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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탕탕탕!!”

 

1961년 5월 16일 새벽이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와 육사 장교 250여 명, 사병 3,500여 명이 한강대교를 건넜다. 오전 4시 30분, 쿠데타 세력이 방송국을 접수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응애~! 으으응애애애~~!!”

 

그 시각,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의 어느 한옥에서 울음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다. 이제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갓난아이 울음이었다.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을 리 만무하건만, 아기는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분아~! 동분아~! 우리 예쁜 동분이가 왜 이럴까…….”

 

동순, 동근, 동운, 동분(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현희까지). 가난한 집안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1961년 3월 20일생 정동분 씨.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만큼이나 기구한 동분의 삶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훗날 동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점집에 방문해 운수를 점치곤 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비~ 밀~!”이라고 하는 날은 뭔가 기분 좋은 말을 듣고 온 날이었다. 부적을 사 오면서 “이게 다~ 이름 때문에 그려. 이름. 에휴~!”라고 하면 뭔가 잘못된 날이었다. 그렇듯 동분은 일이 뜻대로 안 풀릴 때마다 이름을 걸고넘어졌다.

 

동래 정(鄭).

 

동녘 동(東).

 

나눌 분(分).

 

동분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마지막 글자였다.

 

“내가 어떻게 알어~! 우리 아부지가 지어준걸. 나누면서 살라고 그랬나 보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가지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는데, 나눌 게 어디가 있다고 이름에 분(分)을 붙여줬나 몰러.”

 

평생 술에 절어 사느라, 월급봉투 한 번 집에 갖고 온 적 없다던 동분 아버지는, 어쩌자고 동분에게 분(分)을 붙여줬을까. 모를 일이다. 동분 말처럼 이름이 동분 인생을 그렇게 이끈 건지, 동분이 이름 따라 그렇게 산 건지, 그 또한 모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엎치나 메치나 동분은 그 이름처럼 살아왔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마음을, 시간을, 그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는 젖까지 나눠야 했다. 말 나온 김에 그 사연 한 번 들어보자.

 

“1983년 5월이었어. 니네 형 주성이가 2월생이니까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됐을 때네. 니네 친할머니한테 전화가 왔어. 지금 난리가 났다는 거여~!”

 

시아주버니, 그러니까 동분 남편의 형이 감옥에 갔다. 술 먹고 사람을 때렸다. 합의금이 없으니까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내도 집을 나갔다. 이제 막 돌이 지난 딸과 이제 갓 태어난 아들을 버려둔 채.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막막했으리라. 치매에 걸려 벽에 똥칠하는 시아버지와 괴팍하고 깐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시어머니, 거기에 백수건달 알코올중독 막내 시동생까지. 연년생 둘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댁 살림에 남편까지 감옥에 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었을 거다. 팔자 한번 사납다.

 

집 나간 큰며느리 대신해 노모가 갓난아기 둘을 떠안았으니 그 팔자는 또 어떻고. 이제 믿고 의지할 데라고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였을 게다. 동분이 말한 1983년 5월은 그런 상황이었다.

 

동분이 송(宋) 씨 집안 둘째 아들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 집안을 잘 아는 사람들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뜯어말렸다.

 

“그때 그 사람들 말 좀 들을걸, 내가 미쳤지. 뭐에 씌어도 단단히 씌었던 겨. 이날 이때까지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준 적 없는 니네 아빠가 뭐 좋다고, 그 멋대가리 없는 사람한테 시집을 왔나 모르겄다. 하긴, 그랬으니까 너랑 이렇게 마주 앉아서 얘기하고 있겄지. 호호호.”

 

송(宋)씨 집안 안주인, 그러니까 동분 시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훗날 90세까지 무병장수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가는 그날까지 하루 담배 두 갑씩 태우면서 둘째 며느리 괴롭히는 재미로 살았다나 뭐라나. 여하간 그 팍팍하던 시절에도 새벽닭 울기 무섭게 일어나 찬물로 머리를 감고, 참빗으로 곱게 쓸어 올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온 집안 문과 창문을 열어젖히고 이불을 죄다 걷어와 탈탈 털어 마당에 널어놓은 후에야 하루를 시작했다고 하니, 그 꼬장꼬장한 성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 집안에 아들이 셋인데, 삼형제 모두 그 꼬장꼬장한 성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첫째는 툭하면 주먹질이요, 막내는 허구한 날 술이었다. 그나마 둘째가 사람 구실을 좀 했는데 핏줄은 타고난 거라, 그 성질은 어디 안 갔다. 하여, 그 동네는 물론이거니와 옆 동네, 윗동네, 아랫동네 할 것 없이 송씨 삼형제라고 하면 혀부터 찼다. 지나가던 개도 그들을 보면 꼬리를 바짝 내리고 벌벌 떨다가 끝끝내는 오줌을 지렸다나.

 

“니네 아빠가 그러더라고. 내 직장이 청주여서 1시간 거리를 출퇴근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청주에 집 얻어 나가려던 참이었다, 이참에 같이 청주 가서 살자, 청주 가서 살면 시집살이 안 해도 된다. 그걸로 엄마를 꼬신 겨. 시집살이 안 하게 해줄 테니까 자기한테 시집오라고.”

 

젖은 두 통인데, 머리가 세 통

 

그 약속을 깬 건 정확히 1년 만이었다. 1982년 5월 청주에 신혼집 차리고, 1983년 5월 그 사달이 났으니.

 

“100일도 안 된 니네 형을 포대기에 돌돌 말아서 시댁에 들어가는데,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더라니까. 짐 풀기 무섭게 니네 친할머니가 뭐라는 줄 아냐. 쳐다만 보고 섰지 말구 이것들 젖 좀 물리란다. 굶어 죽게 생겼다고.”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쭈뼛쭈뼛 서 있는 동분에게 시어머니는 남매를 안기며 이렇게 말했다.

 

“뭣허냐!!!”

 

동분은 하는 수 없이 남매에게 젖을 물렸다. 부모 없는 걸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남매는 필사적이었다. 동분 젖은 늘 남매 차지였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남매를 싸고돌았다. 다 어미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빨게 내버려 두라면서.

 

남매는 쉬지 않고 빨았다. 빨다 지쳐 잠이 들면 동분 마음이 급했다. 퉁퉁 부은 젖이나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아들, 주성에게 물릴 수 있는 찰나였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는 그 찰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주성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득달같이 쫓아왔다.

 

“니네 친할머니가 눈을 부라리면서 이런다. 제 자식 소중한 건 알면서 남 자식 소중한 줄 모른다고, 어떻게 너는 니 새끼한테만 젖을 물리냐고. 그때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냐. 니네 형 불쌍해서. 내 배로 열 달 품어 낳은 첫아들 아니냐. 없는 형편이었어도 첫 새끼는 첫 새끼인 거여. 많은 건 못 해줘도 설마하니 젖을 뺏길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젖은 두 통인데, 머리통은 셋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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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동분 씨가 업어 키운 큰아들 주성(왼)과

동분 씨 젖을 먹고 자란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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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동분 씨와 아이들

맨 왼쪽이 큰아들 주성

 

동분이 주성에게 젖 물리는 꼴을, 시어머니는 못 견뎌 했다. 어쩔 수 없이 동분은 뜨신 물에 밥을 짓이겨 주성에게 먹였다. 없는 형편에 분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젖 한 번 못 얻어먹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성은 밥알을 꿀떡꿀떡 잘도 넘겼다. 이도 하나 없는,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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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여름, 23살 동분 씨와 이제 막 100일이 지난 큰아들 주성

1년간의 신혼생활을 청산하고 시댁에 들어가자마자 찍은 사진

 

부모 없는 새끼들은 얼굴에서 기름이 흘렀고, 부모 있는 새끼는 얼굴에 버짐이 피었다. 그때도 주성은 울지 않았다. 울어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순하게 누워있었다. 제 젖을 뺏기고도 울지 않았다. 그것이 슬프고 야속해 동분은 자주 눈물을 삼켰다.

 

“니네 형이 지금도 밥을 좋아하잖어. 치킨이나 피자 먹어도 꼭 밥 한 공기 먹어야 하는 사람이 니네 형이잖어. 김치 하나만 있어도 밥 두 공기씩 뚝딱뚝딱 비우고. 엄마는 요즘도 니네 형 밥 먹는 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해. 그때 생각나서.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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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53살 동분 씨와 31살 큰아들 주성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