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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순이 삼촌』

 

4343.PNG

출처-<창비>

 

 

3만 명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1948년 4월 3일

 

조선독립사진.jpg

 

1945년 8월 15일, 반쪽짜리 해방이 찾아왔다. 자력 해방이 아니었다. 또한 민족 반역자들이 처단되지 않고 오히려 재집권에 성공한 해방이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당시 전체 인구 26만여 명의 제주에서 무려 3만 명이 모여들었다. 여기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집회를 끝낸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나갈 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였다. 그러나 경찰은 모른체했다. 성난 시위대는 기마대를 향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어느 순간 총성이 울렸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것이다. 6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4·3을 두고 남로당 어쩌구 하는데 그건 지엽적인 문제야. 문제는 해방되었지만 친일파들은 그대로 있고, 대학을 다녔어도 취직도 안 되고, 경찰들이 모리배 노릇을 하고 탄압하니까 거기에 반발한 거야.”  

 

-강순현(당시 27세, 오현중 교사, 미군정 관재처 불하과장 역임)-

 

(위 인터뷰 내용과 관련해서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은 (링크)에서 제주 4·3 평화재단, ‘4·3이 뭐우꽈’ 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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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60년대 관덕정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모습으로 추정한다. 

아래 사진은 1948년 5월 1일 제주시 삼성혈 인근에서

촬영된, 기마경찰이 순찰하는 모습.

출처-<제주시·국사편찬위원회>

 

제주도민 전체가 총파업으로 항의했다. 공무원들까지 가세한 세계사상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은 탄압으로 대답했고 ‘서북청년회’의 활약(?)은 눈부셨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의 토지개혁과 친일 청산 과정에서 남한으로 도망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경찰 직함이 주어졌으나 봉급은 없었다. 이것은 약탈에 대한 허가였다. 그들은 잔인한 백색 테러로 자신들의 진가를 증명했다. 제주에 수천 마리의 들개떼들을 풀어놓은 것이었다. 

 

서북청년회.PNG

서북청년회

출처-<제주4·3평화재단>

 

1948년,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5.10 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서북청년회의 테러와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의 폭력에 신음하던 제주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이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권력 장악에 성공한 이승만은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PNG

이승만(오른쪽 인물)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학살은 소수의 무장투쟁 세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무고한 제주도민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자기 나라 군·경의 손에 3만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했다. 제주가 아름다운가? 제주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나를 맞이하는 이국적인 태평양의 바람을 사랑하는가?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활주로 밑에 죄도 이유도 없이 학살당한 원혼들이 묻혀 있음을. 잔인하게 파괴된 수많은 인생을.

 

 

제삿날이 모두 같은 마을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향 땅 한복판에 뚝 떨어진 거였다. 그건 흡사 나 자신이 고향을 찾은 게 아니라 거꾸로 고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낭패스러웠다.

 

‘나’는 팔 년간 고향 제주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제사와 가족묘지 매입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는 큰아버지의 부름은 거절할 수 없었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50분 만에 나를 제주공항에 내려놓았다. 나에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을 선사한 고향은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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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삼십 년 전, 군 소개 작전에 따라 불타버린 내 고향마을 ‘서촌’은 관광지와도 거리가 멀었고 하늬바람이 몰아쳐 귤농사도 안되는 한촌(寒村)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기상 때문인지 유별나게 싸락눈이 많은 마을이기도 했다. 나의 어린 시절 제사에 대한 추억은 파제 후 ‘곤밥’ 몇 숟갈 얻어먹어 보려고 어른들 등 뒤에서 새우잠을 자던 것이었다.

 

제상마저 마을 소각 때 태워 먹고 제물이라고는 마른 생선 하나에 메밀묵 한 쟁반, 고사리와 무채가 다였지만, 메는 꼭 산디쌀밥이었다. 왜 ‘곤밥’이라 했을까. 쌀밥은 빛깔이 고우니 곤밥은 ‘고운밥’에서 왔을 터였다.

 

고모의 울음소리로 시작되는 제사는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한날한시에 마을 이집 저집에서 제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청승맞은 곡성이 터졌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 곡소리가 지긋지긋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어른들이 들려주던 마을 소각 당시의 비참한 이야기도 끔찍하게 싫었다.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1949년 산에 있는 무장공비를 잡겠다고 들이닥친 순경들과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날 노인이고 어린애들이고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오백 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총알 앞에서 하염없이 죽어야 했다. 이것이 나의 고향 마을 제삿날이 모두 같은 이유이다. 

 

제사 사진.jpg

출처-<제주학아카이브>

 

 

충격적인 ‘순이 삼촌’의 소식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제사와 가족장지 매입에 대한 의논을 모두 끝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순이 삼촌’ - 제주에서는 남녀 구별 없이 먼 친척 어른을 삼촌이라 부르는 풍습이 있다. 그리고 순이 삼촌은 여자다 - 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촌수는 멀어도 어릴 때 큰집 제삿날 기억을 떠올려보면 빠짐없이 기주떡 구덕을 들고 오시던 분이었다. 더구나 서울 나의 집에서 일 년 가까이 함께 지냈던 분이기도 했다.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겨를 없어 너한티는 못 알렷져마는 그 삼춘은 며칠 전에 죽어부러시녜.”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우꽈? 순이 삼촌이 돌아가셔서 마씸?”

 

큰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 정정하시던 분이 돌아가시다니. 큰아버지는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며칠이나 순이 삼촌이 보이지 않아 딸네 집에 갔겠거니 했는데, 그것이 보름이 넘자 차츰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큰집의 연락을 받고 시에 사는 딸과 사위가 달려와 이곳저곳 순이 삼촌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초등학교 근처 일주도로변의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부패한 정도로 보아 죽은 지 이십 일은 좋이 넘어 보였다고 했다. 

 

그 밭이 일주도로에서 한 밭 건너에 있었음에도 이십 일이 넘도록 사람 눈에 안 띈 것은 거기가 후미지고 옴팡진 밭인 데다가 밭담으로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올 때 입었던 밤색 두루마기에 따뜻한 토끼털 목도리까지 두르고 자는 듯 모로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는 먹다 남은 꿩약 싸이나가 몇 알갱이 흩어져 있고......

 

이곳이 순이 삼촌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묫자리였다. 순이 삼촌은 쉰여섯의 나이에 당신이 평생 일궈 먹던 밭을 찾아가 양지바른 데를 골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유서도 한 장 없었기에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삼촌을 자살의 궁지까지 몰아넣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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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혼자 사는 사람들>

 

 

1949년 그날, 군·경과 청년단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1949년 그날 아침, 나보다 한 살 많은 큰집 길수 형과 일곱 살의 나는 큰아버지를 도와 밭 거름으로 쓰려고 갯가에 올라온 뜸부기나 감태 따위 해초를 한군데 모아놓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별안간 밖에서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연설 들으러 나오시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오!”

 

심상치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순경이나 대동청년단원 몇 사람이 다일 텐데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도 수십 명이 있었다. 그들은 총검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병든 노인까지 내몰았다. 길수 형과 나 그리고 할머니와 큰아버지까지 모두 그들에게 끌려 국민학교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동네 꼬마들부터 병든 할머니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군인 가족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돈에 팔촌까장 덮어놓고 나오디 말구 직계가족만 나오라요. 만일 군인 직계가족도 아닌데 나온 사람은 당장 엄벌에 터하가시오.”

 

74년의 기억, 제주 4.3의 붉은 상징 '동백'|'4.3이 머우꽈' 현기영 작가|차이나는 클라스| 0-50 screenshot.png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조회대 위에서 권총 찬 장교가 호령했다. 단 밑에는 함덕지서 순경들과 검게 그을린 대창을 든 대동청년단 예닐곱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고 그 뒤에는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 군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군인 가족들에 이어 순경 가족이 나갔고 곧 공무원 가족들도 나오라고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맴돌았고 모인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앞다투어 나아가 이장과 청년단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적 관계와 친분들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호했다. 직계가족이 아니라면 모두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 북새통을 뚫고 누군가의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 났다.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마을 쪽 하늘에서 까맣게 불티가 날리고 있었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바람에 밀려왔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운동장에 몰아넣고 그들이 불을 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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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48년 5월 1일 제주 오라리 마을 방화 사건 

 

 

열한 번의 학살

 

화들짝 놀란 마을 사람들이 학교 돌담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그때 사람들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서편 울타리 돌담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어 밖으로 나가려고 몸부림쳤다. 지체 없이 총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돌담 위에 흰 무명 적삼을 입은 노인 한 사람이 죽어 엎어졌다. 군인 중 열 명 남짓이 빠른 동작으로 돌담 위로 뛰어올라 아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조회대 뒤에 늘어서 있던 군인들도 합세해 마을 사람들을 포위했다. 권총을 뽑아 든 장교는 귀에 선 이북 사투리로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소리쳤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졌고 “영배 각시 총 맞았져.”라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부락민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쓰러진 여편네의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군인들이 긴 장대 두 개를 들고 왔다. 그들은 그 장대의 양 끝을 잡고 몰려 있는 군중들을 뜯어냈다. 한 번에 오륙십 명씩 떼어내 교문 밖으로 내몰아나갔다.

 

74년의 기억, 제주 4.3의 붉은 상징 '동백'|'4.3이 머우꽈' 현기영 작가|차이나는 클라스| 1-3 screenshot.png

 

조회대 뒤편, 우익 인사들의 가족이 모인 곳에 생존이 있었다. 그곳엔 할머니가 있었다. 미리 선수를 쳐 서북청년단 출신 군인에게 당신의 딸이자 나의 고모를 시집보낸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길수 형과 나는 소란을 틈타 조회대 뒤편으로 냅다 뛰어갔다. 청년단원들이 우리를 겨냥해 대창을 휘둘렀으나 용케 맞지 않았다. 우리 뒤를 이어 조회대 뒤로 달려든 아이들과 아낙네들은 대창에 쫓겨갔다.

 

우리가 쫓기며 조회대 뒤로 가자 거기 모인 우익인사 가족들이 얼른 우리를 안으로 끌어넣어주었다. 할머니가 달려들어 치마를 벌리고 닭이 병아리 품듯이 우리를 싸서 숨겼다.

 

군인들의 장대에 돼지 몰리듯 끌려 나간 사람들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이 모두에게 사정없이 개머리판을 휘둘러댔다. 그리고 뒤처지는 사람들 뒤꿈치에 대고 총을 쏘았다. 끌려 나간 사람들이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얼마 후 어김없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 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 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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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48년 11월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제주도민들이다.

출처-<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오륙십 명씩 모두 열한 번 끌려 나갔다. 이 학살이 멈춘 것은 마침 대대장의 지프차가 도착하여 총살 중지 명령을 내리고 나서였다. 그러나 이미 오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 나간 뒤였다.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장소가 바로 일주 도로변 순이 삼촌의 옴팡진 밭이었다. 

 

까마귀들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의 광택 있는 검은 날개빛은 순경들의 옷과 흡사했다. 그것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 심심하면 겨울 하늘로 떼 지어 날아오르며 하늬바람 타기를 했다. 순이 삼촌네 옴팡진 밭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 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뜯어 먹은 개들은 미쳐버렸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시체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석 달 가까이 방치된 시체들은 짐승들에 뜯기고 풍우에 썩어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애어머니들의 시체는 대개 제 자식의 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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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죽음보다 잔인한 생존

 

또 한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 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밤이 이슥해진 그때까지 시체 무더기 속에 파묻혀 까무러쳐 있었던 것이다.

 

순이 삼촌은 살았다. 삼촌은 군인들이 총을 쏘기도 전에 기절해 쓰러졌고, 그 몸 위로 다른 시체들이 몇 겹씩 얹혔기에 살아남은 것이었다. 삼촌의 뱃속 아이도 무사했다. 그러나 삼촌의 두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순이 삼촌은 울지도 않았다.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보다 더 큰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렸기 때문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부락민들은 순경들의 감독을 받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기진 배를 안고 성을 쌓아야 했다. ‘전략촌’ 건설이었다. 순이 삼촌도 임신한 몸으로 돌을 져 날라야 했다. 성은 두 겹으로 쌓아야 했다. 마을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대부분 노인과 아녀자들뿐이라 성을 쌓는 데는 두 달 가까이 걸렸다. 나 같은 어린애도 그 고역을 해야 했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허기진 뱃심으로 돌을 들다 놓치는 바람에 발등을 찍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아기를 가진 순이 삼촌은 물질을 할 수가 없었다. 삼촌은 하루 종일 땡볕에 갯가를 기어다니며 굴과 성게 따위를 주워 먹었고 게, 보말(갯우렁이)을 잡아먹었다. 이 전략촌 생활은 일 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그토록 고통스럽게 쌓은 성이 필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순경들이 말하던 공비들의 습격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 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전략촌.PNG

4·3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이 쌓았던 전략촌 중 하나

 

몸을 푼 순이 삼촌은 무더위 속 옴팡진 밭에서 일을 시작했다. 삼촌의 두 아이들이 묻힌 봉분의 뗏장은 더위를 먹어 독한 풀 냄새를 내뿜었다. 삼촌은 돌담 그늘에 아기구덕을 놓고 일을 했다. 까마귀들이 달려들까봐 거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김을 매었다. 삼촌의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 나왔고 녹슨 납탄환이 부딪쳤다. 그것들은 삼십 년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나왔고 삼촌은 늘 환청에 시달렸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의 세월을 삼촌은 밭에서 나온 뼈와 탄환을 밭담 밖의 자갈 더미 속에 묻으며 버텨왔다.

 

 

두 번 죽은 순이 삼촌의 인생

 

어른들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야릇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순이 삼촌은 한 달 보름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 그날 그 밭에서 죽은 게 아닐까 하고.

 

순이 삼촌에 대한 어른들의 이야기가 큰집 바람벽에 기대어 회상에 잠겨 있던 나를 깨웠다. 싸르락, 싸르락. 창호지창에 싸락눈 흩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내의 부업 덕분에 집안일을 거들어주려고 내 집에 왔던 순이 삼촌을 생각했다. 가정부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마침 순이 삼촌이 서울 구경도 해볼 겸 우리 집에 한 일 년 와 있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순이 삼촌과 함께한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순이 삼촌은 신경쇠약 환자에 환청 증세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삼촌의 지독한 결벽증과 허황된 상상, 그리고 피해망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며 서운해했으며 울고 있는 삼촌 앞에서 아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부부에 대한 삼촌의 막무가내식 오해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순이 삼촌은 강한 사람이었다. 그때 당시 사라진 남편을 찾겠다며 당신에 가해진 경찰의 그 모진 고문도 이겨내고 살아낸 사람이었다. 한 번은 경찰이 순이 삼촌의 옷을 벗긴 적도 있었다. 밤사이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를 확인해야겠다는 이유였다. 남편이 왔다 갔다면 분명 그 짓을 했을 것이고 삼촌의 거기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순이 삼촌도 삼십 년 전의 옴팡밭에서 일어난 비극은 견뎌내지 못했다. 두 아이가 죽은 그 밭은 삼십 년의 세월 동안 삼촌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삼촌이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은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순이 삼촌은 두 번 죽었다. 삼촌의 자살은 두 번째 죽음이었다. 삼촌은 삼십 년 전 당신의 옴팡밭에서 이미 죽은 터였다. 삼촌에 대한 생각이 마무리되자 나는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싸락눈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고 있었고 달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지만, 주위는 희끄무레 밝았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제삿날이 같은 마을이니 아마도 두어 집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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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잉큼잉큼 여행이야기>

 

 

잔인하더라도, 한 번쯤은 혁명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살면서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고 관혼상제 같은 일들을 치러냅니다. 힘든 일을 마친 날은 술을 한잔하기도 하고 쉬는 날에는 TV나 OTT 같은 오락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가족,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나 누군가의 취업과 이직 그리고 승진을 축하하고 때로는 비어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한숨을 쉽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이런 것들을 ‘일상’이라 부릅니다. 이 일상들이 모여 인생을 이룹니다. 모두 소중한 것들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0조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이 소중한 나의 일상과 인생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피해를 당한 국민을 구조하여 국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라고 우리는 납세와 같은 여러 가지 의무를 수행합니다. 국민 보호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 국가라면 국민은 국가 권력을 갈아치워야 합니다.

 

제주 4·3 사건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학살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누군가는 좌익 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기에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자 하는 뱀의 혀놀림입니다. 당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좌익 계열 주장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도 말입니다.

 

당시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한라산으로 들어간 좌익게릴라들의 수는 500명 안팎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제주도민의 수는 3만이 넘습니다. 그 어떤 죽음에도 재판과 같은 정당한 절차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국민에 대한 테러였고 살인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태에 책임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피해자들만이 70여 년의 세월을 자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슴에 한을 간직한 채로 무너져가는 인생을 부둥켜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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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71주년 4·3추념식장에서

4·3 유족 김연옥 할머니와 손녀 정향신 씨 

 

처벌받지 않은 권력, 처벌받지 않은 책임자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하지 못한 국민들. 그 결과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는 일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수학여행 간다고 들뜬 수백의 어린 생명들이 차가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했습니다. 거리 축제를 즐기려던 청춘들 수백도 죽어야 했습니다. 이 죄를 묻는다면 ‘처벌하지 못한 국민들’의 죄가 가장 큽니다. 국가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한 죄가 가장 큽니다. 

 

브이포벤데타.jpg

 

“사람들이 자신의 정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명대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의무를 다하지 않습니다. 의무를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을 조롱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번쯤은 잔인하더라도 성공한 혁명의 역사를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윤석열 불찰.PNG

출처-<노컷뉴스> 링크

 

곧 올해의 4월 3일이 다가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제주 4.3 행사에 불참하겠다고 통보했고, 탈북자 출신으로 ‘국민의힘’ 명함을 달고 강남갑에 출마하는 로또에 당첨되었던 태영호라는 인물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되어서 ‘제주 4.3 사건은 김일성의 지령으로 일어났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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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의원의 보도자료

전문 보기 (링크)

 

자국의 군·경에 의해 비참하게 파괴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순이 삼촌’이라는 여인에 대해 소개해드렸습니다. 한 개인의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 연약한 인생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공한 혁명의 경험을 가진 나라, 자신을 지배하던 황제를 단두대로 보낸 나라, 프랑스의 18세기 인권 선언의 한 부분으로 서른여덟 번째 인생탐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프랑스 인권선언 제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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