람이 관직에 발탁되면, 그는 여과 없이 자신의 속물적 기쁨을 일기에 표출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모습도 일기에 나타납니다. 유희춘은 그에게 선물과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집요하게 보복했던 모습입니다.

 

반대되는 두 상황에 대조적인 유희춘의 모습, 다음 편에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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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