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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짓임을 미리 밝힙니다

 

보건복지부 홍보 담당자가 알면 고맙다고 내 손에 온누리 상품권이라도 한 장 쥐여줄 만큼, 그간 나는 정신과 약의 효능에 대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정적인 찬사를 보내왔다. 왜냐면 내 인생의 질이 약을 먹기 전과 후로 완벽하게 나뉘기 때문이다. 장장 18년이란 세월 동안 정신과 약을 먹었다. 뭐, 이유야 다들 아실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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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 연재물(링크)이었던 "저는 삼풍백화점 생존자입니다"가

책으로 나온지도 이제 좀 시간이 흘렀다. 

인세는 모조리 기부 중이다...!

 

 

불안과 우울 증세를 달래기 위해 매일 같이 약을 털어 넣었다. 여태 한 번 약을 끊겠다고 생각 못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을 먹으면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몇 알 안 되는 약만 한입에 털어 넣으면 단숨에 잠이 왔다. 밤새 이리저리 돌아누워도 잠들지 못했던 몸이, 약 한 봉지에 아침까지 깨지 않고 단잠을 이어갔다.

 

약에 의지하지 않으려면 수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는 기본이다. 가장 엿 같은 건 스트레스 관리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게 가능한가? 일단 오가며 뉴스만 봐도 혈압이 상승한다. 밤새 짜증이 솟구친다. 어째서 저딴 게 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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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쉽게 털어 넣는 약은 너무나 쉽고 간편한 해결책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식사를 마음대로 해도 젖 같은 뉴스를 봐도 약 한 봉지면 확실한 꿀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 오십을 코앞에 두니 몸이 이래저래 안 좋아진다. 2 년 전부터 이곳저곳이 좋지 않아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약을 끊어야겠다고.

 

사실 정신과 약을 끊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약의 후유증은 집어치우고서라도, 약 먹고 편하게 자고 싶다는 유혹을 떨쳐내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오실 거다. 나는 담배도 한큐에 끊은 독종이다. 금연 하는 건 정신과 약을 끊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이번엔 더 지독한 마음을 먹고 약도 끊어보기로 했다. 역시 한 큐에.

 

그렇게 나는 의사와 협의하지 않고 약을 끊는 미친 짓을 시작한다. (미리 경고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의료계 종사자와 나와 같은 투약자가 있으면 이쯤 읽으시라. 둘 다 건강에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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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미리 말하지만, 정신과 약을 조절하는 것은 반드시 전문의와 상의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서서히 함량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땅에 연착륙할 때처럼 부드럽게 속도를 줄이다 멈춰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냅다 끊었다. 어느 날 갑자기 툭. 약을 내다 버리고 단식을 하며 단약을 시도했다.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이냐면, 이렇게 의사와 상의 없이 무모하게 단약을 하면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다. 단약을 하고 일주일간 말도 못 할 금단증상을 겪었다. 결국 울면서 네발로 병원에 다시 기어들어갔다. 선생님께 약을 다시 지어달라 간곡히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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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를 보던 의사의 표정

 

그때 겪은 금단 증세들은 이렇다. 약을 끊자 그간 약물에 의해 억제되던 호르몬이 뇌 안에서 축제를 벌였다. 약과 곡기를 동시에 끊은 3박 4일 동안 별의별 신비체험을 했었다. 자주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들었다. 이런 증상이 있을 것이라 사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어서인지 다행히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짓은 하지 않았다. 만약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면 나도 가까운 방송국으로 뛰어가 내 귀에 도청 장치를 외쳤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이 무렵 뚜렷한 헛소리를 들었다. 환청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런 분명한 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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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없이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오후. 밤새 뒤척이며 못 잤지만 몇 달 전부터 잡은 약속이 있었다. 몸을 추슬러 약속 장소에 갔다. 그곳은 창 넓은 1층의 커피숍이었다. 각자 커피를 주문해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내 귀에 저 멀리 계산대 앞에 있는 스텝 둘이 나를 보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 귀를 열고 자세히 들었다. 그들은 내가 어떤 개를 키우고 있는지 우리 개 이름이 뭔지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개 이름을 알지? 그들에게 가서 어떻게 나와 우리 집 개 이름을 아는지 따져 물으려던 찰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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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나는 도저히 서로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그들이 일하고 있는 픽업 테이블에서

 

"고객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열심히 소리쳐대도 매장 안쪽에 앉은 손님들이 제대로 못 듣기 일쑤였다. 그들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나와 우리 집 개의 이름을 알 리가 없는 거다. 그때 처음으로 어? 이거 이상한데, 하는 자각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커피숍의 모든 소리의 볼륨이 줄었다. 이윽고 내 귀에 신나는 3인조 재즈밴드의 연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커피숍에서 순간 음악의 볼륨을 크게 튼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나 빼고 모든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반응했다. 친구 역시 내게 아까부터 하던 말을 이어 하는 중이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의 말을 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무 놀라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매장 안의 모든 소음이 귀에 와 박혔다.

 

갑자기 분위기 라라랜드

 

안 되겠다 싶었다. 친구에게 몸이 안 좋아 일찍 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며, 시간이 괜찮으면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친구는 그러겠다고 했다. 다시 한 번 몸의 반응들을 체크 체크. 운전대를 잡은 내 손과 반응도 체크. 다행히 오랜 시간 몸에 익은 기술적인 부분들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지금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을까? 친구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조수석에 탔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잠시 후, 도로 위가 전부 MMORPG 게임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차가 있고, 사람이 있는 건 확실히 인지하지만 현실감이 점점 떨어졌다. 얼마 안 가서 차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기어이 내 눈앞에 라라랜드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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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나게 펼쳐지는 눈앞의 환각들이 사실이 아니란 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 이걸 더 놔뒀다간 큰일이다 싶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집에는 잘 도착했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얼마나 위험한 순간이 될 것인가. 내가 만약 이것들이 환상인 걸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운전대라도 잡았다면? 이후 몸과 마음이 호전되기 전까지 절대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강렬한 경험 덕에 전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정신 질환 환자들의 증상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고 들은 환각과 환청은, 그게 처음으로 다가올 땐 전혀 환각과 환청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정신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길 가다가 멈춰 서서 허공을 보며 헤벌쭉 웃던 사람도, 누군가에게 쫓긴다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사람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그들도 나처럼 뇌의 어떤 기능에 문제가 생겨 그런 증상을 겪은 거구나 하는 생각.

 

극심한 추위와 성욕 

 

이튿날 밤부터 오한과 발열이 찾아왔다. 그렇다. 영화에서 마약을 끊은 중독자가 이불을 몇 겹씩 덮고 추위에 덜덜 떠는 모습은 아주 세세히 고증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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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오한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온몸의 뼈가 시리다 못해 이까지 덜덜 떨렸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최고로 올려놓았지만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태 경험해 본 적 없는 추위였다. 그렇게 밤새 앓자 추위의 기세는 점차 옅어졌다. 하지만 뼈에 바람이 든 것 같은 느낌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이 밖에도 수많은 증상이 동반됐다. 두통과 비자발성 근육경련도 있었다. 몸 전체가 딸꾹질하는 것처럼 한 번씩 뒤틀렸다. 그때마다 온몸 여기저기 아프고 쑤셨다.

 

감정 조절도 안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울다 웃었다. 노래를 듣다가 울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울고 자다 일어나 돌아누우면서도 그냥 그렇게 엉엉 울었다. 누가 밤마다 석유 됫박을 가슴에 붓고 성냥을 그어 던지는 것 같았다. 입맛은 또 왜 그렇게 없던지. 3일간의 단식을 끝내고 밥을 먹는데 밥이 아니라 모래를 한 숟가락 퍼먹는 거 같았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이도 시리고 잇몸도 부었다.

 

이때 한 가지 특이했던 현상은 오래전 집 나간 성욕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런 욕구가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그때 갑자기 번식...! 이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아 네발로 기어 다니는 주제에 어디 가서 뭘 어떻게 하겠나. 솔직히 이런 욕망을 느끼기 전에 나는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기나긴 밤을 보냈다던 아낙들의 말들을 믿지 못했다. 예전 선배님들은 다들 사디스트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이게 이렇게 고달픈 일인지 처음 알았다. 몸이 성치 않을 때 찾아온 성욕이어서 망정이지, 몸이 어디 싸돌아다닐 수 있는 형편이었으면 어디 가서 봉이라도 붙잡고 치티치티 뱅뱅하고 있었겠구나 싶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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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뭐가 되게 먹고 싶어졌다. 약을 못 하자 냉장고를 뒤져 미친 듯이 음식을 먹던 더 글로리 사라처럼 나 역시 냉장고 안에 있는 섭취 가능한 모든 음식을 먹고 마셨다. 전에 부활의 김태원이 그랬다. 너무 단 게 먹고 싶어서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녹여서 마셨다고. 나 역시 그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사러 나가는 게 더 귀찮았다. 이래저래 내 몸 안에서 각종 욕망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정신과 약을 끊으려거든

 

이런 처절한 경험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혹여라도 나처럼 무식하게 갑자기 약을 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둘째는 약을 끊는 게 이토록 어려우니 약 처방받을 때 신중하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또 나처럼 반드시 약을 먹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분들이 건강 때문에 고민하고 계시다면, 괜찮다. 나는 18년이나 약을 먹어왔지만, 소화 기능도 간 수치도 여전히 다 좋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약을 드시라 하고 싶다. 다만 더는 약에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이제라고 끊어보려고 한다면 괜히 전문가와 상의하라는 게 아니다, 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을 뿐이다.

 

아, 그럼 지금은 어떻냐고?

 

미친짓(?)을 지나, 지금은 의사와 상담을 통해 시간을 충분히 갖고 천천히 함량을 줄여 약을 끊었다. 약 안 먹고 잠든 지 한 달 좀 넘었다. 나쁘지 않다. 중간중간 깨긴 하지만 약 없이 잘 잔다. 여태 잘해 오고 있다. 앞으로는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땐 고민하지 않고 정신과 문을 두드릴 생각이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세상하고 맞서는 것도 힘든데 나 자신하고까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며 살 일인가 싶다. 뭐가 됐든 편하게 살고 싶더라.

 

마음 아픈 건 흉이 아니다. 감출 일도 아니다. 아프니 일단 약을 먹어 증상을 호전시키고 좀 살만해지면 스스로 건강해지는 방법을 찾는 병, 그뿐이다. 이 글을 읽은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당신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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